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3
마지막 각성 (2)
사방에서 날아드는 검은 연기들의 공격을 버티다 못한 휴즈는 칠흑과 거리를 벌리며 뒤로 멀찍이 물러났다.
루크를 발차기 한 방으로 날려 버렸던 강자가 저렇게 쩔쩔매다니.
신기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칠흑이 얼마나 상대하기 까다로운 녀석인지를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계속 칠흑에게 당하고만 있을 생각은 없었다.
“스승님!”
휴즈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휴즈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바통 터치입니다. 여기서부터는 제가 맡겠습니다.”
“힘든 상대다. 아무리 너라 해도……!”
“괜찮습니다. 지금의 저라면 할 수 있어요.”
나는 내 머리 위에 떠 있는 거대한 용의 형상을 가리켰다.
휴즈는 용의 형상을 보면서 혼잣말을 흘렸다.
“벨라시오닉…….”
묘한 감정일 것이다.
휴즈는 동료들과 함께 라바인 전투에서 벨라시오닉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바 있었다.
그러나 완벽한 승리는 아니었다.
폭주한 벨라시오닉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휴즈는 다수의 동료들을 잃었다.
그리고 강제로 진실의 눈을 얻게 됨으로 인해 인간 불신에 걸리고 말았다.
하나 벨라시오닉은 휴즈의 적이 아니다.
모든 흑막은 바로 칠흑이다.
테이른조차 칠흑에게 잠식당한 적이 있었다.
휴즈의 입가에 쓰디쓴 미소가 번졌다.
“설마 이런 상황을 맞이할 줄이야……. 생각도 못했군.”
“원래 인생이라는 게 다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료가 되기도 하고. 그런 거죠.”
나는 몸을 풀었다.
내 힘이 칠흑에게 어디까지 통할지 한번 시험해 보고 싶어졌다.
휴즈는 내 어깨를 가볍게 툭 쳤다.
“그래. 원하는 만큼 한번 날뛰어 봐라. 그동안 나는 테이른의 상태를 좀 봐 둬야겠다.”
“예, 스승님. 카인을…… 아니, 테이른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내게 맡겨라.”
카인의 정체가 테이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테이른이 칠흑에게 먹히도록 방치할 순 없다.
칠흑은 흥미롭다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벨라시오닉의 혼을 등에 업었군. 그런다고 뭐가 달라질 거라고 생각하나?”
칠흑의 검은 연기가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검은 연기는 아까와 같이 짐승의 머리로 변해 나를 물어뜯으려 했다.
어디.
내 능력이 제대로 먹히나 시험 한번 해 볼까?
“Gazua(멈춰라).”
내 말에 따라 검은 짐승들의 행동이 일제히 굳었다.
용언 마법은 칠흑에게 통하지 않는 스킬이었다.
하지만 벨라시오닉의 혼을 각성시킴으로 인해 나는 기존의 힘 이상의 능력을 거머쥐게 되었다.
“Paquva(터져라)!”
그저 말 한마디일 뿐임에도 불구하고 검은 짐승들의 머리는 산산조각이 나며 흩어졌다.
그래, 바로 이거지!
나는 칠흑을 똑바로 응시했다.
“자, 이제 누가 먹힐 입장인지, 내가 똑똑히 알려 주마.”
나는 그렇게 외치며 칠흑을 향해 거침없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검은 연기들이 내 주변을 애워싸는데도 두렵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내가 노리는 건 칠흑이 지닌 검은 심장뿐이다.
‘분명 어디엔가 있을 거야!’
검은 심장만 파괴하면, 제아무리 칠흑이라 하더라도 버텨 낼 재간이 없을 것이다.
게다가 나는 글레드까지 가지고 있다.
각성한 용신단의 힘과 글레드만 있다면…….
칠흑을 쓰러뜨리는 것도 가능하다!
‘할 수 있어!’
자신감이 마구 샘솟았다.
한편 칠흑은 계속해서 내게 검은 연기를 쏘아 보냈다.
검은 연기는 벨라시오닉의 날갯짓으로 인해 순식간에 사방으로 흩어졌다.
“땡큐!”
나는 벨라시오닉의 혼에게 짧게 고마움을 표했다.
다시 검은 연기를 모은 칠흑은 자신의 양팔의 크기를 급격하게 키워 갔다.
“흡!”
좌우측에서 칠흑의 거대한 손이 나를 덮쳤다.
나는 용신단의 힘을 최대한으로 끌어 올렸다.
손을 수평으로 뻗어 녀석의 공격을 그대로 맞받아쳤다.
터어엉!
칠흑과의 힘겨루기가 시작되었다.
