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9
혼돈을 추구하는 자 (3)
글레드가 칠흑의 약점이라는 건 이제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리고 내가 글레드를 다룰 줄 안다는 것 역시 아는 사람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처음 보는 사람도 있었다.
“뭐야, 이거. 웬 불?”
얀은 내 손에 피어오르는 흰색 불을 처음 보는 모양인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물었다.
이 무식한 녀석을 봤나, 요즘 시대에 글레드를 모르는 사람이 있다니.
게다가 칠흑과 놈의 추종 세력하고 계속 전투를 이어 가는 조직 중 하나가 바로 스트레이트인데, 칠흑의 약점을 모른다는 게 어이가 없었다.
“너, 글레드가 뭔지 모르냐?”
“글레드? 들어는 본 거 같은데…….”
어쩔 수 없구먼.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나는 친히 글레드가 무엇인지 설명해 주기로 했다.
……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그럴 시간 없다.
“나중에 설명해 줄게. 그보다 지금은 여기를 빠져나가는 게 우선이야.”
타임 그레이브에서 빠져나가 재정비를 해야 한다.
라우르시스와 융합한 칠흑과 맞상대하기 위해선 우리도 힘을 끌어모아야 한다.
아직 칠흑과 선전포고를 하지 않은 국가들부터 먼저 설득을 해야 한다.
이건 ‘칠흑 VS 전 인류’의 싸움이라고.
그러기 위해서라도 무사히 타임 그레이브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문제는 아직도 저 경계선 너머로 칠흑의 추종자와 검은 괴물들이 득실거린다는 점이었다.
그들뿐만이 아니다.
시간의 속박에서 벗어난 칠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녀석의 생각은 뻔하다.
‘라스 일행과 우리가 합류하기 전에 우리를 여기서 각개격파하려는 거겠지.’
놈의 의도대로 흘러가면 안 된다.
하지만 어떻게 타임 그레이브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머리를 굴려 봤지만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도중에 아이디어가 내 뇌리를 스쳤다.
“바슬라, 잠깐만 이쪽으로 와 봐.”
나는 바슬라를 따로 불렀다.
러키 매지션이긴 하지만, 바슬라는 이래 봬도 나름 상급 마법사다.
내가 없는 사이에 상급 시험까지 봐서 통과를 해 버렸다고 들었다.
바슬라의 합격이 굉장히 예외적이라고 했다.
원래 상급 마법 시험은 마법사가 되고 나서 20~30년은 수련해야 겨우 합격할까 말까 할 정도로 어려운 시험이다.
그런 시험을 바슬라는 단 한 번의 시도로 통과해 버린 것이다.
어떻게 합격했을지는 보나마나 뻔했다.
딸꾹질 스킬(?)과 운빨로 합격했겠지.
바슬라는 운이 좋으니까 말이다.
“궁금해서 그런데, 순간 이동 마법 있잖아.”
“어. 그게 왜?”
“혹시 순간 이동 마법으로 타임 그레이브와 외부 세계를 연결시킬 수 있어?”
“순간 이동으로 이곳을 벗어날 생각인 거야?”
“그게 가장 안전할 거 같아서.”
타임 그레이브의 경계선에는 적들로 꽉 차 있었다.
저들을 돌파하는 건 상당히 힘들어 보였다.
물론 돌파는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는 과정에서 상당한 피해를 입을 것으로 예상된다.
난 그것조차 싫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이 병력들을 온전히 끌고 후퇴해야 한다.
한 명 한 명이 칠흑의 추종 세력과 맞서 싸울 수 있는 정예 병력이다.
이 전력을 여기서 잃을 순 없다.
그래서 떠올린 게 바로 순간 이동 마법이다.
하지만.
“그건 힘들어.”
부정적인 대답을 들려주는 바슬라였다.
“왜? 인원이 너무 많아서?”
“마법진으로 게이트를 만들면 인원 수 따위는 문제가 안 돼. 내가 말한 건 지역 문제야.”
바슬라는 왜 순간 이동 마법이 탈출구 수단으로 사용될 수 없는지 천천히 설명했다.
“타임 그레이브와 외부 세계가 서로 시간의 흐름이 다르다는 건 너도 알고 있겠지?”
“물론.”
