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0
혼돈을 추구하는 자 (4)
힘과 힘의 정면충돌!
원래 《델리피나 전기》에 따르면 중간에 라스에게 하차되었어야 할 캐릭터였다.
데르킨 백작이 설마 이야기 후반까지 살아남을 줄 몰랐다.
하기야 강해서 살아남은 게 아니다.
살아남았기에 강한 것이다.
나는 데르킨 백작을 보면서 이와 같은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하지만 그게 뭐 어때서!
‘어차피 내가 쓰러뜨릴 테니까 상관없지!’
나는 드래곤 클로를 휘둘렀다.
근력은 내가 데르킨 백작보다 앞섰다.
하지만 데르킨 백작은 다수의 소환수들을 자유자재로 부리면서 내 신경을 긁었다.
이럴 때 필요한 건 뭐다?
“Paquva(터져라)!”
답은 용언 마법이다!
나를 향해 달려들던 검은 개미 군단이 퍼버벙! 터지면서 검은 연기의 형태로 돌아갔다.
그 와중에 루크가 내 뒤를 노렸다.
“이번에야말로…… 내 손에 쓰러져라, 로인!”
하나 루크의 공격은 내게 닿기도 전에 제나드의 일격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내 상대는 나다, 미치광이 녀석!”
“저번에 크게 한 번 당하더니만.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나 보군!”
“그때는 방심했을 뿐, 이번에는 당하지 않는다.”
제나드에겐 복수전이나 다를 바 없었다.
제나드가 루크를 맡아 준다면 나야 편하지!
한편 칠흑은 자신의 진영 안에서 난동을 부리는 나와 제나드, 그리고 얀의 모습이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인지 수십, 아니 수백 갈래의 검은 촉수들을 뻗었다.
검은 촉수들은 아군, 적군을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주변 일대를 휩쓸었다.
적어도 같은 팀 정도는 구분해야 하는 거 아닌가?
미×놈이 따로 없었다.
나는 데르킨 백작으로부터 멀어지는 걸 택했다.
내 목적은 데르킨 백작과 칠흑을 쓰러뜨리는 게 아니다.
본대를 무사히 타임 그레이브에서 탈출시키는 것이다.
나는 본대의 현재 위치를 파악했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될 거 같은데…….’
그전에 칠흑의 검은 촉수들이 본대를 노렸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벨라시오닉! 나와서 저들을 엄호해 주세요!”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나는 마지못해 벨라시오닉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벨라시오닉의 혼이 덩치를 키우기 시작했다.
살아생전의 벨라시오닉의 모습이 그대로 재구현되었다.
물론 다시 살아난 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영혼에 불과하다.
한편 벨라시오닉의 등장에 아군의 혼란이 가중되었다.
그때 벨라시오닉이 이들을 향해 외쳤다.
-그대들을 해하려 온 게 아니니 겁먹지 말거라! 그리고 레이샤르! 언제까지 인간 형태로 숨어 있을 텐가!
“자네가 나와 같이 싸우자고 말하니까 굉장히 어색하게 느껴지는군.”
결국 레이샤르도 드래곤의 외형으로 돌아왔다.
벨라시오닉과 나란히 마주 선 레이샤르.
황금의 용과 순백의 용이 공중에 떡 버티고 있으니 그야말로 장관이 따로 없었다.
레이샤르는 벨라시오닉의 혼과 나를 빠르게 번갈아 바라봤다.
“용신단에 영혼을 숨겨 놓았을 줄이야……. 예나 지금이나 그 잔머리는 변함이 없군.”
-도박이었지. 누군가가 용신단을 삼키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설령 삼켰다 하더라도 100레벨을 달성시키지 못했더라면 난 영원히 용신단 안에 잠들어 있었을 게야.
“그 말도 안 되는 일을 해낸 게 자네의 파트너로군.”
-파트너라……. 그런 셈이지.
나를 가리키며 한 말이었다.
벨라시오닉은 레이샤르를 곁눈질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알다시피 나는 육신이 없다. 예전만큼의 힘도 없지. 그걸 잘 알아 둬.
“그래도 명색이 드래곤인데. 타락한 동족 정도는 막을 수 있지 않나?”
-그거야…….
벨라시오닉의 눈이 번뜩였다.
-해 보면 알겠지!
두 드래곤과 칠흑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드래곤들끼리의 싸움이 펼쳐지자, 하늘이 공명하고 대지가 흔들렸다.
