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5
지도자의 자격 (3)
두 번째 방은 첫 번째 방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반드는 방을 둘러보면서 물었다.
“그래서 이젠 뭘 해야 하는 거지? 또 태양빛이니 뭐니 하는 말을 지껄이면서 인형의 말상대나 해야 하나?”
마일은 우리에게 이런 말을 들려줬다.
아니, 그것은 곧 경고였다.
“이번에는 첫 번째 방에 비해서 많이 힘들 겁니다.”
갑자기 출입구가 닫히기 시작했다.
여기까지는 충분히 예상했던 패턴이다.
하지만 밀려오는 어둠은 예상 못 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이 방은 어둠으로 물들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둠을 넘어서 진정한 어둠을 접한 그런 기분이었다.
단지 불만 꺼졌다고 이런 식의 환경을 만들 수는 없다.
인위적인 현상이었다.
‘두 번째 시련의 시작이군.’
나는 바로 직감할 수 있었다.
“정신 똑바로 차립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성을 잃지 말고요!”
일행들에게 소리쳤다.
그러나…….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뭐야?’
어둠 뒤에 불길함이 나를 엄습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주변이 너무 깜깜해서 아무것도 파악할 수 없었다.
소리조차도 이 어둠에…… 이 심연에 전부 잡아먹힌 것 같았다.
‘하다못해 어떻게 해야 클리어할 수 있는지 정도는 알려줘야 할 거 아니야!’
여기는 태양의 방에서 봤던 그 인형 소녀 같은 설명충 역할을 소화할 존재가 없는 것 같았다.
……라고 생각하려던 찰나였다.
-심연의 방에 온 걸 환영한다. 차원을 넘어온 자여.
“누구냐, 넌.”
낯선 목소리가 내 머릿속에 울리기 시작했다.
누구인지 물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질문은 아주 깔끔하게 무시당했다.
-클리어 조건을 설명해 주마. 방식은 간단하다. 이 심연 속에서 이성을 상실하지 않고 버티기만 하면 된다.
“언제까지 버텨야 하는 거지? 1시간? 2시간? 설마 여기서 몇 달은 있어라 하는 소리는 아니겠지?”
-한 시간이 될 수도, 하루가 될 수도, 한 달이 될 수도, 일 년이 될 수도 있다. 그건 너 하기 나름이다.
“……인형 소녀랑 똑같은 말을 하는군.”
그 소녀도 질문을 하나도 안 할 수도, 수백, 수천 개를 할 수도 있다고 말하던데.
태양의 방이든 심연의 방이든 이 방을 책임지는 녀석들은 ‘정도’라는 걸 모르는 듯했다.
“그럼 여기서 가만히 있으면 된다는 거지?”
-그래.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거다.
수상함이 뚝뚝 묻어나오는 말이었다.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거다.
무슨 뜻이지?
일단 녀석이 한 말대로 가만히 있기로 했다.
서 있으면 다리 아프니까 바닥에 앉아서 편한 자세를 취하기로 했다.
가만히 있으라고는 했지만, 자세 바꾸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그렇게 앉은 채 시간을 보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가 없었다.
‘1시간? 그 정도 흐른 거 같은데.’
솔직히 말해서 자신은 없다.
난 1시간 흘렀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바깥 시간을 확인해 보면 10분밖에 안 지났다거나, 반대로 10분만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도 바깥은 열흘이 지났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난 좀 버티기 쉬운 편이었다.
이렇게 시간과 공간을 인지하기 힘든 환경을 공교롭게도 난 이미 경험한바 있었다.
‘카오스 필드 2단계. 그곳에서 지겹도록 경험했지.’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헛구역질이 올라올 거 같은 안 좋은 기분을 느꼈다.
아무튼 카오스 필드 2단계에 비하면 이 정도는 쉬운 편이었다.
앉아 있기만 하면 되니까.
“…….”
도중에 뭔가가 내 쪽으로 다가옴을 느꼈다.
뭐지?
거대한 생명체가 나를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틀림없다.
