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2
문제아 콤비 (5)
베라에게 케프리를 맡긴 지 이제 10일째가 되어 가고 있었다.
‘잘하고 있으려나?’
아직까지는 특별히 무슨 문제가 발생했다는 보고는 들어온 적이 없었다.
그런데 잘되고 있다는 소식도 없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곤 하지만, 그래도 내심 궁금해지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마침 블루로즈단 본거지로 사용될 건물의 확장 공사가 오늘 마무리되었다.
공사 마감이 잘 되었는지 라그너와 함께 쭉 둘러본 후에 나는 베라와 케프리가 있는 곳을 잠시 들르기로 했다.
“가르시아.”
“예, 대장님.”
가르시아가 하던 일을 멈추고 바로 나에게 달려왔다.
“베라 어디 있는지 알아?”
“그 하이 엘프 아가씨 말입니까?”
“어, 레드 라인 훈련장에도 안 보이고 그래서.”
“글쎄요, 저도 잘…….”
마침 지나가던 라비가 우리들의 대화를 들은 모양인지 가르시아를 대신해서 내가 원하는 답을 들려줬다.
“베라 씨라면 케프리와 나울 동쪽 입구에 있는 폭포 쪽에 있을 거예요. 이 시간대라면 매번 거기 가곤 하니까요.”
“폭포? 거긴 왜?”
“저도 잘 모르겠어요.”
둘의 위치를 알아냈으니 일단 직접 가 보기로 결심했다.
폭포라…… 거기서 대체 뭘 하려는 것인지 모르겠다.
10분 정도 걸었을까?
폭포수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나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너, 설마 케프리냐?”
“…….”
케프리는 내 말을 듣고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정좌를 하고 앉은 채 폭포수를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이건 또 뭐냐?
무협이나 사극 영화에서 볼 법한 장면을 판타지 세계에서 직접 보니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단장님 오셨군요.”
베라가 뒤늦게 내 존재를 알아차렸다.
“지금 쟤, 뭐 하고 있는 거야?”
“정신 수양 중입니다.”
“네가 시킨 거야?”
“네. 떨어지는 폭포수를 맞으면서 생각을 비우는 거죠. 머릿속의 상념들, 그리고 가슴속에 남아 있는 여러 감정들을 하나로 정리하는 과정입니다. 이게 선행되지 않고선 제 교육을 따라올 수 없어요.”
“아…… 그래?”
나는 딱히 베라에게 케프리를 수행시키라는 지시는 내리지 않았는데.
그냥 얌전히 잘 데리고 다니라는 의도로 말을 했다.
하지만 베라는 내 뜻을 약간 다르게 해석했나 보다.
그나저나.
‘저 말썽꾸러기 녀석이 저렇게 가만히 앉아 있다니, 신기하네.’
문제아 콤비 VS 황소고집 엘프녀의 승부는 엘프녀의 승리로 돌아간 듯했다.
하기야 케프리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베라를 이길 순 없을 테니까.
충분히 이해한다.
잠깐 동향만 확인하고 가려고 했는데 케프리의 정신 수양이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키기로 했다.
30분 후.
케프리가 눈을 떴다.
그제야 나를 발견했다.
“어? 형씨, 언제 왔어?”
“형씨가 아니야. 단장님이라고 불러, 단장님.”
“단장 형씨라고 불러달라고?”
“베라. 저 녀석, 정신 수양이 덜 된 거 같은데?”
형씨라는 단어를 빼라고 말한 거 같은데. 죽어도 안 뺀다.
좀 달라졌나 싶었건만.
케프리는 역시 케프리였다.
* * *
로인을 보낸 뒤에 베라는 케프리를 데리고 정신 수양을 위한 방을 찾았다.
오전은 폭포 아래에서. 오후에는 이렇게 실내에서 정신 수양을 계속해서 반복했다.
처음에는 못 버티겠다고 난동을 피웠던 케프리와 드레드.
그러나 10일이라는 시간이 지난 뒤, 케프리는 예전에 비해 많이 차분해졌다.
베라는 케프리의 변화된 모습이 조금, 아주 조금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
오로지 정적만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약속된 시간이 모두 끝났다.
“수고했어요. 오늘은 이만하도록 하죠.”
베라는 자신의 교육을 군말 없이 잘 따라오는 케프리가 오늘따라 유독 기특하게 느껴졌다.
케프리에게 오랜만에 포상을 내리기로 했다.
