# 231
디바인 생츄어리 (2)
드래곤의 모습에서 다시 인간 형태로 모습을 바꾼 칠흑.
라스는 칠흑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려 나갔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였다.
라스의 불이 칠흑을 노렸다.
그러나 붉은 불은 칠흑의 검은 연기 앞에 허무하게 가로막히고 말았다.
“잊었나, 라스! 나에게 그런 불은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
라스의 불 색깔이 붉은색에서 흰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글레드다.
하나 라스는 글레드를 오랫동안 사용할 수 없다.
스카이 랜드 사건 탓에 생긴 후유증 때문이었다.
하나 라스의 힘이 부족해도 상관은 없다.
그만큼 내가 빈틈을 메꿔 주면 되니까!
“라스 씨!”
나는 라스의 이름을 불렀다.
고개를 한차례 끄덕인 라스는 글레드의 불길을 최대치로 끌어 올렸다.
그사이에 칠흑이 라스를 방해하기 위해 검은 연기를 날려 댔다.
어림없지!
“설마 날 잊은 거냐, 칠흑!”
글레드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라스뿐만이 아니다.
나도 있다!
글레드로 장벽을 만들어내면서 라스를 보호했다.
칠흑은 혀를 찼다.
“귀찮게 구는 놈들이군!”
라스가 힘을 충전하는 동안, 나 말고 다른 지원군들이 붙었다.
“칠흑! 감히 나의 동족을 해하다니! 그 죗값, 네놈의 목숨으로 받아 가마!”
레이샤르의 주변에 빛의 구슬들이 다수 형성되었다.
빠른 속도로 칠흑을 향해 쏘아졌다.
빛의 구슬들은 칠흑의 육신을 벌집으로 만들어 버렸다.
하나 칠흑은 고통이라는 걸 전혀 느끼지 않는 시선으로 레이샤르를 응시했다.
“너도 잠식해 줄까?”
드래곤은 칠흑에게 있어서 좋은 먹잇감이다.
칠흑의 도발에 레이샤르는 또 한차례 마법을 난사했다.
그때 레이샤르의 등 뒤로 거대한 낫이 형성되었다.
“레이샤르 님! 뒤를 조심하세요!”
“……!”
레이샤르는 내 충고를 듣고 빠르게 자리를 이탈했다.
쿠웅!
레이샤르가 있던 자리에 낫이 박혔다.
거대한 낫을 휘두른 원흉, 루크가 씨익 웃으면서 나에게 태평하게 인사를 건네 왔다.
“안녕, 로인. 우리, 자주 만나지? 이러다가 정들겠어?”
“안 들었으면 좋겠는데.”
저놈 얼굴 보는 것도 이제는 지긋지긋하다.
루크뿐만 아니라 마리까지 등장했다.
그런데…….
‘왜 데르킨 백작은 없지?’
녀석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데르킨 백작이 소환하는 소환수조차 안 보인다.
‘또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기에…….’
그래도 어차피 상관없다.
칠흑만 없애면 된다.
놈이 지금 가장 큰 적이니 말이다.
루크가 다시 한번 낫을 들었다.
그 순간, 제나드가 정확히 루크의 목을 노렸다.
“큭……!”
루크는 빠르게 뒤로 물러섰다.
만약 조금만 늦었더라면, 목과 몸이 분리되는 마술쇼 같은 장면이 연출되었을 것이다.
제나드는 대검을 추켜 올렸다.
“저놈은 내가 맡도록 하지.”
“또 방해꾼이……!”
루크는 방해꾼이 난입했다는 사실 자체에 굉장히 큰 스트레스를 받는 듯했다.
제나드가 루크를 맡을 때. 다른 원군도 도착했다.
빠른 속도로 마리의 뒤를 노린 반드.
마리의 옆구리를 반드의 단검이 크게 베였다.
“이 녀석은 또 뭐야!”
히스테릭한 목소리를 내면서 반드를 쳐다본 마리는 금세 거리를 벌렸다.
그러나 반드의 속도를 봤을 때 떨쳐 내기에는 힘들어 보였다.
이렇게 루크와 마리는 자연스럽게 떨어져 나갔다.
그동안 힘을 충전한 라스의 글레드가 칠흑이 뿜어낸 모든 검은 연기들을 몰아냈다.
글레드의 불길이 칠흑에게 쏘아지기 일보직전, 또 다른 난입자가 등장해 글레드의 불길을 쳐 냈다.
그러나 아군은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아군‘이었던’ 자였다.
라스가 그의 이름을 읊었다.
“카이딘……!”
* * *
칠흑의 조각에게 잠식되어 우리의 적이 되어 버린 존재, 카이딘.
