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엑스트라-224화 (224/240)

# 224

지도자의 자격 (2)

유적지같이 생긴 건물 안으로 천천히 들어섰다.

첫 번째 방으로 추정되는 입구를 두고 마주선 우리들.

라스는 굉장히 흥미롭다는 시선으로 유적지를 바라봤다.

“오래된 건물인데도 보존이 잘되어 있군. 엔드라가 봤더라면 굉장히 좋아했을지도 모르겠네.”

“그러게 말이에요.”

엘라시아가 라스의 말에 공감을 표했다.

엔드라는 언령술사이면서 동시에 고고학자로도 정평이 나 있는 캐릭터다.

스타폴에 이런 숨겨진 유적지가 있다는 걸 알았다면 어린아이처럼 잔뜩 신이 난 채 이곳을 조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그럴 틈이 없다.

“문을 열겠습니다.”

마일이 문에 손을 포갰다.

그러자 유적지의 문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난생 처음 보는 광경에 우리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문이 움직일 때마다 쌓인 흙먼지가 자욱한 먼지구름을 만들어 냈다.

문 안쪽을 들여다봤다.

눈에 확 띌 만한 건 보이지 않았다.

어디 보자. 첫 번째 방이 뭐라고 했더라?

내가 답을 떠올리기 전에 마일이 먼저 설명에 들어갔다.

“여기는 태양의 방입니다. 클리어 조건은…….”

말을 해 주려고 하기 전에 갑자기 이상 현상이 발생했다.

어두컴컴했던 방 안이 환해졌다.

보이는 거라고는 온통 흰색뿐이었다.

여기도 흰색, 저기도 흰색.

동시에 우리가 들어왔던 문이 닫혔다.

문까지 닫힌 데다가 전부 다 흰색으로 도배되어 있어서 그런지 엄청난 이질감을 선사했다.

방의 한가운데에 한 소녀가 앉아 있었다.

그러나.

“사람처럼 보이진 않는군요.”

라스의 말대로였다.

인공 생명체였다.

굳이 표현하자면 실제 크기로 만든 구체 관절 인형이랑 비슷한 외형을 지니고 있었다.

소녀의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움직일 때마다 관절 부분에서 ‘끼익끼익’하는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렸다.

소녀의 눈이 크게 끔뻑였다.

“어서 오세요. 태양의 방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제 이 방에서 무엇을 하면 되나.

나는 그게 궁금했다.

소녀는 마치 내 머릿속을 빤히 들여다보기라도 하고 있다는 듯이 알아서 척척 답을 들려줬다.

“이 방을 클리어할 수 있는 조건은 매우 간단합니다. 제가 묻는 질문에 ‘진실되게’ 답해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단 한 명이라도 거짓을 말할 경우…….”

말끝을 흐리는 소녀.

그러자 방의 온도가 한순간에 확 올라갔다.

불 속에 있는 그런 기분이었다.

소녀는 기묘한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

“……여러분들은 거짓을 말한 대가로 태양의 빛에 타 죽을 겁니다.”

이런 거였군.

이래서 클라우드의 가주가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냐고 물었던 것이다.

도전 실패는 곧 죽음을 의미한다.

도중에 반드가 이런 말을 흘렸다.

“우리가 말하는 게 진실인지 거짓인지 저 소녀가 어떻게 알 수 있지?”

나도 그게 궁금했다.

순간 소녀는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다시 한번 기분 나쁜 미소를 선보였다.

“저는 알 수 있답니다.”

순간 소녀의 한쪽 눈동자가 초록빛을 띄웠다.

……그랬군.

소녀가 진실과 거짓을 구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드러낸 근거가 뭔지 알 것 같다.

나는 일행들에게 내가 알게 된 정보를 공유해 줬다.

“저 인형 소녀의 눈에 ‘진실의 눈’이 박혀 있어.”

휴즈가 가지고 있는 그 진실의 눈과 동일했다.

저걸 가지고 있으면 눈앞에 있는 사람이 진실을 말하는지, 거짓을 말하는지 알 수 있게 된다.

설마 여기서 진실의 눈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아무튼 통과 조건은 매우 간단했다.

진실만 말하면 되니까.

그리고 난 이전에 휴즈 앞에서 진실만을 고하는 언행을 계속한 적이 있다.

그때처럼 솔직하게 말만 하면 된다.