병력들은 지금 벌어지는 모습에 정신이 혼미해지는지 전투에 집중하지 못했다.
하나 라크스 공작이 무게 중심을 잡아 줬다.
“주변에 현혹되지 마라! 우리는 앞만 보고 달린다! 속도를 그대로 유지해라!”
라크스 공작의 통솔력은 역시 대단하다.
나한테 없는 능력이다.
나는 그냥 혼자서 이렇게 치고받고 싸우는 게 편하지, 군단을 이끌고 진두지휘하는 건 체질에 맞지 않는다.
본대 병력이 칠흑의 세력과 거의 접근했을 때쯤이었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외쳤다.
“용병왕이시여! 당신의 차례입니다!”
하늘이 양쪽으로 갈라졌다.
구름 사이로 뚫고 들어오는 햇빛.
그리고.
그 햇빛을 맞으며 지면에 낙하한 남자.
용병왕 벨레너.
그는 현역 시절 자신이 착용했던 갑옷을 갖춰 입고서 등장했다.
낡아빠진 갑옷과 검은 시간을 되돌려 현역 시절 때의 모습을 되찾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시간의 무덤지기가 아니라 용병왕 벨레너다.
“부정한 것들이여.”
벨레너는 양손으로 힘 있게 자신의 검을 쥐었다.
“사라지거라, 흔적도 없이!”
벨레너의 검이 정확히 검은 괴물들의 심장을 베어 냈다. 검이 긋는 사선을 따라 괴물들은 차례로 맥없이 쓰러졌다.
일격이 저렇게 다수의 검은 괴물들을 쓰러뜨리는 게 가능한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아직 용병왕의 위엄은 죽지 않았어!’
무의식적으로 내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벨레너의 등장에 데르킨 백작은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또 방해꾼이 나타났군.”
데르킨 백작의 일곱 번째 조각인 샤크와 다섯 번째 조각인 울프가 소환되었다.
눈으로 쫓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벨레너를 향해 쇄도하는 샤크와 울프.
벨레너는 코웃음을 쳤다.
“아무리 내가 늙었다 해도 그렇지, 너무 날 얕봤어!”
검을 아래에서 위로 추켜올렸다.
검의 움직임에 맞춰 샤크의 몸이 정확히 두 조각으로 갈라졌다.
왼손을 등 뒤로 뻗어 또 다른 한 자루의 검을 꺼내 들었다.
스르릉!
왼손의 검은 기존에 들고 있던 검에 비해 길이가 상대적으로 작았다.
그러나 울프들을 쓰러뜨리기에는 충분했다.
이때를 노려 나는 글레드의 불씨를 키워 나갔다.
“하아압!”
사방으로 글레드를 터트렸다.
칠흑의 부하들은 글레드의 불길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어느새 본대가 통과할 수 있을 만큼 큰 길이 형성되었다.
나는 라스가 했던 것처럼 글레드로 장벽을 만들어 칠흑의 하수인들이 접근해 오지 못하도록 막아 섰다.
“지금입니다! 라크스 공작님! 병력들을 이끌고 어서 빠져나가세요!”
“고맙네, 로인!”
병력들은 나를 통과해 그대로 타임 그레이브의 경계선을 넘었다.
도중에 케프리가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다.
“칠흑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
“케프리.”
베라는 케프리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고서 자신이 있는 쪽으로 강제로 이끌었다.
“지금은 때가 아닙니다. 알고 있잖아요.”
“……젠장!”
케프리는 마지못해 베라와 함께 경계선을 넘었다.
본대는 무사히 빠져나갔다.
이제 남은 건 나하고 얀, 제나드, 벨레너, 그리고 벨라시오닉의 혼과 레이샤르뿐이다.
드래곤들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알아서 잘 살아 나갈 테니까.
문제는 우리 인간들이다.
“얀! 너도 슬슬 나가라! 제나드, 당신도요! 오래 못 버텨!”
라스, 그자는 이짓을 어떻게 3일 밤낮으로 해 왔던 거지?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괜히 소설 속 주인공이 아닌가 보다.
레이샤르가 브레스를 뿜으면서 아주 약간의 시간을 벌었다.
그 사이에 얀과 제나드는 루크와 데르킨 백작의 추격을 따돌리고 빠르게 타임 그레이브의 경계 밖으로 빠져나왔다.