이전의 나였더라면 금세 ‘납작쿵’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다르다!
왼손과 오른손에 힘을 집중시켰다.
용의 숨결, 더블!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빛의 기둥이 칠흑의 양손을 일시적으로 소멸시켰다.
칠흑이 인상을 구겼다.
“먹잇감 주제에 감히……!”
“내가 아까 말했지?”
나는 오른손과 왼손에 각각 글레드를 소환했다.
“누가 먹히는 입장인지 내가 몸소 알려 주겠다고.”
화이트 플레임의 힘을 응집시킨 후에 사방으로 퍼트렸다.
따스한 화기가 나를 중심으로 퍼져 나갔다.
칠흑의 검은 연기가 한순간에 모두 소멸되었다.
기회를 잡은 나는 칠흑에게 달려들었다.
심장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 찾을 수 없다면…….
“전부 불태워 주마!”
칠흑을 통째로 불태우면 된다.
화이트 플레임을 칠흑의 왼쪽 팔에 묻혔다.
칠흑은 침음을 흘리며 왼쪽 팔을 스스로 절단시켰다.
아무리 칠흑이라 하더라도 글레드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놈은 입을 벌려 여태껏 먹었던 것들을 토해 내 글레드의 불길을 막기 위한 방벽으로 삼으려 했다.
리플란에서 이미 한 번 당했던 수법이었다.
칠흑이 입을 벌리기 직전.
나는 양손으로 윗입술과 턱을 붙잡았다.
그리고 놈의 입을 틀어막았다.
“내가 한번 당한 걸 두 번 당해 줄 거라고 생각했나!”
그러면 큰 오산이다.
인간이란 자고로 학습하는 존재.
칠흑의 글레드 방어법을 이미 몇 번 당해 본 나로선 지금의 녀석이 어떤 행동을 취할지 예상하기 쉬웠다.
놈의 얼굴에 글레드의 불씨를 묻혔다.
“큭!”
칠흑은 남은 한 팔로 스스로 자신의 안면을 잘라 냈다.
얼굴을 잃어버린 칠흑.
그러나 머리가 잘려 나가도 계속해서 살아나는 놈이다.
이 정도로는 칠흑에게 치명상을 입혔다고 보기 힘들다.
칠흑의 몸에서 수십 가닥의 촉수가 형성되었다.
검은 촉수는 나를 노렸다.
그러나 벨라시오닉의 혼이 촉수들을 크게 베어 물었다.
뚜두둑! 뚜둑!
촉수들이 우수수 떨어져 나갔다.
벨라시오닉의 혼은 촉수들을 우적우적 씹어 먹었다.
그러더니 이내 ‘퉤!’ 하고 뱉어 냈다.
-맛없는 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군, 검은 녀석.
“네놈들……!”
칠흑은 나와 벨라시오닉을 번갈아 보면서 살기를 드러냈다.
낭떠러지 바로 직전까지 칠흑을 몰아붙였다.
조금만 더!
그냥 이대로 칠흑을 없애 버리면, 모두가 해피한 결말을 맞이할 수 있게 될 거다!
정정.
추종자들 빼고!
글레드의 화기를 대량으로 끌어 올렸다.
화르르르륵!
여태껏 이렇게까지 글레드의 힘을 발동시켜 본 적은 없었다.
‘마무리 일격으로 잘 어울리는 공격이군!’
이 한 방으로 모든 걸 끝내겠다!
……라고 외치려 했으나.
내 일격은 갑자기 난입한 검은 짐승에 의해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칠흑이 소환한 소환수가 아니었다.
데르킨 백작의 소환수였다.
열 번째 조각, 스콜피온(Scorpion)이 칠흑을 대신해 글레드의 재물이 되어 버렸다.
스콜피온이 시간을 버는 동안 데르킨 백작은 누더기가 된 칠흑을 회수했다.
데르킨 백작의 팔에 박힌 칠흑의 조각 중 하나가 깨졌다.
스콜피온의 조각이었다.
“조각 하나 잃고 칠흑님을 구할 수만 있다면야…… 값싼 희생이겠지.”
“누가 놓칠 줄 알고!”
칠흑과 데르킨 백작을 노렸으나, 데르킨 백작은 남은 소환수들을 모조리 다 소환하면서 나를 방해했다.
검은 소환수들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내게 동시에 달려들었다.
“벨라시오닉! 저놈 좀 어떻게 해 봐요!”
-나도 바빠!
벨라시오닉의 혼은 데르킨 벡작의 열한 번째 조각, 드래곤(Dragon)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소환수들이 시간을 버는 동안, 데르킨 백작은 칠흑과 함께 빠르게 카오스 필드를 벗어났다.