“순간 이동은 공간의 법칙을 무시하는 고난이도 마법이야. 조금이라도 외부의 개입이 있어선 안 돼. 그러는 순간 바로 실패로 돌아가거든. 그런데 타임 그레이브는 벌써부터 ‘시간차’라는 게 순간 이동 마법에 관여하고 있어. 만약 타임 그레이브에서 외부 세계로 넘어가는 순간 이동 마법을 발동시킨다면…… 시간의 뒤틀림 때문에 어떻게 될지 몰라.”
“최악의 경우는?”
“존재 자체가 소멸되어 버리거나, 아니면 다른 차원으로 날아가 버리거나.”
“…….”
망했네.
나름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건만 단번에 거절당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방법은 역시 하나뿐인가?
‘저 포위망을 돌파하는 수밖에 없어.’
병력 손실은 피할 수 없는 과정이 되어 버린 듯했다.
바로 그때였다.
벨레너가 내게 말했다.
“내가 이곳을 탈출하도록 도와주마.”
‘어떻게요?’라고 묻으려고 하던 순간, 나는 벨레너와 눈이 마주쳤다.
저 눈빛은…….
‘죽음을 각오한 자의 눈이야.’
나는 저 눈을 본 적이 있었다.
뒤집힌 도시, 리플란에서 나와 리오나, 제나드, 그리고 용병들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희생했던 남자, 레임스.
그 녀석도 지금의 벨레너와 같은 눈을 했다.
나뿐만이 아니라 벨레너의 각오를 들은 모두가 다 그가 이번 일에 목숨을 걸었다는 사실을 눈치챈 모양인가 보다.
벨레너는 우리에게 말했다.
“어차피 난 살 만큼 살았다. 과거의 사람이 언제까지고 계속 살아남아 미래에 관여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라우르시스가 벨라시오닉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과거의 망령은 현재, 미래에 관여할 자격이 없다고.
현재, 미래에 관여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 그리고 앞으로 미래의 무게를 짊어질 사람뿐이다.
벨레너는 본인이 말했듯이 이미 과거의 사람이 되어 버렸다.
한때는 소중한 연인을 살리기 위해 용병왕이라는 칭호를 비롯해 모든 것을 포기했던 남자.
벨레너는 오랫동안 묵혀 뒀던 자신의 검을 빼 들었다.
“오랜만에 용병왕 벨레너로 복귀하겠군! 어디, 간만에 날뛰어 볼까!”
이것이 전장으로 향하는 그의 마지막 포부였다.
* * *
우리는 병력들을 이끌고 타임 그레이브의 경계선으로 향했다.
예상대로 라우르시스를 집어삼킨 칠흑이 추종자 세력을 이끌고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데르킨 백작의 모습도 보였다.
칠흑은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면서 우리에게 말을 걸어왔다.
“어차피 여기서 너희들은 다 죽을 목숨이다. 특별히 너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마. 고통 없이 죽고 싶다면 무기를 버리고 내게 와라. 그리고 나의 양분이 되어라. 그리하면 그자들은 편하게 만들어 주마. 하나 끝까지 나와 적대하겠다면, 여태껏 경험해 보지 못한 고통을 맛보게 해 주마.”
공포라는 감정이 병력들을 옥죄여 왔다.
이때, 내가 앞으로 나섰다.
이 말을 안 하면 도저히 못 버틸 거 같아서였다.
“입이 커서 그런지 말도 더럽게 많네. 쫑알쫑알 그만 대고 후딱 덤비기나 해라. 시간 없으니까.”
일부러 칠흑 앞에서 센 척을 했다.
나처럼 이렇게 정신 나간 녀석처럼 맞받아칠 줄 아는 놈이 있어야 사기가 떨어지지 않는다.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져도 내가 다 알아서 해결해 줄 거라는 믿음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보여 주기식 장치를 하나 선보이기로 했다.
화르르르륵!
내 오른손에 강렬하게 불타오르는 흰색 불씨.
글레드.
칠흑의 눈이 가늘어졌다.
직접 말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녀석은 아마 놀랐을 거다.
이전에 비해서 글레드의 위력이 더욱 강해졌으니 말이다.
내가 장담컨대, 지금의 내 능력은 라스와 거의 동일하거나…….
‘혹은 내가 그 위일지도 모르지.’
라스는 인페르노 하트를 통해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불의 힘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인페르노 하트는 벨라시오닉이 남긴 힘의 일부다.