그의 눈동자는 생기를 잃은 지 오래였다.
칠흑의 조각에게 조종당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어쩐다……?
카이딘을 무시할 순 없다.
주인공 보정만큼 무시무시한 게 주인공 동료 보정 효과다.
라스 일행 중에서 카이딘이 라스와 가장 오랫동안 그와 어울렸다.
게다가 강함으로 따져도 라스 다음이 바로 카이딘이었다.
“…….”
카이딘은 말없이 자신의 검을 들어 라스를 겨눴다.
그 순간, 온갖 마법들이 카이딘을 향해 날아들었다.
카이딘은 검 하나로 마법들을 전부 쳐 냈다.
글레드조차 쳐 낸 카이딘의 검이다. 마법 따위는 우습게 튕겨 낼 수 있으리라.
“역시 강하네요, 카이딘 님.”
“그러게.”
마법을 사용했던 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릴리안, 그리고 엘라시아였다.
엔드라도 껴 있었다.
그래, 카이딘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역시…….
‘같이 행동했던 일행들밖에 없겠지.’
나는 라스에게 말했다.
“칠흑은 제가 잠시 동안 맡고 있겠습니다. 라스 씨는 우선 카이딘 씨를 구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로인 씨.”
라스가 빠지자, 칠흑은 씨익 미소를 지었다.
“데르킨, 그자의 작전 덕분에 편해졌군.”
역시.
카이딘을 잠식시키자는 작전을 세운 건 데르킨 백작이었나?
중간 보스 주제에 칠흑보다 더 흑막같이 활동하고 있는 캐릭터였다.
심지어 최후의 전투에 모습도 안 보이고 있고.
아무리 생각해도 녀석이 뭔가 꿍꿍이를 꾸미고 있다는 것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데르킨 백작을 찾아내야 해!’
하지만 칠흑을 쓰러뜨리는 일도 중요하다.
칠흑이 입을 쩍 벌렸다.
입속에서 검은 연기를 다량으로 토해 냈다.
검은 연기는 날카로운 가시들로 변해 나와 레이샤르를 덮쳤다.
하나 가시는 정령들의 마법으로 인해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이후에 거친 성격의 난입자가 칠흑에게 달려들었다.
“칠흑!”
“이 순간을 기다렸다!”
케프리와 드레드 콤비였다.
융합 모드로 칠흑을 향해 달려드는 콤비.
그러나 칠흑은 팔을 한 번 크게 내젓는 것만으로도 둘을 저 멀리 날려 버렸다.
정령 마법으로 우리를 도와줬던 베라가 케프리에게 외쳤다.
“조심하세요. 놈은 보통이 아닙니다!”
“알고 있어!”
베라와 케프리, 드레드 콤비가 우리에게 합류했다.
하지만 아직 부족하다.
나는 든든한 원군을 소환하기로 했다.
“슬슬 나올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내 말에 호응하듯 벨라시오닉의 혼이 덩치를 키우면서 우리 머리 위에 강림했다.
-조용히 잠들 틈이 없군!
“지금은 난세(亂世)니까요.”
한가하게 잠이나 자고 있을 시간은 없다.
얼추 주연배우들은 다 모인 거 같으니까…….
“슬슬 다시 싸움 시작해 보자고, 칠흑.”
* * *
빠른 속도로 마리를 추격하는 반드.
속도에는 자신이 있는 그였으나, 마리의 칼날 채찍이 계속해서 반드의 진로를 방해했다.
“갈기갈기 찢어 주겠어!”
마리의 칼날 채찍이 반드의 바로 코앞까지 왔을 때였다.
투웅!
빛의 장막에 가로막혀 칼날 채찍이 튕겨나갔다.
“신성 마법? 저 남자가 신성 마법을 사용한다는 정보는 없었는데!”
“난 사용 못 한다. 네가 제대로 알고 있는 거야.”
반드가 사용한 마법이 아니었다.
파이스가 반드를 서포트해 준 것이었다.
“반드! 버프 더 안 걸어 줘도 돼?”
“빛의 힘 따위는 오히려 내 힘을 약화시킬 뿐이다. 그리고 난 버프 따윈 안 받아도 충분해.”
자세를 취한 반드는 라드리치의 모든 힘을 끌어 올렸다.
“라드리치, 최대 레벨 발동!”
반드의 주변에 강한 바람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뜨거운 숨결을 토해 낸 뒤, 반드의 한쪽 눈동자가 번뜩였다.
“끔찍한 시간을 보내고 싶어?”
칼날의 폭풍이 마리의 사지를 찢어 버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당해 버린 것이다.
“망할 녀석……!”
마리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그녀는 육신을 다시 복구시켰다.
“좋아! 어디 한번 해 보자 이거지!”
