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
칠흑에게 삼켜진 세계 (3)
차원 이동을 할 때 느끼는 그 감각이 다시 한번 나를 엄습했다.
참기 힘든 어지럼증.
시공간의 개념이 사라진 공간을 거치고 난 후에 나는 다시 눈을 뜰 수 있었다.
“콜록, 콜록!”
갈증과 함께 마른기침이 튀어나왔다.
때마침 누군가가 나에게 물을 건넸다.
“마셔라.”
익숙한 목소리였다.
누군지 확인해 보기도 전에 나는 우선 수통을 받아 들고 안에 담긴 물을 미친 듯이 마시기 시작했다.
차원 이동만 했다 하면 항상 갈증에 시달린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지금 갈증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반대로 해석하자면…….
‘차원 이동을 했다는 뜻인데?’
서서히 시야가 회복되기 시작했다.
보라색의 하늘.
그리고 아직 약간 남아 있는 어지럼증.
틀림없다. 이곳은…….
‘카오스 필드 2레벨!’
뒤늦게 나에게 물을 준 남자의 정체를 확인했다.
“카인……!”
“오랜만이군, 편집자 양반.”
대예언자 카인이 나를 향해 옅은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 * *
카오스 필드 3단계에 강제로 빨려 들어가 낯선 차원을 이동한 것도 굉장히 놀라운 체험이었는데, 설마 그보다 더 깜짝 놀랄 만한 사건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카인과의 두 번째 만남.
나는 주변을 살폈다.
근처에는 나와 카인 말고 아무도 없었다.
“스승님은……?”
“거기서 잠깐 기다리고 있어라.”
카인은 그렇게 말하더니 스스로 카오스 필드 3레벨 구역을 향해 이동했다.
저건 미친 짓이다!
말려야 하나?
아니면 그대로 놔둬야 하나?
이지선다의 기로에 서고 말았다.
그러나 선택은 강요될 수밖에 없었다.
말리고 싶어도 이제 막 차원 이동을 한 찰나였기에 몸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카인의 행동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멀리서 카인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지켜보기로 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3레벨에 들어선 카인.
그의 앞에 차원의 균열이 형성되었다.
내가 우르투와 만났던 세계에서 접한 균열과 동일했다.
저기서 낯선 팔이 나와 나를 강제로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 팔의 주인이 설마……?’
그 설마는 카인의 행동을 통해 확신으로 바뀌었다.
균열을 만든 카인은 반대쪽으로 손을 불쑥 집어넣었다.
그런 뒤, 카인은 차원의 균열 안에서 정신을 잃은 휴즈를 균열에서 강제로 끌어냈다.
카인은 휴즈를 데리고 내가 있는 카오스 필드 2단계로 다시 복귀했다.
정신을 잃은 휴즈는 이윽고 천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
“무, 물……!”
“알았다, 알았어. 조금만 참아 봐.”
물을 찾는 휴즈에게 다시 다가간 카인은 미리 챙겨 온 듯한 것으로 추정되는 두 번째 수통을 건넸다.
수통을 건네받자마자 휴즈는 나와 마찬가지로 안에 있는 내용물을 그대로 목 안에 흘려 넘겼다.
꿀꺽, 꿀꺽, 꿀꺽!
소리가 너무 적나라하게 들렸다.
저때의 감각, 나는 아주 잘 알지.
그제야 휴즈는 갈증을 해소할 수 있었다.
“죽다 살았네!”
“이 친구야, 아직 죽기에는 너무 일러. 네가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카인은 자신의 친구인 휴즈의 말에 딴죽을 걸었다.
휴즈는 뒤늦게 카인의 목소리를 알아들었다.
“설마 카인인가……?”
“그래, 나다.”
“세상에! 혹시나 했는데 정말로 카오스 필드에 있을 줄이야! 그보다 아까 로인을 당겼던 그 손의 정체가 자네였나?”
카인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당길 때 예고라도 하도 당겨 주지…….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네.
그래도 카인 덕분에 나와 휴즈는 무사히 델리피나 대륙으로 다시 복귀할 수 있게 되었다.
카인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설마 너희가 다른 차원으로 날아가 버렸을 줄은 몰랐다. 너희를 다시 이곳으로 데려오느라 본의 아니게 힘을 또 낭비하고 말았어.”