하지만 나는 벨라시오닉의 힘 그 자체인 용신단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델리피나 전기》 초창기부터 꾸준히 보물들을 삼켜 오면서 드디어 용신단의 레벨을 최대치까지 찍었으니, 내가 라스보다 더 강할지도 모른다는 말은 상상이 아닌 현실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나한텐 주인공 보정이 없다는 거지.’
여기서 차이가 나는 게 아닐까 싶다.
아무튼 그건 그거고, 일단 눈앞의 위기부터 해결하도록 하자.
나는 라크스 공작에게 뒤를 맡기기로 했다.
“제가 앞장서서 관심을 끌 테니, 병력들을 잘 이끌어 주세요.”
라크스 공작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으로 파고들어서 저들의 진영을 흐트러뜨릴 역할을 맡을 자가 필요하다.
내가 그 역할에 자원했다.
나 혼자만 이 역할을 소화할 줄 알았건만.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혼자 모든 걸 짊어지려고 하지 마라, 로인. 그러다가 네가 역으로 당할 수도 있어.”
제나드가 내 곁에 나란히 섰다.
뒤이어 얀이 제나드의 말에 찬성표를 던졌다.
“블루로즈단 단장이 좋은 말해 줬네. 아니지, 전(前) 단장이랬나?”
얀은 기다란 봉을 퉁퉁 튕겼다.
나, 제나드, 그리고 얀.
이렇게 셋이서 미끼 역할을 소화하기로 했다.
나는 두 사람에게 신신당부했다.
“아무도 죽어선 안 됩니다. 그걸 명심하세요.”
당연한 말이지만, 이건 제나드와 얀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나는 빠른 속도로 적진을 향해 쇄도했다.
뒤이어 제나드와 얀도 나를 따라 돌진했다.
본대는 천천히 움직였다.
칠흑이 움직이기 전에 데르킨 백작과 루크가 먼저 움직였다.
데르킨 백작의 팔에 박혀 있는 칠흑의 조각 세 개가 빛났다.
카우(Cow) 스파이더(Spider), 그리고 엔트(Ant)가 소환되었다.
덩치 큰 검은 소가 콧김을 뿜어내면서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굳이 맞상대할 필요는 없다.
우리 셋은 카우의 돌진을 가볍게 흘려 버렸다.
스파이더의 검은 거미줄이 우리를 향해 쏟아졌다.
나의 드래곤 클로와 제나드의 대검이 거미줄을 갈라 버렸다.
얀이 크게 외쳤다.
“커져라!”
기다랗게 늘어난 봉을 들고 크게 휘젓는 얀.
한 방의 일격으로 엔트 군단을 날려 버렸다.
그뿐만 아니라 칠흑의 추종자들 역시 얀의 공격 범위에 휩쓸려 우수수 쓰러졌다.
무식한 거 빼곤 참 재주가 많은 녀석이다.
데르킨 백작은 혀를 찼다.
“안타까운 자들이군. 우리의 원대한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도리어 칼을 들이대다니……. 로인, 난 자네를 믿었건만, 기어코 우리는 이런 관계가 될 운명이었나 보군.”
“운명이라면 슬슬 받아들이는 게 어때?”
칠흑과 싸워서 평화를 쟁취하는 운명이라면, 진작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나.
데르킨 백작은 깨져 버린 열 번째 조각, 스콜피온(Scorpion) 대신 새로운 열 번째 조각, 소드(Sword)를 발동시켰다.
데르킨 백작의 손에 거대한 검이 강림했다.
제나드가 들고 다니는 바스타드 소드 정도의 크기는 되는 듯했다.
“못 본 사이에 멋진 무기 하나 장만하셨네!”
나는 데르킨 백작의 새로운 열 번째 조각을 가리키면서 우스갯소리를 내뱉었다.
데르킨 백작은 내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자네를 위해 특별히 마련한 나의 비장의 무기일세. 이 열 번째 조각으로 자네에게 영원한 휴식을 선사해 주도록 하지!”
그 말은 곧 날 죽일 거라는 뜻이 아닌가?
말을 참 잘도 돌려서 표현한다.
하나 데르킨 백작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네가 주는 선물은 받을 생각 없어!”
나는 드래곤 클로를 꺼내들었다.
까아아앙!
데르킨 백작의 소드와 나의 드래곤 클로가 정면으로 충돌했다.
인류의 목숨이 걸린 싸움의 막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