마치 검은 괴물이 내 앞으로 달려오고 있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
위험하다!
내 세포 하나하나가 나에게 위험을 직시하게 만들었다.
움직일까?
드래곤 클로를 발동시키려고 하던 찰나였다.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거다.’
심연이라는 녀석이 나에게 했던 조언이 떠올랐다.
가만히 있어라.
아무것도 하지 말고.
“…….”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어둠 속에서 달려오는 거대 생명체는 바로 내 앞까지 도달했다.
피하지 않으면…….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감았다.
그러자…….
나를 향해 매섭게 달려오던 거대 생명체의 기척이 사라졌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그런 거였군.’
심연의 시련이 무엇인지 그 정체를 대략적으로나마 깨닫게 되었다.
이곳, 심연의 방에서는 내 마음속의 사념이 실체화되어 나를 괴롭힌다.
거기에 휘둘리는가, 아니면 휘둘리지 않고서 머릿속에 가득한 사념의 시련을 극복할 수 있는가.
이걸 가리기 위한 시련이었다.
사념에 휘둘리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게 궁금했다.
하나 궁금하다고 한들 실험해 볼 생각은 없었다.
목숨이 걸려 있는 일일지도 모르는데 그런 걸 왜 하겠나.
내가 아무리 실험 정신이 투철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
나는 심연의 의도를 파악하긴 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겠네.’
갑자기 걱정이 앞섰다.
앉아 있다 보니 별의별 것이 어둠 속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야, 강시언! 쉴 땐 쉬더라도 원고는 수급하고 쉬라고 했지!
오랜만에 부장님 목소리도 듣는구먼.
뿐만 아니라 최근에 나의 주 적이 된 칠흑과 데르킨 백작의 모습도 보였다.
입을 쩍 벌리면서 나를 잡아먹을 기세로 달려드는 칠흑. 그러나 나는 녀석을 깔끔하게 무시해 버렸다.
무시하면 된다.
그러면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돌아온다.
단, 데르킨 백작은 조금 끈질겼다.
-좋은 자세로군, 로인.
데르킨 백작은 바로 내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심연에 어느 정도 적응하다 보니 실루엣은 대충 구분할 수 있었다.
데르킨 백작은 마치 웃고 있는 듯한 표정으로 계속해서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델리피나 대륙은 자네의 세계도 아닐 텐데. 왜 그리 목숨을 걸고 구하려고 하는 거지?
데르킨 백작은 내가 다른 차원에서 온 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니, 사실은 거짓이다.
내가 다른 차원에서 넘어온 존재라는 걸 아는 건 여기 있는 심연이다.
심연이 나의 사념을 꺼내서 데르킨 백작에게 씌워 나를 시험하려고 드는 것이다.
내가 해 줄 대답은 이것뿐이었다.
“이 세계와 정이 들어 버렸으니까.”
-그깟 정 때문에 이 세계를 구하려 할 생각인가?
“델리피나의 세계가 망해 버리면, 나는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없게 되잖아. 내가 살기 위해서라도 싸워야지.”
-그럼 이런 제안은 어떤가?
또 무슨 개수작을 부리려고.
-내가 자네를 원래 있던 차원으로 돌려보내 주지. 칠흑과 싸우지 않아도 되고, 나와 목숨을 걸고 싸우지 않아도 되네. 자네는 안전하게 본래의 차원으로 돌아가는 거야. 어떤가, 내가 그렇게 해 주겠다면 그대로 따르겠나?
매력적인 제안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내가 칠흑, 그리고 데르킨 백작과 싸우다가 죽을 일도 없을 테고.
원래 내 목적은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거였으니까.
하지만 그건 초창기 때의 생각에 불과했다.
지금은 달랐다.
“거절한다.”
-이해가 안 가는군.
“아마 평생을 걸려도 너는 내가 왜 이런 대답을 하는지 이해 못할 거다.”
나는 오히려 데르킨 백작을 놀리듯 말했다.
이미 델리피나 대륙은 나의 제2의 고향이 되어 버렸다.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
그들을 만나면서 배웠던 것들.