놈들을 뒤쫓으려 했으나 이내 관두기로 했다.
데르킨 백작이 이곳에 있다는 건, 다시 말해서 루크나 마리, 기타 추종자들이 근처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이런 곳에서 테이른과 휴즈를 놔두고 이곳을 떠날 순 없었다.
데르킨 백작이 사라짐과 동시에 그가 소환했던 검은 소환수들도 종적을 감췄다.
‘바로 눈앞에서 칠흑을 놓치다니.’
다 잡은 기회였는데.
아쉬움의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 * *
칠흑을 놓쳤다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나는 테이른, 휴즈와 함께 카오스 필드를 천천히 벗어났다.
언제 놈들의 습격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이동하는 만전을 기했다.
카오스 필드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나서야 우리는 안도할 수 있었다.
중간에 사람 머리만 하게 크기를 확 줄인 미니 사이즈의 벨라시오닉이 튀어나왔다.
-여기서부터는 일반 영역이군.
“근처에 저희 말고 낯선 기척이 느껴지면 언제든 말해 주세요.”
-오냐.
벨라시오닉의 혼은 내 말에 착실히 대답하면서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벨라시오닉에게 잠시 경계를 부탁한 후에 나는 테이른의 몸 상태를 살폈다.
“몸은 좀 어때?”
“많이 괜찮아졌다. 그나저나 칠흑을 없앨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는데……. 내가 괜히 네 발목을 잡은 거 같아 미안하군.”
“미안할 게 뭐 있어? 어차피 데르킨이 나타났을 때부터 이미 기회는 물 건너간 것이나 마찬가지였어.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마.”
데르킨 백작이 가지고 있는 칠흑의 조각을 한 개 없애 버렸다는 것이 소소한 성과라면 성과였다.
벨라시오닉의 혼이 다시 우리에게 다가왔다.
-근처에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군. 안심해도 좋다.
“다행이네요.”
놈들의 목적은 우리가 아니라 칠흑의 회수였나 보다.
테이른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슬슬 나도 떠나야겠군.”
“나울로 오는 건 어때? 어차피 그 몸으로 계속 돌아다니는 건 무리잖아.”
“내가 나울에 머물면 칠흑과 놈들이 끊임없이 너를 괴롭히러 올 거다. 라스나 너나 나나 서로 떨어져 있어야 놈들의 관심을 분산시킬 수 있어. 칠흑은 1차적으로 나를 노릴 거다. 어떻게든 나를 삼키는 것이 놈의 최대 목적이니까.”
칠흑이 완전한 부활을 이루려면 두 가지 전제가 클리어되어야 한다.
첫 번째, 벨라시오닉이 삼켰던 보물들을 되찾아 삼킨다.
두 번째, 최초로 칠흑에게 잠식된 자, 테이른을 삼킨다.
테이른은 칠흑이 지녀야 할 힘의 원천 중 일부를 가지고 있다.
칠흑의 조각의 힘과 칠흑의 힘은 확실히 파워가 남다르다.
칠흑 본연의 힘 중 일부를 지니고 있는 테이른은 칠흑에겐 보기 좋은 먹잇감일 것이다.
그걸 아는 테이른은 일부러 나나 라스의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던 것이고.
칠흑의 어그로 끌기가 테이른의 목적이었던 것이다.
그동안 나와 라스는 힘을 기르면서 칠흑의 세력을 각개격파한다.
이것이 테이른이 그리고 있는 큰 그림이었다.
그래서 나는 억지로 테이른을 나울로 데려갈 수 없었다.
그래도 걱정이 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때마침 휴즈가 테이른의 뒤를 따라 일어섰다.
“혼자서 놈들을 상대하는 건 무리 아닌가? 나도 같이 가도록 하지.”
“나 때문에 자네를 고생시킬 수는……!”
“세계를 지키는 일 아닌가? 이대로 놔두다간 모두가 다 저놈에게 삼켜질 거야.”
휴즈의 태도는 단호했다.
“난 로인과 함께 칠흑에게 삼켜진 세계를 보고 왔어. 그걸 보니 나 혼자 마음 편히 초야에 묻혀 살 수 없을 거 같더군. 그럴 바에야 차라리 싸우다가 죽는 게 속 편해.”
역시 권왕은 권왕이었다.
주먹으로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개척한다, 이것이 휴즈의 방식이다.
테이른은 작게 웃었다.
“예나 지금이나 자네는 똑같군.”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지.”
긴말하지 않아도 친구끼리는 서로 통하는 법이다.
저 둘도 마찬가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