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6
어둠의 징조 (2)
치유소에서 카이딘이 보였던 수상한 행동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잊을 리가 있겠나.
라스를 암살한 범인이 누군지 밝혀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내 눈을 피할 수는 없다.
조금의 수상한 행동이 보이기라도 하면 나는 그자를 암살자 후보로 무조건 넣어 둘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레이샤르가 독보적인 존재였다.
하지만 카이딘의 이상 증세를 보고 나는 그도 후보에 넣어 두기로 했다.
카이딘은 괜찮다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지만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 있는 나에겐 아무것도 아닌 일이 아니었다.
마일은 내가 왜 이런 명령을 내리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실력 있는 현자를 골라서 감시원으로 붙여 두겠습니다.”
“별일이네. 평상시라면 내가 무슨 의도로 이런 명령을 내리는지 막 물어보고 그랬잖아.”
“그럼 제가 여쭤본다면 알려 주실 의향이 있습니까?”
“아니, 전혀.”
라스 암살 사건은 미래에 벌어지는 일이다.
마일이 아무리 호기심 덕후라 하더라도 나는 마일에게 《델리피나 전기》에 나왔던 모든 내용들을 다 공유하진 않았다.
특히 스토리에 큰 지장을 줄 만한 정보는 무조건 숨겼다.
라스 암살 건수도 마찬가지였다.
마일에게 인물 조사를 부탁한 적은 있어도 왜 내가 그들을 조사하고 싶어 하는지에 대해서까지는 알려 주지 않았다.
이런 경력이 있었기에 마일은 애초에 질문하기를 포기한 듯했다.
좋은 태도다.
마일은 내가 부여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다시 모습을 감췄다.
카이딘까지 포함해서 범인 후보가 두 명으로 늘었다.
도중에 나는 궁금증이 들었다.
‘카이딘은 어쩌다가 저렇게 된 거지?’
칠흑과 싸우던 도중에 부상을 입었다는 것만으로는 저 상태를 이해하기가 많이 힘들었다.
왜냐하면 카이딘은 그보다 더 큰 부상을 입었던 적이 있었으니까.
바로 스카이 랜드에서였다.
심지어 라스는 카이딘보다도 심하게 다쳤다.
하나 그때 당시에는 두 사람 다 멀쩡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갑자기?
‘내가 모르는 뭔가가 벌어지고 있는 거 같은데…….’
어쩌면 《델리피나 전기》에 나오지 않는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큰일인데.
* * *
사무실로 돌아온 나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레이샤르, 그리고 카이딘 때문이었다.
카이딘은 차라리 나은 편이었다.
왜냐하면 적어도 위치 정도는 알 수 있으니까 말이다.
감시원을 붙여 뒀으니, 상황이 위험하다 싶으면 내가 바로 나설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레이샤르는?
답이 없다.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그때, 갑자기 벨라시오닉의 혼이 불쑥 튀어나왔다.
-레이샤르 때문에 고민인 거 같군.
“멋대로 튀어나오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뭐 어때? 아무도 없는데.
이렇게 된 이상 나는 벨라시오닉에게 레이샤르에 관한 정보를 얻어 내기로 했다.
“레이샤르가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당신은 레이샤르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있습니까?”
-아니. 모른다.
드래곤이라는 존재는 하나같이 다 도움이 안 되는 녀석들뿐이로구먼.
벨라시오닉은 머리를 가로저었다.
-육체가 있을 때의 나였더라면 가능했을지도 모르지.
“그럼 지금은 불가능합니까?”
-영혼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대신에 나의 능력은 전부 너에게 전수되지 않았나. 내가 못하는 일이 있다면 네가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용신단의 능력 중에는 행방불명이 되어 버린 드래곤의 위치를 추적할 수 있는 그런 기능 따윈 없었다.
최대한 정보를 긁어모을 수밖에 없었다
때마침 누군가가 사무실 문을 노크했다.
“단장님, 저예요.”
라비의 목소리였다.
나는 벨라시오닉의 혼에게 다시 들어가라고 지시했다.
라비가 문 건너편에서 나에게 이런 보고를 해 왔다.
“손님이 오셨는데요.”
