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엑스트라-226화 (226/240)

# 226

지도자의 자격 (4)

태양의 방에서 진실의 시련을 우리에게 내렸던 인형 소녀.

그런데 왜 심판의 방에 인형 소녀가?

‘설마…….’

안 좋은 예감이 온몸을 훑었다.

불행하게도 내 예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심판의 시련을 진행하겠습니다. 저, 심판자 아루토리가 클라우드 가주와 여러분들에게 스타폴의 지도자 자격이 있는지 직접 심판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루토리라고……?”

반드의 반응이 가장 눈에 띄었다.

“왜, 아는 사이야?”

나는 그냥 농담 삼아 던진 말이었는데 돌아온 반드의 대답은 내 예상을 뛰어넘은 것이었다.

“정의(定義)를 관장하는 3대 신의 이름이다. 라드리치의 라이벌이기도 한 여신이지.”

“뭐? 3대 신? 정의? 여신?”

“모르는가?”

알 리가 있겠냐.

반드의 중2병 설정은 오로지 반드만이 알고 있다.

《델리피나 전기》에 나온 적도 없고, 알려진 바도 없다.

그러나 인형 소녀…… 아니, 아루토리라 불린 자는 기묘한 미소를 지으면서 반드의 말에 반응했다.

“설마 라드리치의 권능을 지닌 자를 여기서 볼 줄은 몰랐어요. 세상 참 좁네요.”

이봐, 이봐, 이봐!

니들끼리 아는 이야기만 계속 하지 말라고!

적어도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대화를 나눠!

그러거나 말거나 인형 소녀는 자신이 할 것만 계속 진행했다.

그녀의 주변에 검은 그림자가 형성되었다.

그러더니 검은 그림자가 인형 소녀를 삼켰다.

잠시 후 검은 그림자 뭉치에서 한 여인의 팔이 튀어나왔다.

그 팔은 그림자를 찢고 세상 밖으로 튀어나왔다.

곧이어 아까 우리가 봤던 인형 소녀와는 전혀 다른 외형으로 바뀌었다.

여전히 구체 관절 인형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건 맞다.

하지만 ‘소녀’에서 ‘여인’으로 진화했다는 게 특징이었다.

한층 커진 키, 한 2.5미터 정도는 되는 거 같다.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그녀의 손에는 각각 검과 방패가 하나씩 들려 있었다.

나는 인물 정보 창을 확인하려 했다.

그러나…….

-이 차원에 존재하지 않는 자입니다. 정보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진짜 별의별 일이 다 벌어지고 있었다.

설마 인물 정보 창 열람 능력으로 확인조차 못 하는 존재와 접하게 될 줄이야.

이야기가 후반으로 치닫기 시작하다 보니 별 희한한 일을 다 겪는다.

아무튼 아루토리인지 아우도리인지 저 여자…… 가 아니라, 심판관을 쓰러뜨리면 된다고 한다.

그전에 정보를 얻고자 했다.

“마일! 혹시 아는 거 없어?”

“네, 없습니다.”

아주 깔끔하고 간결한, 그리고 내 기대를 무참히 저버리는 대답이 돌아왔다.

“심판의 방은 저도 처음입니다. 애초에 심판의 방에 도전했던 자조차 없었고요. 그래서 여태껏 일곱 가문이 스타폴을 공동으로 통치해 오고 있던 거죠.”

하긴 곰곰이 생각해 보면 마일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애초에 심판의 방을 통과한 지도자가 있다면, 7개의 가문이 스타폴을 공동으로 다스릴 이유가 전혀 없다.

그 지도자가 직접 스타폴을 통치하면 되니까.

여태껏 없었으니까 7개 가문이 힘을 합쳐 스타폴을 운영해 오고 있었다.

마일도 모른다고 했다면…….

답은 반드뿐이다.

“반드! 저 심판관이랑 잘 아는 사이 같은데! 약점 같은 거 몰라? 공략법이라든지!”

“심판관은 완전 무결의 존재다. 약점이라는 게 있을 수 없지. 솔직히 말해서…… 우리 힘으로 아루토리를 쓰러뜨리는 건 불가능해.”

주인공 보정을 등에 업은 라스가 있어도 힘든가?

아니, 해 보기도 전에 포기하는 건 내 성격에 맞지 않는다.

