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
칠흑에게 삼켜진 세계 (2)
우르투는 나와 휴즈를 번갈아 바라보면서 뭔가 다급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email protected]#……?”
휴즈는 살짝 미간을 일그러뜨리면서 말했다.
“뭐라 하는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네.”
부분 부분 들을 수 있는 단어가 있긴 했지만, 빨리 말하니까 도무지 알아들을 방법이 없었다.
나는 일단 배웠던 단어들을 읊었다.
“천천히, 천천히.”
“…….”
일단 우르투를 진정시켰다.
그제야 평정심을 되찾은 우르투.
내가 지시한 대로 천천히 또박또박 말을 했다.
“너, 검은 괴물, 사냥?”
“우리보고 검은 괴물 사냥꾼인지 묻는 거 같네요.”
나는 휴즈에게 대신 해석을 해 줬다.
휴즈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 정도는 해석 안 해 줘도 알아듣는다. 그나저나 여기 사람들은 검은 괴물을 퇴치하고 다닐 만한 능력이 안 되나 보군. 무기는 희한하게 생겼는데.”
위력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그만큼 검은 괴물들 역시 강했다.
저렇게 큰 검은 괴물은 본 적이 없다.
하긴 세계의 절반이 칠흑에게 먹혔다고 했으니, 그만큼 칠흑의 힘도 강할 것이다.
‘이게 세계의 종말인가…….’
그다지 경험하고 싶지 않다.
* * *
검은 괴물들을 한 번 쓸어버린 덕분에 우르투와 피난민들에게 잠시의 평화가 찾아왔다.
우르투는 나와 휴즈에게 극진한 대접을 보였다.
그 증거가 바로 파란색 이온 음료 같은 맛이 나는 음료였다.
“이게 뭐죠?”
나는 이온 음료를 가리키면서 물었다.
우르투는 대충 내 말뜻을 이해한 모양인지 짧게 한 단어를 언급했다.
“베마릉, 맛있다.”
마시는 흉내를 냈다.
추가로 구하기 어려워서 매우 귀한 음료라는 말까지 들려줬다.
이온 음료인 줄 알았더니, 알고 보니 술이었다.
게다가 도수가 꽤 높다.
베마릉을 마신 휴즈는 인상을 팍 구겼다.
“내 취향은 아니네.”
솔직히 말해서 내 취향도 아니었다.
그래도 이곳 사람들에게는 귀한 음료라고 했다.
검은 괴물과의 전투에서 승리했을 때에만 마실 수 있는 일종의 특권이라고 한다.
우리와 다르게 다른 이들은 베마릉을 맛있다면서 벌컥벌컥 마셔 댔다.
나는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아서 딱 한 잔만 비우기로 했다.
우르투는 내 맞은편에 앉아 살짝 취기가 도는 얼굴로 말했다.
“승리. 오랜만. 기쁘다. 희망.”
단어를 조합해 보면 ‘오랜만에 승리해서 기쁘다. 희망이 보인다.’라는 말을 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래도 단어라도 조금씩 알아들으니까 다행이다.
단어마저 몰랐더라면 이런 의사소통조차 주고받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와 휴즈가 계속 이 세계에서 머무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는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
나는 휴즈를 찾았다.
휴즈는 베마릉을 거의 마시지 않아서 그런지 얼굴에 조금의 취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스승님, 저희는 어떻게 돌아가야 합니까?”
“글쎄다. 애초에 카오스 필드를 통해서 차원 이동을 한 경우는 나도 처음이라서 뭐라 말을 못 해 주겠구나.”
휴즈는 카오스 필드 2레벨까지만 다녀왔다고 했다.
그럼 어쩐다, 일단 돌아가긴 해야 할 거 같은데.
‘계획이 완전히 틀어졌네.’
이럴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큰일이다.
* * *
낯선 차원으로 넘어온 지 이틀째를 맞이했다.
베마릉은 도수가 높은 술이지만, 뒤끝은 없었다.
어제 취하도록 마신 사람들은 숙취 없이 멀쩡하게 아침부터 행동을 개시했다.
대단하군, 미래의 술이라는 건.
우르투는 소수의 병력들을 이끌고 지상으로 향하려 했다.
나와 휴즈도 우르투 일행과 합류했다.
어쩌면 지상에 다시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상의 세계는 대다수가 검은 물질에게 잠식되어 가고 있었다.
어제보다 더 심했다.
“…….”
우르투는 말없이 잠식되어 가는 세계를 바라봤다.
무기력하게 지켜만 봐야 한다는 사실이 많이 답답할 것이다.
제3자인 나도 답답한데, 당사자인 우르투와 이곳 차원의 주민들은 얼마나 답답할까?
만약 내가 글레드의 힘을 무제한으로 사용할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그러면 이 차원의 칠흑까지도 다 없애 버릴 수 있을 것이다.
……잠깐만. 글레드라고?
“우르투.”
나는 우르투를 불려 세웠다.
앞서가던 우르투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내 쪽을 돌아봤다.
나는 우르투에게 물었다.
“글레드, 알아요?”
“글레드?”