“손님? 누구지?”
올 만한 사람이 없었다.
“라크스 공작님이 오셨어요.”
“……뭐?”
예상치도 못한 인물이 등장했다.
갑자기 나울엔 무슨 일로?
일단 만나 보기로 했다.
라비와 함께 내 사무실을 방문하게 된 라스크 공작.
그는 나를 보더니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행방불명되었다가 다시 돌아왔다고 듣긴 했는데, 얼굴을 보니까 이제야 안심이 되는군.”
엔드라와 비슷한 말을 하는 라크스 공작이었다.
“여긴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나는 라크스 공작에게 바로 본론을 들려주게끔 유도했다.
그가 여기까지 직접 왔다는 건, 급한 일이 있어서라는 뜻이겠지.
내 예상대로 라크스 공작은 큼지막한 소식 하나를 들고 왔다.
“칠흑에게 잠식된 것으로 추정되는 드래곤이 나타났네.”
“예?”
설마…….
“레이샤르입니까?”
“그걸 이제부터 확인하러 가야 되네. 만약 칠흑에게 정말로 잠식되었다고 한다면 제2의 라바인 전투가 발발할 터. 내가 직접 원정대를 꾸려서 잠식되었을지도 모르는 드래곤을 없애러 가기로 했지. 혹여나 잠식이 안 되어 있다 하더라도 드래곤이 인간계에 있으면 칠흑의 먹잇감으로 노려질 가능성이 크니까.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우선적으로 제거해야 하네.”
레이샤르의 경우에는 여태껏 본인의 정체를 잘 숨겨 왔다.
그래서 칠흑에게 타깃으로 지정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대놓고 인간계에서 ‘나, 드래곤이오!’ 하고 정체를 밝히고 멋대로 활보하고 다니는 드래곤은 굉장히 위험하다.
설령 잠식이 되지 않은 상태라 하더라도 인간계에서 내쫓거나, 아군으로 만들거나, 그게 안 될 거 같으면 없애야 한다.
나중에 더 큰 적이 되어 돌아올 수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라크스 공작은 나에게 다시 한번 요구사항을 들려줬다.
“내 원정대에 힘을 보태 줬으면 좋겠군.”
내가 들려줄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가용할 수 있는 병력을 최대한 동원해서 라크스 공작님을 돕도록 하겠습니다.”
“고맙네. 자네가 함께 한다면 든든하지!”
그나저나 이상하다.
《델리피나 전기》 5권 내용 중에서 ‘제2의 라바인 전투가 벌어진다.’라는 이야기는 없었다.
‘도대체 이야기가 얼마나 꼬인 거야?’
이야기가 이렇게까지 심하게 어긋난 상태라면…….
차원 이동으로 넘어가서 《델리피나 전기》 5권을 읽어도 아무런 도움이 안 될 수도 있다.
라스를 암살하려는 자의 정체를 알아내는 용도를 제외하고 말이다.
* * *
정체모를 드래곤의 등장.
이 드래곤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나는 블루로즈단과 레드 라인 기사단을 소집했다.
“전체 주목!”
첸버의 지시에 따라 용병들과 기사들이 내게 집중했다.
“라크스 공작으로부터 원정대 합류 요청을 받았다. 우리가 어떤 존재를 상대하러 가야 할지에 대해선 이미 다 들었을 거라 믿으마.”
용병들과 기사들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는 드래곤이다.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어쩌면 여기 있는 모두가 다 무사히 생환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상대도 상대지만, 지역도 문제다.
“우리는 내일 오전에 바로 출정에 오를 것이다. 장소는…… 시간의 무덤, 타임 그레이브다.”
시간의 흐름이 뒤틀린 곳, 타임 그레이브.
데르킨 백작과 맞붙었던 바로 그 장소다.
설마 그곳에 또 다시 발을 들여놓게 될 줄은 몰랐다.
그래도 어찌하랴, 드래곤이 그곳에 나타났다고 하는데.
용병들과 기사들의 얼굴은 급격하게 굳었다.
이들의 심정은 충분히 다 이해한다.
무서울 것이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다. 만약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면, 우리가 사는 세계는 칠흑에게 삼켜질 것이다.”