물론 이건 라스도 같은 생각이었다.

“일단 한번 해보죠.”

라스의 오른손에 붉은 불이 형성되었다.

불꽃을 본 아루토리는 희미하게 웃었다.

“분노를 극복하고 진실의 불을 손에 얻은 자여. 그 불꽃이 과연 저에게도 통할 수 있을지 보도록 할까요?”

“통하게끔 내가 만들 거야!”

주인공다운 포부였다.

전방을 향해 오른손을 크게 내지른 라스.

그의 손동작에 따라 거대한 불구덩이가 아루토리를 향해 쏘아졌다.

아루토리는 방패를 들어 올려 라스의 불덩이를 간단하게 막아 냈다.

하나 라스의 공세는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라스는 불화살을 다수 만들어 동시에 아루토리를 향해 발사했다.

불과 바람의 능력이 혼합되어 아루토리를 노렸다.

아루토리의 전신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잠시 후 그녀의 모습이 사라졌다.

‘어디 갔지?’

아루토리의 흔적을 찾기도 전이었다.

반드가 느닷없이 외쳤다.

“라드리치! 5레벨 개방!”

시작부터 5레벨이라니,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닌가?

……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우리 힘으로 아루토리를 쓰러뜨리는 건 불가능하다’라고 한 반드의 말이 떠올랐다.

처음부터 전력을 다할 생각인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그렇게 해주지!”

스× 크래프트라는 모 유명한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이 있다.

대한민국에선 ‘전통 놀이’라고 불릴 정도로 엄청난 사랑을 받은 게임이다.

그 게임에 ‘초반 러시’라는 전략이 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그 전략이 떠올랐다.

우리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초반부터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기량을 쏟아 내기로 했다.

마일의 와이어가 방을 촘촘히 채우며 얽어 들어갔다.

와이어의 미세한 떨림을 통해 마일은 사라졌던 아루토리의 위치를 알아냈다.

“엘라시아 님을 기준으로 오른쪽에 있습니다! 조심하세요!”

“고마워요!”

엘라시아는 마일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남기면서 정령들을 소환했다.

정령들은 엘라시아의 신호에 따라 일제히 어느 한 지점을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나의 용의 숨결, 라스의 불, 그리고 반드의 칼날 바람 공격이 아루토리가 있을 곳으로 향했다.

이 정도면 데르킨 백작조차도 못 버틸 정도로 어마어마한 공격이다.

그러나 아루토리는 이 공격을 오롯이 방패 하나로 모두 쳐 냈다.

‘뭐 저런 녀석이 다 있어……!’

나도 모르게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저 아루토리라는 심판관, 어쩌면…….

‘칠흑보다도 강한 존재일지도 모르겠어!’

일 났네.

* * *

아루토리는 우리들을 바라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제법이네요. 제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뛰어난 능력들을 가지고 있어서 놀랐어요. 하이 엘프와 라드리치의 권능을 지닌 저 남자는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지만, 클라우드의 차기 가주와 라스, 그리고 로인…… 여러분들의 힘은 제 예상을 뛰어넘었군요.”

칭찬이 칭찬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래, 우리 힘세다.

하지만 그런 우리들의 공격을 혼자서 다 받아쳐 낸 너는 도대체 뭐 하는 존재인데.

아루토리의 검에서 강렬한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성스러움이 느껴지는 그런 빛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위험성도 느껴졌다.

반드가 다급히 외쳤다.

“온다! 조심해!”

뭐가 올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위험한 거라는 사실은 뼈저리게 깨달을 수 있었다.

빛이 크게 번쩍이더니 일시적으로 우리들의 시야를 빼앗았다.

심연 다음에는 빛이냐!

지 혼자 북치고 장구 치고 다 하네, 다 해!

실명 상태가 된 동안, 아루토리가 우리에게 말했다.

“빛과 어둠. 두 존재에게 모두 현혹되지 마세요. 당신들은 당신들의 길을 우직하게 가면 됩니다. 그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의, 그리고 그것이 중립 세계에 살아가는 자들의 자세.”

내 목 근처에 날카로운 무언가가 느껴졌다.

아루토리가 든 검의 칼날임을 직감했다.

“만약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처벌’이라는 이름의 심판을 당신께 내리겠습니다.”