하지만 이게 말이 쉽지, 사실 생각보다 많이 어려운 일이다.

‘괜히 승계 시험이 아니군.’

솔직히 좀 얕보고 있었다.

나나 라스가 있으니까 아무리 어려운 시험이라 하더라도 쉽게 통과할 수 있다는 자신이 들었다.

하나 생각이 달라졌다.

소녀는 우리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누가 먼저 도전할 건가요?”

“그전에 질문 하나만 해도 될까?”

묻고 싶은 게 생겼다.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해도 좋다는 신호로 보면 되겠지.

“1인당 몇 번의 질문을 할 거지?”

“제 마음이 내키는 대로요.”

“그럼 또다시 질문. 네 마음 내키는 대로라는 건, 다시 말해서 ‘질문을 안 할 수도 있다.’는 뜻인가?”

소녀의 시선은 갑자기 나에게 고정되었다.

인형 소녀는 또다시 웃었다.

“로인 님, 당신은 머리가 굉장히 뛰어나신 분이군요.”

이름을 알려 준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인형 소녀는 단번에 내 이름을 언급했다.

인형 소녀는 내 말을 부정하지 않은 듯했다.

“네, 맞아요. 할 수도, 안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질문을 무제한으로 할 수도 있다.’라는 점도 꼭 알아 두셨으면 좋겠네요.”

그렇게 되면 큰일이다.

도전을 포기하든가, 아니면 태양의 빛에 쏘여 타 죽기 전에 시험의 방 자체를 파괴해 버리든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하지만 시험장을 파괴해 버리면 스타폴의 협력을 구할 수 없게 된다.

이걸 명심해야 한다.

순번은 누구부터일까.

소녀는 딱히 순번까진 정해 주지 않았다.

알아서 먼저 오라는 말만 전했다.

그때, 라스가 앞으로 나섰다.

“제가 먼저 하겠습니다.”

소녀는 흥미롭다는 시선으로 라스를 응시했다.

인형 소녀 앞에 마주선 라스.

뒤이어 인형 소녀가 라스에게 질문했다.

“어렸을 적에 아버지를 잃은 기억을 가지고 있으시네요. 칠흑이라는 존재를 아직도 미워하나요?”

라스는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칠흑을 없애면, 그 다음은 무엇을 할 건가요?”

“생각 안 해 봤어.”

“평범한 삶을 살고 싶은가요?”

라스는 잠시 고민했다.

그런 뒤에 답을 들려줬다.

“아니.”

“이유는요?”

“이미 여기까지 온 마당에 앞으로 평범한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으니까.”

정답이다.

라스는 델리피나 대륙 전체의 주목을 받고 있는 남자다.

작중의 주인공이니까. 이런 현상은 당연하다.

그런 라스가 과연 평범한 삶을 살고 싶다고 해도 주변에서 가만히 놔둘까?

천만에.

이미 라스는 남들과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

한 번 특별함에 물든 존재는 평범함을 추구해도 그 무리에 속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

라스는 나름의 각오를 굳히고 있었다.

그저…….

“앞으로의 삶이 어떻게 되든 말든 난 관심 없어. 칠흑만 쓰러뜨릴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라스는 케프리와 같은 부류다.

하지만 명확한 차이점이 있었다.

케프리가 앞뒤 구분 못하고 무조건 칠흑을 없애려고 달려드는 성향이라면, 라스는 본능보단 이성적인 판단을 앞세워 칠흑을 쓰러뜨리려고 한다.

눈앞에 칠흑이 있다면 케프리는 자신이 죽든 말든 칠흑과 싸우려 할 것이다.

하지만 라스는 자신이, 혹은 동료가 위기에 처할지도 모른다면 깔끔하게 칠흑과의 싸움을 포기하고 다음을 기약할 것이다.

이런 차이다.

인형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품은 불은 굉장히 뜨거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온화하군요. 좋아요. 이것으로 질문을 마칠게요.”

이다음은 반드의 차례였다.

“이름이 뭐죠?”

“반드.”

“라드리치의 능력을 지니고 있네요. 어디서 그 능력을 얻었나요?”

“어둠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였더니 얻게 되었다.”

“어머, 그렇군요.”

뭐야. 저 인형 소녀도 라드리치가 뭔지 알고 있나?

