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엑스트라-230화 (230/240)

# 230

디바인 생츄어리 (1)

신들이 머물다 간 곳, 성역이라 불리는 디바인 생츄어리.

나는 오늘, 병력들을 이끌고 그곳으로 향할 예정이다.

이른 아침부터 병력들은 한곳에 집결해 있었다.

나는 사무실에서 잠시 시간을 보냈다.

어쩌면 오늘, 이 사무실을 사용하는 마지막 날이 될지도 모른다.

칠흑과의 전투.

그 기나긴 여정에 마침표를 찍을 때가 드디어 온 것이다.

“후우.”

기나긴 한숨을 내쉬었다.

소설 속으로 처음 들어왔을 때에는 뭘 해야 좋을지 앞이 캄캄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현실 세계에 있을 때보다도 더 높은 만족도를 가지면서 소설 속 세계를 살아가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소설 속 세계의 나는 마감에 치이며 박봉 인생을 사는 강시언이 아니라 세계에서 제일 돈 많고 젊을 뿐만 아니라, 이성들에게 인기도 많고 능력 좋은 로인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어쩌면 소설 속 세계에서 평생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아니, 그건 나중에 생각한다고 했잖아.’

나는 스스로를 다그쳤다.

일단은 칠흑부터 없앤다.

출정길에 오르기 전에 내 사무실을 찾은 이들이 있었다.

라그너를 비롯해 바우너, 세올라 등등.

전장에 참가하지 않는 비전투원들이 나를 한꺼번에 찾아왔다.

“다들 무슨 일이야?”

라그너가 내게 대표로 답했다.

“무사히 다녀오시기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다 같이 이렇게 로인 님을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뭘, 새삼스럽게 이런 걸 다 하고…….”

“그래도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라그너는 단호했다.

맞는 말이다.

방금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라그너는 내 모습을 조금이라도 자신의 기억 속에 담아 두려고 하는 모양인지 계속해서 나를 응시했다.

“로인 님은 제게 있어서 생명의 은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아직 로인 님에게 받은 은혜를 다 갚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이곳 나울로 돌아와 주시기 바랍니다.”

라그너와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알코올에 찌든 채 세상일은 다 포기하고 지냈던 라그너.

하지만 지금은 델리피나 최고의 상인으로 거듭났다.

라그너 덕분에 나는 모든 일들을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오히려 내가 라그너에게 은혜를 갚아야 한다.

나는 이들을 향해 미소를 보여 줬다.

마지막 떠나는 길은 웃는 얼굴로. 나는 그렇게 정했다.

“반드시 돌아올게.”

어쩌면 지키지 못할 약속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약속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노력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 * *

블루로즈단, 그리고 레드 라인 기사단 모두가 모인 장소로 향했다.

나는 단상에 올랐다.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타임 그레이브 전투 때였나?

“다들, 내가 타임 그레이브 전투에 나서기 전에 했던 말을 기억하나?”

“예!”

“단장님께서 반드시 저희 모두를 살려서 나울로 돌아오게 해 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잘 기억하고 있군.”

내가 한 말이 허투루 잊히지 않은 건 정말 다행이다.

“입 아프게 두 번 말할 생각은 없다.”

나는 검을 빼 들었다.

“가자, 마지막 전투를 향해서!”

“오오오!”

《델리피나 전기》는 마지막 장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과연 카인이 작성한 예언 내용 그대로 베드 엔딩이 될지.

아니면…….

새로운 엔딩을 이룩하게 될지.

그건 이제부터 지켜봐야 할 일이다.

* * *

디바인 생츄어리로 향하기 전에 우리는 칠흑 토벌 부대 본대와 합류했다.

라크스 공작이 이끄는 본대에 다수의 기사단과 용병 조직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건 역시 스타폴의 군대였다.

병사들 사이에서도 스타폴의 군대 대동은 꽤나 화제가 되고 있었다.

“백 년 동안 꿈쩍 한 번 하지 않았던 스타폴이…….”

“설마 군대를 일으킬 줄이야!”

지난 백 년 동안 단 한 번도 군대를 일으키지 않았던 스타폴.

깊은 사정이 있었다.

스타폴이 군대를 일으키려면 7개 가문의 가주들이 서로 합의를 보고 결정을 지어야 한다.