“……웃기지 마라. 심판이라는 건 ‘죄를 지은 자’가 받는 거잖아. 네가 뭔데 벌써부터 나를…… 우리 인간을 죄인 취급하는 거냐?”

화르르르륵!

내 몸 주변에 글레드의 화기가 피어올랐다.

화기는 아루토리의 검을 튕겨 냈다.

“빛에게 현혹되든, 어둠에게 현혹되든, 아니면 중립의 길을 걷든, 선택은 내 몫이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네가 나서서 최종 보스 퇴치해 줄 거 아니면 그냥 입 다물고 지켜보고 있기나 해!”

고생은 우리가 하는데, 위에서 왈가왈부하는 꼴을 보고 있으면 짜증이 치솟는다.

잔소리 대마왕인 우리 회사 대표님이나, 그리고 눈앞에서 위선 가득한 말만 지껄이는 아루토리나.

둘 다 같은 자들이다.

“…….”

아루토리는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그러더니…….

갑자기 웃었다.

“재미있는 사람이네요. 글레드가 선택한 존재라고 해서 어떤 사람인지 굉장히 궁금했는데……. 제 예상을 한층 뛰어넘는 인간일 줄은 몰랐어요.”

“칭찬이냐, 욕이냐.”

“받아들이는 입장에 따라 칭찬이 될 수도, 욕이 될 수도 있겠죠.”

무슨 원효대사님의 해골 물 일화도 아니고.

대답 참 오묘하게 하네.

인형 소녀일 때부터 이런 애매한 대답을 줄곧 해 왔다.

아루토리는 방패와 검을 거둬들였다.

“심판의 여부에 따라서 클라우드의 가주에게 지도자의 자격을 내릴까 말까 고민했는데, 설마 ‘심판 자체를 거부한다.’라는 선택지를 고른 사람이 여기까지 올 거라고는 예상 못했어요. 하지만 이것도 나쁘진 않네요. 재미있었으니까 상을 드릴게요.”

아루토리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우리들 앞에 문양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스타폴의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자격을 증명하는 문신입니다. 저를 재미있게 해 드린 보답으로 이걸 드리지요.”

“…….”

나는 마일을 바라봤다.

고개를 끄덕인 마일은 손을 내밀었다.

클라우드의 가주를 증명하는 문신이 새겨진 손과 동일한 손이었다.

가주의 증명을 나타내는 문신 위로 지도자의 자격을 증명하는 문신이 합쳐졌다.

아루토리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것으로 스타폴을 이끌 지도자가 탄생했습니다. 축하드려요.”

“감사합니다, 심판관이시여.”

“그럼 전 제 역할을 모두 마쳤으니, 이만 사라지도록 할게요.”

아루토리의 몸이 점점 가루가 되어 사라지기 시작했다.

인형의 모습이 반쯤 사라졌을 때, 아루토리는 나를 향해 이런 말을 남겼다.

“원하는 길을 찾길 바랄게요, 강시언 씨.”

상당히 오랜만에 들어 보는 나의 본명이었다.

* * *

세 개의 시련을 모두 끝마친 우리는, 해가 저물었을 때가 되어서야 겨우 시험장에 나올 수 있었다.

도중에 라스는 마지막에 아루토리가 했던 말이 기억에 남는 모양인지 나에게 다가와 물었다.

“그런데 아까 로인 씨가 ‘강시언’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그게 본명입니까?”

“네. 비슷한 거죠.”

“그렇군요. 특이한 이름이네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선 오히려 평범한 이름이지만, 이곳 델리피나에선 개성 넘치는 이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보다 나는 마일이 내 본명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는다는 게 더 신기했다.

“마일, 넌 내 본명을 듣고도 가만히 있던데.”

“굳이 질문하지 않아도 로인 님을 향한 저의 관심은 여전히 뜨겁습니다.”

“아니, 뜨거울 필요는 없고. 왜 아무것도 안 묻는 거야?”

호기심 덕후가 별일이다.

모르는 게 있으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물어보던 녀석이 가만히 있으니까 도리어 이상하게 느껴졌다.

마일은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사람마다 숨기고 싶은 비밀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제가 아무리 호기심에 미친 남자라 해도 상대방의 동의 없이 프라이버시를 침범하고 싶진 않습니다.”

음…….

솔직히 별로 믿음은 안 간다.

그래도 본인이 그렇다고 하니까 믿어 주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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