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엑스트라-228화 (228/240)

# 228

전투 준비 (2)

원래 베라에게 케프리라는 약점을 만들 생각은 없었다.

순수하게 케프리를 교화시켜 줬으면 하는 마음에서 베라에게 케프리를 맡겨 둔 것뿐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케프리라는 존재를 잔뜩 어필하는 수밖에.’

베라를 설득할 방법은 이것밖에 없었다.

한편 케프리 이야기가 나온 순간, 베라의 표정은 달라졌다.

그녀의 얼굴에 ‘망설임’이라는 감정이 묻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효과가 있나 보군.’

내심 ‘케프리 따위는 어떻게 될지 저는 몰라요.’라는 말을 하면 어쩌나 싶었다.

베라는 나를 바라봤다.

“설마 이런 심산으로 케프리를 저한테 붙인 건가요?”

“아니. 이럴 의도는 없었어.”

“거짓말인가요? 아니면 진실인가요?”

“진실이야.”

“…….”

진실의 눈이라도 있다면 나의 속내를 보여 줬을 텐데.

베라는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저한테 거짓말을 많이 하긴 했지만, 로인 대장님은 그래도 나쁜 사람은 아니니까요. 알았어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믿도록 할게요.”

그래도 내가 나쁘게 살아오기만 한 건 아닌 듯했다.

흐름을 탔다고 생각한 나는 계속해서 이 기세를 밀어붙이기로 했다.

“케프리를 통제해 줄 수 있는 존재가 필요해. 녀석은 내 말도 안 들어. 그나마 네 말은 잘 듣지. 만약 네가 사라진다면, 케프리는 무턱대고 칠흑에게 덤벼들었다가 무의미한 죽임을 당하게 될 거야.”

“…….”

“네가 케프리의 곁에 있어 줘야 해.”

“하지만…….”

엘라시아를 하이 엘프의 마을로 데려가야 한다는 사명감은 베라에겐 매우 중요하다.

그녀가 그토록 싫어하는 인간계에 스스로 발을 들였을 정도였으니까.

그만큼 중요한 임무임을 뜻하는 것이겠지.

하지만 칠흑으로부터 세계를 구하는 것 역시 중요한 일이다.

“그럼 이렇게 하자.”

나는 베라에게 절충안을 제안했다.

“칠흑을 없애면, 그때는 엘라시아를 데려가도 좋아. 나도 간섭하지 않을게.”

“…….”

여기서 나는 확인하고 넘어가고 싶은 게 생겼다.

“베라, 너에게 엘라시아를 다시 하이 엘프 마을로 데려오라고 명령했던 사람이 누구라고 했지?”

“장로님이십니다. 엘라시아 아가씨의 아버님 되시는 분이자 하이 엘프들을 이끄는 훌륭한 지도자이시기도 하죠.”

“그분이 너한테 했던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말고 말해 봐. 그 정도는 기억하고 있겠지? 중요한 임무니까.”

“…….”

베라는 나를 한 번 쳐다봤다.

내가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베라는 마지못해 내게 하이 엘프의 장로가 해준 말을 그대로 들려줬다.

“‘엘라시아를 이곳으로 다시 데려와라.’라고 했습니다.”

“기간은 따로 말한 적 없네?”

“그렇죠…….”

“그러면 칠흑을 쓰러뜨리고 난 이후에 엘라시아를 데려가도 상관없잖아? 언제까지 데려오라고 한 적은 없으니까.”

베라와 말장난을 나누기 위해 이런 말을 한 게 아니었다.

나는 사실을 말했을 뿐이다.

엘라시아도 옆에서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내 의견에 찬성하는 모습을 보였다.

나의 강력한 주장에 베라는 반론을 가하지 못했다.

“그렇긴 하지만…….”

“문제될 건 없다고 생각하는데? 칠흑도 쓰러뜨리고, 세계도 구하고, 엘라시아도 다시 하이 엘프의 마을로 데려갈 수 있어. 또한 케프리를 옆에서 돌봐 줄 수도 있지.”

“…….”

나는 다시 한번 케프리의 이름을 언급했다.

내가 베라에게 하고자 하는 말은 다 했다.

이제 선택은…….

“네가 결정하면 돼.”

베라의 몫으로 남겨 두기로 했다.