다음으로 레이샤르가 빠져나가고 벨라시오닉의 혼이 다시 내게 돌아왔다.
이제 남은 건…….
벨레너뿐.
벨레너는 나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로인이라고 했나?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만 하지.”
“……말씀하십시오, 용병왕이시여.”
벨레너는 나에게 낡은 목걸이 하나를 던졌다.
“라벤더 향이 나는 무덤을 하나 만들어 줬으면 좋겠군. 그녀가 아주 좋아할 거야.”
“예, 알겠습니다.”
나는 벨레너가 건네는 낡은 목걸이를 거머쥐었다.
그때 칠흑을 비롯해 하늘과 대지를 검게 물들인 검은 연기가 우리를 향해 몰려왔다.
이 작전에 들어가기 전에 벨레너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자신이 스스로 희생해서 저들과 함께 시간의 무덤에 영원히 갇히겠다고.
난 글레드의 장벽을 거뒀다.
그와 동시에 타임 그레이브의 경계선이 닫혔다.
벨레너.
그는 더 이상 용병왕이 아니다.
세계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영웅’이다.
* * *
타임 그레이브의 경계선을 등지고 홀로 칠흑과 그의 군단을 가로막은 남자.
벨레너는 이들을 보며 씨익 웃었다.
“너희들은 여기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다.”
들고 있던 검을 거꾸로 들고 바닥에 내리꽂았다.
그러자 검은 괴물들의 행동이 일시적으로 정지했다.
루크가 인상을 잔뜩 구겼다.
“이건 대체……!”
“시간을 영원히 멈출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네놈들의 추악한 계획도 평생 멈추겠지.”
루크는 벨레너의 시간 조작 능력의 영향하에 들어가 버린 탓에 검은 괴물들과 마찬가지로 얼어붙은 것처럼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칠흑과 데르킨 백작만이 그나마 벨레너의 시간 조작 능력에 간신히 저항하고 있을 뿐이었다.
칠흑이 촉수들을 뿜어냈다.
그러나 그것들은 벨레너에게 접근하기도 전에 검은 괴물들, 루크와 마찬가지로 멈춰 버렸다.
벨레너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이제 조금만 더……!”
‘시간’이 조금만 더 있다면, 칠흑과 데르킨 백작도 완전히 능력으로 멈추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칠흑이 웃었다.
“멍청하군.”
푸욱!
벨레너의 가슴팍을 관통한 검 한 자루.
벨레너는 입에서 붉은 피를 토해 냈다.
“쿨럭……!”
그가 쓰러진 탓에 시간 정지 마법이 풀리고 말았다.
바닥에 쓰러진 벨레너는 뒤에서 자신을 찌른 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네가…… 어째서……!”
그러나 벨레너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질 수 없었다.
그자는 다시 검을 들고 벨레너의 심장을 찔렀다.
용병왕의 최후였다.
* * *
무사히 타임 그레이브를 빠져나온 본대는 칠흑의 다음 습격이 있을 때까지 각자의 본거지로 돌아가 재정비를 갖추기로 했다.
블루로즈단과 레드 라인 기사단도 다시 나울로 돌아왔다.
모두가 무사히 생존해서 나울의 땅을 밟을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기쁜 일이다.
하지만 마냥 기뻐만 할 수는 없었다.
벨레너가 스스로를 희생해서 저들을 시간의 흐름 속에 영원히 가두겠다고 했지만…….
‘칠흑에게 얼마나 통할지는 모르겠어.’
분명 칠흑과 데르킨 백작은 다시 세상으로 나와 우리들을 위협할 것이다.
잠시나마 시간을 번 것에 불과할 뿐이다.
그동안 우리는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 한다.
일단 라스에게 타임 그레이브에서 겪었던 일들을 모두 요약해 전달하기로 했다.
전서 전달은 파랑새의 몫이다.
그 뒤로 나는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다.
혼자만의 공간에 익숙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마일이었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로인 님.”
“죽다가 다시 살아난 기분이야. 그나저나 왜? 나한테 볼일 있어?”
“로인 님께 급하게 보고드려야 할 게 있습니다.”
“심각한 거야?”
“매우 심각한 소식입니다.”
동시에 안 좋은 소식이라는 걸 뜻했다.
나는 작게 심호흡을 했다.
좋아. 마음의 준비는 끝났다.
“말해 봐.”
마일이 들려준 정보는 ‘심각하다.’라는 단어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다.
“카이딘이 사라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