그러나 일곱이나 되는 사람들의 이해관계를 하나로 합치는 건 생각보다 결코 쉽지 않다.

우리 편집 팀도 일하면서 얼마나 많이 싸웠는데 하물며 스타폴의 7개 가문은 오죽할까?

하나 7개 가문의 가주를 뛰어넘는 절대자가 등장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클라우드 이튼.

지금은 그가 스타폴의 왕이다.

마일은 내게 먼저 다가와 인사를 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로인 님.”

“그동안 잘 지냈지?”

“예, 군대를 일으키느라 정신이 없었지만요.”

스타폴의 왕이 나에게 고개를 숙이자, 병사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대국의 왕이 일개 용병 단장에게 머리를 숙이다니, 듣도 보도 못할 일이 벌어진 셈이었다.

그러나 나와 마일 사이에는 당연한 일이었다.

마일은 내 옆에 나란히 서 있는 파랑새를 바라보면서 내게 물었다.

“파랑새가 저 대신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습니까?”

파랑새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어이, 먼저 부탁해 놓고 뭐야? 갑자기 업무 평가라도 할 생각이야?”

“하하하! 그런 건 아닙니다.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것뿐이니까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나는 마일의 물음에 답해 줬다.

“잘해 주고 있어, 내가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역시 전직 베르투 현자답더라.”

“다행이군요. 아, 추가로 들어온 정보가 있습니다.”

“뭔데?”

“디바인 생츄어리에 칠흑뿐만이 아니라 데르킨 백작, 루크, 마리 등 칠흑 세력의 핵심 세력들이 다 모여 있다고 합니다.”

놈들은 분명 우리가 디바인 생츄어리로 향해 올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망치지 않고 오히려 병력을 모았다.

그 말인즉슨…….

“여기서 사생결단을 내겠다는 뜻이네.”

“예, 그럴 것으로 예상됩니다.”

저쪽도 싸움을 오래 지속시키는 건 싫을 것이다.

칠흑의 포식 본능은 어마어마하다.

그런 칠흑에게 눈앞에 먹기 좋은 음식들을 나란히 차려 놓고 ‘기다려!’라고 한다면 과연 칠흑이 얼마나 인내심을 발휘할 수 있을까?

칠흑의 성격상 그런 명령 따윈 바로 무시해 버리고 일단 다짜고짜 먹어치우기 시작할 것이다.

지금이 딱 그런 상태다.

칠흑은 라우르시스라는 아주 좋은 육체를 손에 넣었다.

힘도 거의 다 회복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웅크리고만 있어야 하니 얼마나 답답할까?

전면전은 오히려 칠흑이 더 바라고 있을 것이다.

전면전을 통해 방해되는 자들을 모조리 쓸어버린다.

그리고 이 세계를 통째로 집어삼킨다.

그것이 칠흑이 바라는 바일 것이다.

이것을 막는 건 우리의 계획이고 말이다.

차라리 잘됐다.

‘이번 전투에서 모든 걸 끝내는 게 좋겠지.’

불안 요소가 있다면…….

‘카인과 휴즈의 행방을 모르겠다는 거야.’

연락을 취할 방법이 없었다.

일단 현자들에게 카인과 휴즈의 흔적을 찾아보라고 했으나, 아직까진 감감 무소식인 듯했다.

최후의 전투에 정작 중요한 인물들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니…….

뭔가 굉장히 찝찝하다.

그래도 여기까지 온 이상 전투를 뒤로 미룰 순 없다.

내일 당장 세계가 멸망할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전투를 뒤로 미룬단 말인가?

‘더 이상은 물러설 수 없어!’

갈 때까지 가 보는 수밖에!

* * *

디바인 생츄어리 근처를 쭉 돌아본 칠흑은 짧게 혀를 찼다.

“신들이 머물다 간 장소라 들어서 뭔가 굉장한 게 있겠거니 싶었는데…… 그저 낡은 유적지에 불과하군.”

데르킨 백작은 그런 칠흑의 말을 그저 듣기만 했다.

디바인 생츄어리로 임시 거처를 정하자고 주장, 그리고 결정한 것은 바로 데르킨 백작이다.

칠흑은 데르킨 백작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그 결과, 디바인 생츄어리가 최종 결전지로 지정되었다.