이렇게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베라가 어떻게든 엘라시아를 데려가려고 한다면…….

나는 하이 엘프 마을로 직접 찾아갈 생각도 하고 있다.

찾아가서 장로에게 가서 말할 거다.

세계가 칠흑에게 잠식당할 위기에 쳐했으니, 당신의 딸하고 베라 좀 빌려 달라고 말이다.

물론 말이 그러다는 거지, 실제로 앞에서 이렇게 건방지게 말하진 않을 테지만 말이다.

베라는 오랜 시간을 고민했다.

그녀가 고민하고 있을 때, 엘라시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베라, 너를 지금까지 속인 건 미안하다고 생각해. 하지만 이건 중대한 사항이야. 우리 동족들이 위험에 처할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우리가 도와주지 않으면, 누가 여기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다는 거야?”

엘라시아는 베라를 부드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네가 인간계를 싫어한다는 건 나도 잘 알아. 하지만 세상에는 네가 싫어할 만한 인간들만 있는 게 아니야. 착한 사람들도 분명 존재해. 너도 봐서 알잖아?”

대표적으로 케프리가 있을 것이다.

베라가 지켜주고 싶은 여동생 같은 존재, 케프리.

그녀를 혼자서 남겨 둘 순 없을 것이다.

케프리는 이제야 가족 같은 존재를 찾았다.

베라가 그 역할을 해 주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베라가 떠나 버리면…….

소녀는 가족을 두 번이나 잃는 셈이다.

베라가 이걸 가만히 놔두진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베라는 마침내 우리에게 답을 들려줬다.

“……칠흑을 없애고 난 이후에는 아가씨를 반드시 하이 엘프의 마을로 데려가겠습니다. 그때는 어떠한 말도 듣지 않을 거예요.”

“알았어.”

“약속이에요.”

“약속할게.”

나는 베라와 약속했다.

오히려 이 약속이 지켜졌으면 하고 바랄 정도였다.

이 약속을 수행할 수 있다는 건…….

다시 말해서 우리가 칠흑을 쓰러뜨리고 델리피나 대륙의 평화를 되찾아왔다는 것을 뜻할 테니 말이다.

* * *

베라가 돌아간 뒤 엘라시아는 나를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로인 님의 방식은 항상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것들뿐이에요.”

“이게 내 스타일이거든.”

편집자로 일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마감이 바로 내일인데, 하루 전날 자정 때까지 원고가 수급되지 않아서 회사에서 밤을 지새우고 마감을 치는 경우가 허다했다.

가만?

이건 내가 자처한 게 아니라 작가가 원고를 안 줘서 생겨난 일이잖아?

어쩐지, 말해 놓고 보니 뭔가 이상하다 싶었다.

“그래도 결과만 좋으면 되잖아?”

“결과가 좋게 나왔으니까 다행이었죠. 아무튼……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너야말로. 가서 라스 씨에게 전해 줘. 모든 문제는 해결되었다고. 그리고 슬슬 우리도 움직여야 할 거 같다고 말이야.”

“네.”

오랜 골칫덩이였던 베라, 엘라시아의 문제가 끝났다.

이제 본격적으로 칠흑과의 전면전을 준비해야 한다.

* * *

그전에 나는 라그너를 찾아갔다.

라그너는 마침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로인 님이 저를 찾아오시기만을 목 빠지게 기다렸습니다.”

“그래? 말하는 걸 보니까 날짜가 정해진 모양인가 보구나.”

“예. 이틀 후, 이곳 나울에서 델리피나 대륙의 정상들이 모일 겁니다. 그전에 모든 준비를 마쳐 둬야 합니다.”

델리피나 정상회담이 나울에서 열릴 예정이다.

주최는 라크스 공작이, 회담 진행은 나와 로그 상단이 맡기로 했다.

그로 인해 요즘 나는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물론 라그너는 나보다 더한 업무에 치이는 생활을 이어 오고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만 한다.

세계 정상들이 모인 곳에서 나는 라크스 공작과 함께 그간 있었던 칠흑의 만행을 모조리 고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협력 체계를 갖춰 칠흑과 전면전을 벌일 것이다.

우리는 힘을 합쳐야 한다!

살아남기 위해서!