카인의 반대쪽 팔에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다시 봐도 칠흑의 힘이 분명했다.
나는 카인의 팔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 힘…… 어찌 된 거지?”
힘의 출처를 알고 싶었다.
카인이 칠흑의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나는 카인이 적군인지, 아군인지 쉽게 구별지을 수가 없었다.
“이 힘, 자네도 알다시피 칠흑의 힘이네.”
“왜 당신이 칠흑이 가지고 있는 힘과 같은 힘을 지니고 있는 거지?”
“그건…….”
카인은 휴즈와 눈빛을 교환했다.
두 사람끼리 무언가 통하는 게 있나 보다.
하지만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예전부터 카인과 알고 지낸 사이가 아니었으니까.
나는 카인에게 당당히 말했다.
“델리피나 대륙을 구해 달라는 말을 듣고 강제로 소설 속 세계로 소환되었는데, 자초지종은 말해 줄 수 있는 거 아닌가? 그 정도는 해 줘야지.”
“……하긴. 자네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군.”
‘맞을지도 모르겠다.’가 아니라 맞다고 이 양반아!
입장을 바꿔서 생각을 해 봐라.
내가 이런 주장을 펼치는 건 굉장히 당연하고 합리적이다.
카인은 쓰고 있던 로브를 벗었다.
그의 얼굴이 정확하게 드러났다.
나이는 꽤 들어 보였다. 휴즈와 비슷한 나이 대였다.
“내가 칠흑의 힘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잠시 말끝을 흐리던 카인은 이내 나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바로 내가 칠흑에게 최초로 잠식된 자이기 때문이다.”
……잠깐만.
그 말은 혹시?
“카인, 당신의 정체는……!”
“그래.”
카인은 힘없이 웃었다.
“테이른. 그것이 내 본명이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그 이름, 테이른.
칠흑에게 최초로 잠식된 남자.
그리고…….
라스의 아버지.
* * *
내 머릿속은 혼란 그 자체였다.
대예언가인 줄 알았던 카인이 사실은 라스의 아버지였다고?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많은데.”
“말해 보도록. 이런 기회는 흔치 않으니 최대한 자네에게 이야기해 줄 수 있는 건 다 이야기해 줄 테니까.”
진작 좀 그런 태도를 보였어야지.
‘왜 이제 와서…….’라고 따지기에는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카인을 두고 그땐 왜 그랬는지 과거의 잘잘못을 일일이 따지기에는 시간이 모자랄 것 같았다.
“칠흑에게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거지?”
“칠흑의 약점이 무엇인지 자네도 아주 잘 알고 있지 않은가?”
“…….”
너무 잘 알아서 탈이다.
화이트 플레임, 글레드다.
“당신도 글레드를 사용할 수 있나?”
“라스나 자네만큼은 아니야. 그리고 내가 글레드의 능력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내 몸속에 아직 남아 있는 칠흑의 잠식을 억제하는 데 전부 사용하고 있는 중이기에 전투에서 글레드를 활용할 수는 없지.”
확실히 부자지간은 부자지간이다.
라스와 같이 글레드의 힘을 사용할 수는 있었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죽은 줄 알았던 테이른이 설마 이런 식으로 살아 있을 줄이야…….
나는 또 다른 의구심이 들었다.
“살아 있었다면 왜 라스 앞에 나타나지 않았지?”
“칠흑에게 잠식당한 것에서 벗어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내가 활동하기 시작했을 때에는 이미 칠흑이 벨라시오닉을 잠식한 상태였고 말이지. 시간이 너무 늦었을 뿐더러 만약 내가 라스의 곁에 계속 머무르게 되었다면…… 과연 소설 속 ‘주인공’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라스는 고난을 딛고 강해진 자, 즉 주인공이자 영웅이다.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겪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라스도 없었을 터.
카인의 말대로 만약 그가 라스에게 다시 돌아갔다면 지금의 라스는 없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납득이 되는 말이었다.
동시에 카인…… 아니, 테이른이 왜 라스의 죽음에 계속 관심을 가지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아버지니까.
테이른은 계속해서 자신의 사정을 설명했다.