칠흑은 몰려오는 라크스 공작의 군대를 바라보면서 입맛을 다셨다.

“뭐, 디바인 생츄어리에서 뭔가를 기대했던 것도 아니고. 난 그저 저놈들을 전부 다 먹어치우기만 하면 되는 일이니까.”

“그렇습니다, 칠흑이시여.”

데르킨 백작은 칠흑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그때, 추종자 중 한 명이 다급하게 뛰어왔다.

“놈들이 공격을 시작합니다!”

“그래?”

칠흑의 모습이 잠식된 라우르시스의 외형으로 변해 가기 시작했다.

“어디…… 포식하러 다녀와 볼까!”

커다란 날갯짓을 하면서 연합군을 향해 날아가는 칠흑.

데르킨 백작은 루크와 마리에게 지시를 내렸다.

“가서 칠흑님과 함께 놈들을 쓸어버리고 와라.”

“예!”

루크와 마리는 데르킨 백작의 명령을 듣자마자 바로 행동에 임했다.

두 사람은 칠흑을 위해 움직이는 게 아니었다.

데르킨 백작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이었다.

말없이 디바인 생츄어리 아래의 모습을 내려다보는 데르킨 백작.

그는 검은 브레스를 뿜으면서 전장을 휘젓기 시작하는 칠흑을 바라보면서 의미심장한 말을 흘렸다.

“잡아먹히는 건…… 네놈이 될 거다, 칠흑.”

* * *

디바인 생츄어리로 향하는 길.

언덕 위에서 검은 드래곤 한 마리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또 데르킨 백작이 소환한 그 검은 드래곤인가 싶었으나 그게 아니었다.

레이샤르가 외쳤다.

“라우르시스다! 조심해라!”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갑자기 최종 보스가 난입했다.

이건 뭔가 잘못된 거 아니냐?

보통은 중간 보스부터 차례차례 등장하는 게 예의잖아!

우리는 바로 전투태세를 갖췄다.

라스도 마찬가지였다.

“칠흑……!”

라스의 불길이 가장 먼저 칠흑을 상대했다.

양손에서 뻗어 나오는 거대한 두 개의 불덩이들이 칠흑의 양쪽 날개를 불태웠다.

그러나 칠흑은 공중에서 그대로 떠 있었다.

날개의 유무로 칠흑을 추락시킬 순 없던 것이다.

녀석에게 외형은 크게 상관이 없다.

칠흑의 연기가 사방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연기에서 검은 괴물들이 튀어나왔다.

라크스 공작은 병력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진영을 갖춰라! 놈들의 심장만을 노리고 싸우도록! 비효율적인 전투는 최대한 삼가라!”

그동안 인류는 검은 괴물들과 수도 없이 싸워 왔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아무리 힘든 적이 등장한다 하더라도 계속 부딪치고 싸우다보면 알아서 적응이 되는 법이다.

병력들이 검은 괴물을 상대하는 동안, 가르시아는 정령의 힘을 각성시키려 했다.

그는 드레인에게 외쳤다.

“드레인 님! 제 부대까지 대신 통솔해 주시기 바랍니다!”

“알았어!”

정령의 힘을 각성시키면 이성을 잃게 된다.

그러면 부대 통솔도 힘들어진다.

그래서 가르시아는 미리 드레인에게 자신의 소대를 맡긴 것이다.

각성한 가르시아가 검은 괴물의 머리를 한 손으로 터트려 버렸다.

후방 지원은 에나의 몫이었다.

촤라라락!

에나의 빙결 마법이 검은 괴물들을 삽시간에 얼려 버렸다.

얼은 검은 괴물들은 게럴이 이끄는 레드 라인 기사단들의 타깃이 되었다.

제나드와 리오나도 대활약을 펼쳤다.

한편, 얀은 자신의 무기를 최대치로 키워서 검은 괴물들을 한 번에 쓸어버리고 있었다.

라크스 공작도 지지 않겠다는 듯이 무기를 들어 올렸다.

승기는 점점 우리 쪽으로 기울어지는 듯했다.

하나 방심해서는 안 된다.

‘칠흑 하나가 우리 전체의 전력과 맞먹어.’

아직 본 게임은 시작도 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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