반드의 능력이 중2병 설정이 아니라 진짜로 있는 능력이라는 사실은 스카이 랜드에서 내 눈으로 확인했다.

그럼에도 난 아직 반신반의한 상태였다.

하지만 진실의 눈을 가진 인형 소녀조차 저렇게 말할 정도면…… 이제는 더 이상 부정할 수가 없었다.

추가로 몇 가지 질문을 더한 후에 반드는 무사히 통과되었다.

다음, 엘라시아의 차례다.

“어머나.”

인형 소녀는 엘라시아를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냥 지나가세요. 질문할 게 없네요.”

“왜죠?”

“하이 엘프는 존재 자체가 진실된 존재니까요.”

역시 사기 종족답다.

이제 나와 마일만 남았다.

승계 시험은 마일이 주인공이다.

주인공에게 마지막을 양보해야 하는 건 엑스트라로서 당연한 마음가짐이다.

“다음은 나다.”

인형 소녀 앞에 마주선 나.

솔직히 내가 가장 찔리는 게 많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에게 밝히지 못한 진실들이 차고 넘쳤으니까.

편집자 강시언 시절 때부터 시작해서 소설 속으로 들어오게 된 경위, 카인의 정체, 용신단, 그리고 벨라시오닉의 혼 등등등.

인형 소녀가 이중에서 하나라도 꼬투리를 잡고 묻는다면, 나는 꼼짝없이 모든 진실을 알려 줘야 한다.

그러나 인형 소녀는 나를 보더니 질문 하나 던지지 않은 채 웃기만 했다.

이러니까 더 기분이 나빴다.

“뭐냐. 질문 안 해?”

“없어요. 그대로 지나치시면 됩니다.”

“없다고?”

“네.”

“난 하이 엘프도 아닌데?”

평범한 인간이다.

아니, 평범하진 않다.

용신단의 능력으로 인해 용의 스펙을 가지게 된 인간이다.

인형 소녀는 나를 보면서 의미심장한 말을 들려줬다.

“당신은 하이 엘프와 다르게 거짓투성이로 이루어진 존재에요. 하지만 악의에 찬 거짓들은 아니죠. 주변인들을 지키기 위한 거짓말 정도는 못 본 척해 줄 수 있답니다. 이래 봬도 전 그렇게 나쁜 인형은 아니니까요.”

오히려 내 존재 자체가 거짓된 존재이기에 통과시켜 주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기뻐해야 되나, 아니면 기분 나빠해야 하나.

제대로 판단이 안 설 정도였다.

뭐, 그래도 무사히 통과했으니까 괜찮겠지.

인형 소녀는 마지막으로 마일을 불렀다.

“클라우드 가문의 장남이시군요. 본명은 클라우드 이튼. 맞죠?”

“네.”

“당신에게는 질문을 하나만 드리도록 할게요.”

딱 하나라니. 횡재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하나의 질문이 보여 준 위력은 어마어마했다.

“스타폴의 지도자, 그리고 베르투의 대현자. 둘 중 어느 인생을 택할 건가요?”

“…….”

마일은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다.

인형 소녀는 다시 물었다.

“질문의 표현을 바꿔 볼게요. 클라우드 이튼으로 살아가고 싶은가요? 아니면 마일로 살아가고 싶은가요?”

마일이 들려준 대답은 예상 외였다.

“모르겠습니다.”

이지선다형 질문이 주어지면 보통은 둘 중 하나를 택하는 법이다.

하지만 마일은 그 어느 것도 택하지 않았다.

인형 소녀는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제 질문의 의도를 잘 파악하고 계시네요.”

마일은 정답을 말했다.

어째서?

해답은 간단했다.

둘 중 하나를 고르라는 뜻이 아니다.

‘진실된 대답을 달라.’라는 뜻이었다.

마일은 고민하고 있었다.

아직 그는 클라우드 이튼으로 살아갈지, 마일로 살아갈지 정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솔직하게’ 대답했다.

모른다고.

이것이 인형 소녀가 원하는 대답이었다.

“축하드려요. 다섯 분 모두 다 태양의 시련을 통과하셨어요.”

인형 소녀는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나 우리에게 살짝 무릎을 굽히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부디 심연의 시련도 지금처럼 무사히 통과할 수 있기를 기원할게요.”

두 번째 방은 어떤 시련이 기다리고 있을까.

‘가 보면 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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