“저녁 먹으러 같이 가죠. 제가 살게요.”
“난 굉장히 많이 먹는 스타일이라 식비가 장난 아니게 나올 거야. 그래도 상관없다면 데려가도 좋아.”
“괜찮아요. 가죠.”
“그 말, 후회하기 없기다?”
베라는 이때 직감했어야 했다.
사실 그녀는 케프리가 먹으면 얼마나 먹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 생각은 머지않아 안일한 생각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베라는 자기가 자주 가는 식당으로 케프리를 데려갔다.
음식이 나옴과 동시에 케프리는 빠른 속도로 눈앞의 먹거리들을 전부 해치웠다.
5인분의 식사를 3분도 안 돼서 다 먹어 버린 것이다.
베라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런데 지금 가지는 이 저녁 식사가 케프리의 첫 끼가 아니었다.
아침, 점심 다 챙겨 먹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프리는 마치 걸신이 들린 것처럼 음식을 주문하고 먹어 치우기를 반복했다.
식당 내 사람들의 시선이 케프리에게 집중될 정도였다.
“쟤 좀 봐!”
“뭐 저렇게 잘 먹는데?”
“꼬마가 잘도 먹네. 한창 클 때라 그런가?”
아무리 성장기 때문이라 하더라도 혼자서 20인분을 먹어 치운 건 비정상적이지 않을까.
베라는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확실히 많이 먹긴 하네요.”
“그만 먹을까?”
“배부른가요?”
“아니, 딱 적당해.”
“그럼 더 드셔도 상관없어요. 어차피 제가 사기로 했으니까요. 그보다 그 식사량은 칠흑의 조각과 융합한 후유증인가요?”
“따지고 보면 그렇지.”
칠흑의 힘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 있다.
바로 포식 본능이다.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을 삼키려고 하는 포식 본능이야말로 칠흑이 가진 힘의 원천이다.
단, 칠흑과 칠흑의 조각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다.
칠흑은 삼킨 것을 자신의 힘으로 흡수하여 사용할 수 있다.
반면 칠흑의 조각은 삼켰던 것을 힘으로 흡수하는 것밖에 하지 못한다.
드레드도 마찬가지였다.
30인분 정도 해치웠을 무렵.
주방에 있던 요리사가 나와 베라와 케프리에게 양해를 구했다.
“저기…… 손님, 죄송합니다. 재료가 전부 동이 나서요.”
“그래요?”
베라는 케프리에게 제안했다.
“다른 가게로 갈까요?”
“응? 더 사 주게?”
“네. 기왕 사 주는 거, 만족할 때까지 사 줘야죠.”
“하이 엘프 누나가 마음에 들 때가 있다니, 별일이네.”
케프리가 말하는 ‘별일’은 사실 베라도 오늘 처음 경험했다.
그렇게 문제아 콤비와 황소고집 엘프녀는 서로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다.
* * *
두 번째 저녁 식사를 하러 가는 베라와 케프리.
도중에 파이스가 그들의 모습을 발견하자마자 알은척해 왔다.
“거기 숙녀분! 그리고 꼬맹이! 야밤에 어딜 가시나?”
“밥 먹으러 가던 중이에요.”
“밥? 이 시간에?”
지금은 저녁 9시다.
밥 먹으러 가기에는 시간이 많이 늦었다.
1차 식당에서 케프리가 30인분이나 주문해서 시간이 오래 걸렸다.
먹는 데에는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았다.
조리하는 데 시간이 걸렸을 뿐이지.
이번에는 베라가 파이스에게 물었다.
“당신은 또 술 마시러 가는 건가요?”
“응? 에이, 내가 무슨 술만 마시는 사람인 줄 아나! 오늘은 얘네들한테 맛있는 것 좀 사 주려고 나온 거야.”
파이스의 뒤에서 숨어 있던 아이들이 고개만 빼꼼 내민 채 베라를 올려다봤다.
케프리보다 나이가 어려 보이는 소년 소녀들이었다.
“그 아이들은 누구죠? 제가 못 본 사이에 결혼해서 아이라도 낳으셨나요?”
“엘프 아가씨, 오늘따라 농담이 심하네. 치유소에서 보호 중이던 아이들이야.”
“다친 곳은 안 보이는데요.”
“애들 부모가 다쳤거든. 검은 괴물이 마을을 습격했을 때 부상을 심각하게 당했더라고. 그래서 내가 맡아서 치유해 주고 있었어. 부모가 병실에서 꼼짝달싹 못하고 있으니까 애들 밥 챙겨 주는 사람이 없어서 내가 이렇게 데리고 나왔지.”