마리는 머리끝까지 화가 난 상태였다.
고작 쫄따구들한테 당하고 싶진 않았다.
그건 그녀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었다.
칼날 채찍이 마리의 몸을 휘감았다.
채찍의 칼날이 점점 마리의 몸속에 박히기 시작했다.
도중에 반드, 파이스 쪽으로 합류한 에나는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기이한 현상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저 여자, 왜 자해하고 있는 거예요?”
“낸들 알간?”
파이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한편, 칼날 채찍의 옥죄임 속에서 마리는 잔뜩 흥분한 표정으로 외쳤다.
“좋아……! 괴롭혀 줘! 좀 더 나를 괴롭혀 줘!”
그녀의 외침을 접한 에나는 미간을 찡그리고 말았다.
“취향 참 특이하네요. 파이스, 당신의 수비 범위 안에 드는 타입이에요?”
“아니, 전혀.”
아무리 파이스가 여자에 환장하는 캐릭터라 하더라도 칠흑의 조각에 잠식된 채 좀 더 괴롭혀 달라고 침을 질질 흘리면서 애원하는 여자에겐 별로 작업을 걸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타액과 피가 뒤섞여 칼날 채찍을 적셔 가기 시작했다.
붉게 변한 칼날 채찍은 마치 살아 있는 뱀처럼 날뛰었다.
파이스와 에나는 동시에 빛의 장막과 얼음 장벽을 펼쳤다.
그러나 두 사람의 방어 마법으로도 마리의 칼날 채찍을 막을 순 없었다.
“위험해! 숙여!”
뒤에서 익숙한 남자의 외침이 들려왔다.
레드 기사단 소속, 바슬라였다.
“대지여! 지금 당장 일어나 눈앞에 있는 나의 적을 소멸…… 딸꾹!”
중요한 순간에 그의 딸꾹질 마법이 작렬했다.
퍼어엉!
마구 날뛰던 칼날 채찍이 순간 바슬라의 폭발 마법에 휘말렸다.
대지 마법을 발동시키려 했지만 딸꾹질을 하는 바람에 폭발 마법이 나가고 말았다.
하지만 오히려 이게 나이스 초이스가 되었다.
일시적으로 칼날 채찍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때, 정령의 힘을 두른 가르시아가 마리를 향해 매섭게 뛰쳐 갔다.
동시에 반드에게 외쳤다.
“반드! 지금이다! 저년을 없앨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라!”
“기회란 녀석은 반드시 붙잡아야 하는 법……! 후훗. 나를 믿어라!”
반드는 라드리치의 능력을 발동시켜 마리의 움직임을 봉인했다.
그사이에 가르시아가 오른손을 뻗어 마리의 심장을 움켜쥐었다.
꽈직!
심장을 터뜨리자, 마리의 몸이 힘없이 무너졌다.
“아아, 데르킨 백작님……!”
마지막까지 데르킨 백작을 찾는 마리.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 유언이었다.
“끝났나?”
가르시아는 마리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그러나…… 마리는 사라졌지만 칼날 채찍은 아직 남아 있었다.
갑자기 칼날 채찍이 격렬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윽!”
가르시아와 반드는 칼날 채찍의 기습 공격으로 인해 부상을 입고 말았다.
뒤늦게 에나가 얼음 방벽을 쳐 봤지만, 이번에도 무용지물이었다.
파이스가 가르시아와 반드를 보호하며 외쳤다.
“뭐야! 저 녀석, 왜 저래! 주인도 없는데 혼자서 멋대로 날뛰고 있잖아!”
“저도 몰라요!”
에나가 알 리가 없었다.
예상치 못한 위기의 순간에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준 이가 있었다.
투명한 와이어가 칼날 채찍의 모든 움직임을 봉쇄했다.
클라우드 이튼.
아니, 마일이 다가와 칼날 채찍의 손잡이 부분을 움켜쥐었다.
와이어를 이용해 손잡이 부분을 양쪽으로 잘라 냈다.
그러자 절단면 사이로 작은 검은 심장이 뚝 떨어졌다.
“사실 마리뿐만 아니라 이 칼날 채찍 역시 칠흑의 조각으로 만들어 낸 생명체입니다. 그래서 마리가 사라졌음에도 혼자서 멋대로 날뛸 수 있었던 거죠.”
마일은 발로 칼날 채찍의 작은 검은 심장을 짓밟았다.
그제야 칼날 채찍도 마리와 같이 소멸되었다.
마일은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용병들을 보면서 싱긋 웃어 보였다.
“마무리가 아직 어설프시군요, 용병분들. 그래 가지고 어떻게 로인 님을 보필할 수 있겠습니까? 걱정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