“칠흑이 가진 이 힘으로 인해 나는 죽을 뻔도 했지만, 남들이 가지지 못한 ‘힘’을 얻게 되었지. 그중 하나가 바로 예언 능력이고. 칠흑에게 잠식된 와중에 나는 어둠 속에서 이 세계의 미래를 보았지. 물론 좋은 미래는 아니었지만.”
그래서 대예언가로 이름을 날렸던 거로군.
더불어 《델리피나 전기》라는 소설…… 아니, 예언서도 집필하고 말이다.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휴즈는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나도 처음에 테이른과 재회했을 때에는 매우 놀랐지. 설마 이런 상태가 되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으니까.”
그래도 테이른은 휴즈에게 그간의 사정을 어느 정도 알려 줬나 보다.
아니, 알려 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휴즈는 ‘진실의 눈’을 가지고 있으니까.
숨기고 싶어도 휴즈 앞에선 진실을 감출 수 없다.
아무튼 칠흑의 힘으로 테이른은 델리피나 대륙의 미래를 보게 되었고, 그 미래를 바꾸기 위해 나를 이 세계로 끌어들이게 되었다.
여기서 나는 또 다른 질문을 꺼냈다.
“왜 하필 나지? 아니, 질문을 좀 더 구체적으로 바꾸자면…… 왜 하필 ‘다른 세계의 사람’을 끌어들여야만 했지?”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자네에게 정말 뭐라 할 말이 없네. 하지만 난 획일화된 소설 속 이야기의 흐름을 완전히 비틀어 줄 ‘제3의 캐릭터’가 필요했지. 그게 바로 다른 세계의 사람, 즉 너였고.”
의문이 하나씩 풀리기 시작했다.
테이른은 나에게 사과를 했다.
“진심으로 미안하군. 델리피나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자네를 여기까지 끌어들이게 되었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
“뭐, 어차피 벌어진 일이니까. 과거에 연연하기 전에 우선 미래에 닥칠 베드엔딩을 어떻게 해결할지부터 먼저 해결하자고.”
여기에 연결되는 중요한 건수가 있었다.
바로 라스의 암살 사건이다.
테이른은 나에게 다시 물었다.
“정말로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내지 못했나?”
“그건 이쪽이 묻고 싶은 말이라고.”
“자네의 능력 중에서 ‘인물 정보창’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을 텐데. 그것으로도 알 수 없었나?”
“전혀. 그리고 인물 정보창에 나와 있는 정보는 처음부터 모두 공개되지 않아. 갱신되는 형태로 정보가 실시간으로 수정되더라고. 아마 라스를 암살하거나, 혹은 암살하기 바로 직전에 인물 정보가 갱신되겠지. ‘라스를 암살한 자’라는 문구가 추가되거나……. 하지만 그때 가서 확인하면 너무 늦잖아?”
“그렇지.”
테이른은 무겁게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주인공인 라스를 어떻게든 지켜야만 한다.
지금은 그것이 나와 테이른의 공통적인 목적이다.
우리는 다시 한번 서로의 목적을 확인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나는 테이른이 우리의 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인물 정보창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테이른
-인물등급 : 조연
-종합능력 : SSS
-‘카인’이라는 이명을 지니고 대예언자로 활동해 온 남자. 그러나 사실 그의 정체는 칠흑에게 최초로 잠식된 자, 테이른이다. 주인공인 라스의 아버지이며, 현재는 미약하지만 글레드의 힘으로 칠흑의 잠식을 억누르며 어떻게든 라스를 도와주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인물 정보창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테이른이 나에게 알려 준 정보가 모두 사실이라는 건 인물 정보창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아직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
하지만 언제까지 계속 카오스 필드 2레벨에 머무를 수는 없다.
슬슬 카오스 필드에서 벗어나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우리 주변에 검은 연기가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테이른은 검은 연기를 보자마자 이를 악 물었다.
“칠흑……! 설마 여기까지 올 줄이야!”
저 멀리서 천천히 걸어오는 한 남자.
온몸이 새까맣게 물든 칠흑이 우리를 발견하곤 웃었다.
“먹음직스러운 녀석들이 한자리에 몰려 있군. 오늘은 포식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