* * *

여태껏 벨라시오닉의 보물을 되찾으러 다니느라, 그리고 칠흑과 데르킨 백작을 상대하느라 얼굴을 자주 못 봤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을 오늘, 나울에서 한꺼번에 보게 되었다.

한때 로그 상단 이전에 대상인이라 불렸던 남자, 웨일을 비롯해서 나울의 영주 바우너 그랑트, 마법사 길드의 길드장인 기간트, 그리고…….

“넌 왜 여기에 있는 거야?”

나는 체릴에게 물었다.

체릴은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이 나에게 되물었다.

“어머? 저도 엄연히 군수물자 지원 자격으로 나온 거예요.”

비록 웨일과 로그 상단에 비하면 부족해 보일지 모르지만, 체릴도 돈이 많은 걸로는 어디 가서 결코 꿀리지 않는 부호였다.

그런 체릴이 이끄는 의류 브렌드 로엘은 웨일 상단, 그리고 로그 상단과 함께 군수물자를 아낌없이 지원해 줄 것을 약속했다.

스타폴의 7개 가주들과 함께 마일도 정상회담에 참가했다.

라크스 공작은 회담이 열리는 회장 한가운데에 들어섰다.

그는 칠흑의 위험성에 대해, 그리고 칠흑이 어떤 방식으로 그동안 우리를 위협해 왔는지…….

그 모든 것들을 낱낱이 고했다.

라크스 공작이 말을 할 때마다 정상회담에 참가한 이들은 박수갈채를 보내며 전의를 다졌다.

“…….”

어차피 내가 다 아는 이야기다.

나는 회담 현장을 빠져나오기 전에 라그너에게 조용히 말했다.

“난 나갈 테니까 라크스 공작이 무슨 이야기 했는지 나를 대신해서 잘 기억해 뒀다가 나중에 이야기해 줘.”

“예, 알겠습니다.”

조심스럽게 회장을 나왔다.

정상회담에 참가할 자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일부러 오지 않은 존재가 하나 있었다.

나는 그 존재의 이름을 불렀다.

“레이샤르 님.”

그는 그림자 속에서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와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군.”

“레이샤르 님의 흔적을 눈치챈 자가 저한테 몰래 알려 줬거든요.”

“누구지?”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벨라시오닉의 혼이 튀어나왔다.

-누구긴. 나지.

드래곤은 드래곤의 존재를 서로 알아차릴 수 있다.

레이샤르는 씨익 웃었다.

“타임 그레이브 때에는 워낙 정신이 없어서 자네하고 제대로 이야기도 못 했지.”

-굳이 할 이야기가 있나?

“딱히.”

벨라시오닉과 레이샤르는 그렇게 친한 관계까진 아니었다.

그냥저냥 이름만 아는 사이라고 했었다.

서로에게 우정을 느낄 일도 없었다.

애초에 드래곤은 드래곤들끼리 우정이니 뭐니 하는 그런 감정 따윈 없다고 했다.

필요에 따라서 같이 행동할 뿐.

어쩌면 지금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하지만 난 그런 건 딱히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반드시 우정과 전우애가 있어야 같이 싸울 수 있다는 법칙 같은 건 없지 않은가.

목적이 같거나 이해관계만 일치해도 충분히 같이 싸울 수 있다.

지금의 이들처럼 말이다.

레이샤르는 회장 쪽을 바라봤다.

“회담은 잘 진행되고 있나 보군.”

“예.”

“이번에 참가한 사람들이 꽤 많던데. 그래도 참으로 다행이군. 원래 인간이란 존재는 개개인을 놓고 보면 약하지만, 뭉치면 드래곤조차 감당하기 힘든 무서운 능력을 발휘하지. 그게 바로 인간이란 존재의 의의이자 진정한 강함이라고 생각하거든.”

드래곤들에게는 없는 협동심을 인간이란 종족은 가지고 있다.

칠흑과 싸울 수 있는 유일한 존재.

나는 그것을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해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이 세계를 지켜야 한다.

-……음?

순간 벨라시오닉이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벨라시오닉의 반응에 나와 레이샤르도 동시에 같은 곳을 응시했다.

“이런 ×발…….”

난 무의식적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거대한 날갯짓을 펼치며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존재가 있었다.

데르킨 백작의 열한 번째 조각, 드래곤(Dragon)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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