나는 휴즈와 함께 칠흑에게 반이 먹힌 세계를 직접 두 눈으로 보고 왔다.
지옥 그 자체였다.
난 델리피나 대륙을 그 지옥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
“두려울 것이다. 무서울 것이다. 그리고 겁이 날 것이다. 하나 명심해라, 그 두려움, 그 무서움, 그리고 그 겁은 우리뿐만이 아니라 적들도 똑같이 느낀다는 사실을! 어느 쪽이 먼저 두려움을 극복하고 검을 드는가! 결국 이 싸움이 승패를 좌우할 것이다!”
나는 이들에게 외쳤다.
“검을 들어라! 겁먹지 마라!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마라! 내가 너희 모두를 책임지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게 만들겠다! 그러니 나를 믿고 따라와라!”
“단장님을 따르겠습니다!”
“기사단장님께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살아서 돌아온다.
나를 믿고 따르는 자들과 함께! 반드시!
이것이 나의 출사표(出師表)다.
* * *
라크스 공작이 꾸린 원정대의 규모는 상당했다.
이름만 들어도 알 것 같은 기사단, 용병단이 모여들었다.
그중에는 오랜만에 보는 얼굴도 있었다.
“어이, 로인!”
용병 조직, 스트레이트의 리더인 얀이었다.
나는 얀을 보고 헛웃음을 삼켰다.
“아직도 용병 대장 노릇하고 있었냐?”
“왜. 하면 안 되냐?”
“너, 귀족이잖아. 너희 가문 사람들이 너를 데려오려고 안달이 나 있는데, 이 와중에 칠흑에게 잠식당했을지도 모르는 드래곤을 잡으러 가다니, 용기가 가상해도 너무 가상한데?”
얀은 장난기를 거둔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세계가 칠흑에게 삼켜질지도 모르는데 가만히 앉아서 펜대나 굴릴 순 없잖아? 누군가가 나서서 해야 할 일이라면, 내가 그 일을 하고 싶어. 난 원래 그런 성격이거든.”
솔직히 얀을 다시 봤다.
저 마인드는 굉장히 마음에 든다.
‘나중에 좋은 귀족이 되겠어.’
단, 그전에 얀은 공부를 좀 해야 한다.
무식한 게 얀의 가장 큰 단점이니까.
우리는 라크스 공작 휘하의 부대를 따라 타임 그레이브를 향해 이동했다.
라스 일행은 원정대에 참가하지 않았다.
다른 쪽에서 활개를 치고 있는 데르킨 백작 패거리를 마크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타임 그레이브에 있는 드래곤이 칠흑에게 확실하게 잠식이 되어 있는 존재라면 라스는 이곳으로 무조건 왔을 것이다.
그러나 잠식된 게 맞는지 아닌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굳이 타임 그레이브까지 다녀갈 여유가 라스 일행에겐 없었다.
이동하면서 나는 최악의 수를 생각해 봤다.
‘잠식되었다.’에 더해서 드래곤의 정체가 ‘레이샤르다.’라는 것까지 겹치게 되면…….
‘답 없지. 당장 라스를 불러야 해.’
솔직히 나 혼자서 칠흑과 잠식된 레이샤르를 동시에 상대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물론 라크스 공작이 있긴 하지만, 그가 잠식된 레이샤르를 혼자서 마크할 정도의 실력이 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블루로즈단과 레드 라인 기사단, 그리고 라크스 공작이 대동한 원정대 병력들은 검은 괴물들을 상대해야 한다.
그나마 보스급 전투에 기용할 수 있는 캐릭터는 제나드, 리오나, 그리고 내 직속 소대원들 정도가 될 것이다.
타임 그레이브의 경계선에 도달했다.
안으로 걸음을 옮긴 순간, 저 멀리서 한 마리의 드래곤이 날개짓을 하며 우리에게 빠른 속도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드래곤이다!”
“전투태세를 갖춰라!”
“진영을 유지해! 정신 똑바로 차리고!”
병력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 넌 도대체 어떤 드래곤이냐!
설마 정말로 레이샤르는 아니겠지?
어서 정체를 밝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