“그런 선행도 베풀 줄 아는 남자였나요?”
“물론이지. 이래 봬도 나, 전직 성직자라고.”
파이스의 기행 때문에 깜빡하는 사실이지만, 파이스는 평판 좋고 유능했던 성직자였다.
베라와 파이스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케프리는 애들을 빤히 바라봤다.
그러다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도 가족이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지. 너희들보다 더 심한 일을 겪은 사람들도 있어. 칠흑, 그 빌어먹을 자식에게 가족들이 전부 몰살당하고 혼자만 덩그러니 살아남았다든지……. 그러니까 자기들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것 같다는 그런 눈은 하지 마라. 짜증 나니까.”
몸을 돌리며 빠른 걸음으로 장소를 뜨는 케프리.
베라는 그런 케프리에게 목청껏 외쳤다.
“갑자기 애들한테 왜 그래요! 문제될 거라도 있어요?”
“문제될 거? 없어. 오히려 문제는 나한테 있으니까. 사람들도 다 그렇게 말하잖아? 내가 가장 골칫덩이라고.”
“……저녁 식사는요?”
“안 먹을래. 식욕이 사라졌거든.”
할 말만 남긴 채 케프리는 미련 없이 갈 길을 가 버렸다.
멀어져가는 케프리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베라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가까워질 뻔했던 둘의 거리는 다시 멀어진 듯했다.
* * *
늦은 밤까지 난 사무실에서 남아 업무를 봐야만 했다.
블루로즈단 조직 개편 때문이었다.
“이게…… 생각보다 머리 아픈 일이네.”
3팀 체재를 없애고 대신 R팀에서 해 왔던 것처럼 소대를 나눠서 운영하는 체재로 바꾸려 했다.
드레인, 가르시아 소대는 그대로 남겨 둘 생각이다.
문제는 전(前) S팀, B팀 멤버들이었다.
제나드가 큰 부상으로 인해 단장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블루로즈단에 소속되어 임무를 다하겠다는 의사를 밝혀 왔었다.
첸버도 제나드가 남아 있는 한, 자신도 계속 남아 있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나는 제나드, 첸버에게 각각 소대 하나를 맡길 생각이었다.
S팀 멤버들이 두 사람들을 잘 따르기 때문이다.
그러면 S팀이었던 단원들끼리 모이게 해서 제나드 소대를 따로 편성하는 게 좋겠지?
여기에 B팀 용병들 몇몇을 나눠서 제나드 소대에 포함시키면, 소대별로 인원이 균등하게 맞춰지게 된다.
내 직속 소대는 계속 남겨 두기로 했다.
1개 소대만으로 임무 수행이 어려울 경우에는 내 직속 소대로 지원해 주면 된다.
이렇게 소대에 구애되지 않고 자유롭게, 유동적으로 움직여 줄 인원들도 필요하다.
대장 직속 소대, 아니 단장 직속 소대 멤버는 반드, 에나, 파이스, 베라. 이렇게 4명으로 계속 고정시켜서 갈 예정이다.
“아니지.”
생각해 보니 중간에 새로운 등장인물이 하나 합류했다.
바로 케프리, 드레드 콤비다.
베라가 사수를 맡고 있으니까 케프리, 드레드도 단장 직속 소대의 일원에 포함이 되는 건가?
“이건 미처 생각 못 했던 건데.”
그래, 차라리 이쪽에 소속되어 있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블루로즈단 단원들은 아직도 케프리와 드레드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괜히 다른 소대에 가서 분위기 흐릴 바에야 그냥 직속 소대에 있는 게 좋을지도.
“좋아, 소대 편성은 이만하면 됐고…….”
다음 남아 있는 업무는 또 뭘까?
책상 가득 쌓여 있는 서류들을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때,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저, 베라에요.”
이 시간에 베라가 웬일이래?
“들어와.”
“실례할게요.”
문을 열고 들어온 베라는 굳은 얼굴로 나에게 물었다.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나요?”
“뭔데?”
“간단한 거예요.”
목소리를 가다듬은 베라는 갑자기 이런 부탁을 해왔다.
“케프리, 그 소년에 대한 개인사를 알고 싶어요. 어떻게 하다가 드레드와 융합했는지, 그리고 어쩌다가 혼자가 되었는지까지 전부 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