지식, 그리고 감정 등.
이 모든 것을 모른 척하고 나 혼자 살겠다고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순 없다.
설령 진짜 데르킨 백작이 나타나서 나에게 이런 말을 한다 해도 나는 같은 대답을 들려줄 자신이 있다.
데르킨 백작은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의 모습이 점점 옅어졌다.
동시에…….
밝은 빛이 내 시야를 감싸기 시작했다.
이 순간.
나는 직감했다.
‘심연의 시련도 끝났군.’
* * *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방 한가운데에 혼자 앉아 있었다.
다른 일행들은 나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분위기가 미묘한데……? 설마, 나 혼자서 심연의 시련을 받은 거야?”
대답은 마일이 대표로 해줬다.
“아니요. 모두가 다 같은 시련을 받았습니다. 저도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로인 님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유독 시간이 길었던 거 같군요.”
“왜 하필 나만?”
“글쎄요. 사념이 많이 섞여 있어서 그런 거 아닐까요?”
저 말을 들으니까 깊이 공감이 간다.
하긴 나만큼 생각에 많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세계의 미래를 알고 있으니까.
이렇다 보니 여러 방면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가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난 원래 이 세계의 주민도 아니었으니까.
심연의 시련을 받는 동안 나는 마일에게 궁금했던 것을 하나 물었다.
“그러고 보니 심연이 충고한 걸 무시하면 어떻게 돼?”
“사념이라는 존재 자체를 실체로 인식해 버리는 순간, 그 사람은 미쳐 버리게 됩니다.”
“미친다고?”
“네, 현실과 가상을 구분하지 못하고 미쳐 버리게 되는 거죠. 태양의 방을 통과했어도 심연의 방을 통과하지 못한 가주 후보자들 중 몇몇이 그렇게 미쳐 버린 채로 돌아왔습니다. 물론 그자들은 가문 사람들에게 팽당했지만요.”
“섬뜩한 결과네.”
그럼에도 우리 모두 다 무사히 사념에게 잡아먹히지 않고 살아남았다.
엘라시아는 뭐, 존재 자체가 진실된 존재라고 극찬을 받았으니까 사념 따위에게 사로잡힐 일은 없을 테고.
마일은 어렸을 때부터 훈련을 받아 왔다고 했으니 어렵지 않게 통과했을 것이다.
라스는? 주인공 보정을 무시하면 안 된다.
이깟 시련으로 소설 속 주인공을 흐트러뜨릴 순 없었을 것이다.
가장 궁금한 건 역시 반드였다.
“넌 어떻게 통과했어?”
반드는 내 물음에 오히려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 내가 통과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지? 난 어둠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고 라드리치의 힘을 받아들인 자. 심연의 속삭임은 오히려 내게 있어서 축복이나 마찬가지지. 크크큭……. 안 그런가?”
이쯤 되니까 중2병 콘셉트가 《델리피나 전기》 내에서 가장 사기성이 짙은 캐릭터 속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만능이네, 중2병.
하여튼 결과만 좋으면 만사 오케이다.
나는 먼지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다 끝난 거지?”
“예.”
마일은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의 왼쪽 손등을 보여 줬다.
가주들이 하고 있던 문신과 거의 비슷했다.
“클라우드 가주의 징표입니다. 이것으로 저는 클라우드 가문의 정식 승계자가 되었습니다.”
“축하해.”
“아직 축하를 받기에는 너무 이릅니다. 마지막 방이 남았으니까요.”
스타폴의 협력을 구하기 위해선 클라우드의 가주가 아니라 스타폴의 지도자만이 가질 수 있는 자격을 거머쥐어야 한다.
우리는 세 번째 방으로 향했다.
마지막 시련은 알려진 게 없다고 한다.
마일조차도 들은 적이 없다는 말을 들려줬다.
세 번째 방문이 열렸다.
동시에 익숙한 존재가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면서 우리를 맞이했다.
첫 번째 방에서 만났던 바로 그 인형 소녀였다.
“어서오세요, 여러분. 심판의 방에 오신 것을 환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