“예스, 예스. 글레드.”
우르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이 차원의 사람들은 글레드라는 게 뭔지 전혀 모른다.
글레드가 있으면 칠흑에게 허무하게 자신들의 세계를 내주진 않았을 것이다.
우르투와 이곳 차원의 주민들의 모습이 자꾸 델리피나 대륙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칠흑을 저지하지 못하면…….
델리피나도 언젠가는 이들과 같은 신세가 될 터.
‘그러고 싶진 않아.’
어떻게 해서든 다시 델리피나 대륙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칠흑을 쓰러뜨려야 한다.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여기서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내가 쓰러져 있던 장소로 다시 돌아가 볼까?
그곳에 가면 다시 델리피나로 돌아갈 수 있는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휴즈를 찾았다.
그때, 휴즈가 나에게 손을 들어 올렸다.
가만히 있으라는 손짓이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휴즈가 하라는 대로 따르기로 했다.
이유는 나중에 물어보면 되니까.
우르투와 나머지 인원들도 모든 행동을 정지했다.
이들의 시선은 전방으로 향했다.
터벅, 터벅터벅.
천천히 걸어오는 한 남자.
우르투는 남자를 보고서 이를 잘근 깨물었다.
그리고 적의가 가득한 목소리로 남자를 향해 이렇게 외쳤다.
“한스……!”
* * *
처음에는 한스라는 단어가 뭔지 몰랐다.
그러나 잠시 후, 나는 한스가 남자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자는 알아듣기 힘든 언어로 우르투와 뭔가 대화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나와 휴즈는 두 사람의 대화를 해석하기를 포기했다.
어차피 분위기만 봐도 대충 때려서 답을 맞힐 수 있었다.
한스의 주변에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만 봐도 알 것 같았다.
“칠흑에게 잠식된 자인가 보군요.”
휴즈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동의를 표했다.
델리피나에도 저런 사람이 있다.
데르킨 백작이라든지, 루크나 마리처럼 칠흑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등장인물은 델리피나 대륙에도 많이 있다.
여기도 마찬가지다.
한스라 불린 남자의 뒤로 검은 괴물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녀석은 나와 휴즈를 번갈아 노려봤다.
우리가 검은 괴물들을 쓸어버렸다는 정보를 가지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어쩌라고?
한스라는 남자가 칠흑의 앞잡이라면, 우리에게는 결국 적이다.
“스승님.”
나는 휴즈와 눈빛을 교환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휴즈는 알고 있었다.
“이곳 사람들에게 은혜는 갚아야겠지!”
그 말 그대로다.
* * *
한스의 한쪽 팔이 변했다.
기다란 촉수로 변한 팔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한스.
놈의 공격 앞에서 우르투와 병력들의 공격은 속수무책이었다.
우르투와 한스는 서로를 잘 아는 사이인 듯했다.
전투가 벌어지는 와중에도 두 남자는 끊임없이 서로를 향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외쳐 댔다.
물론 뭐라고 하는지는 전혀 모르겠다.
우리는 그냥 싸우기만 하면 된다.
그게 나와 휴즈의 역할이니까.
우르투가 한스를 상대로 시간을 끌어 주는 사이에 나와 휴즈는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검은 괴물들을 쓰러뜨리기 위함이었다.
휴즈의 주먹과 나의 주먹이 검은 괴물들의 심장을 차례차례 박살 내 갔다.
위기를 직감한 한스는 타깃을 나로 변경한 모양인지 내게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나는 코웃음을 치면서 놈의 공격을 튕겨 냈다.
오른손에 맺힌 글레드의 불꽃이 한스의 촉수를 태워 갔다.
“……!”
한스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 세계에는 글레드라는 존재가 없다.
바꿔서 말하면…….
‘글레드에 당해 본 적도 없다는 뜻이겠지!’
처음 당해보는 글레드의 공격에 한수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모르면 뭐다?
맞아야지!
나는 한스의 바로 앞까지 돌진했다.
글레드를 잔뜩 두른 주먹을 휘둘렀다.
정확히 녀석의 안면에 적중했다.
화르르르륵!
글레드의 불길은 한스의 얼굴 반쪽을 태웠다.
재생을 시키려 해도 한스의 신체는 재생될 수 없었다.
글레드 때문이었다.
때마침 모든 검은 괴물을 해치우고 돌아온 휴즈가 뒤에서 한스의 양팔을 붙잡았다.
“지금이다, 로인!”
휴즈가 기회를 만들어 줬다.
스승님이 만들어 준 기회를 날려 버릴 순 없지!
손을 뻗어 한스의 검은 심장을 뽑아냈다.
한스는 고통 섞인 비명을 질러 댔다.
나는 자비 없이 바로 검은 심장을 터트렸다.
재가 되어 사라지는 한스의 육신.
“…….”
우르투는 말없이 한스가 누워 있던 자리를 내려다봤다.
그의 표정에는 많은 감정이 스치고 지나가는 듯했다.
두 사람이 어떤 관계였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알 필요도 없고 말이다.
한스의 죽은 자리에는 글레드의 불길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어째서?’
나도 이해 못할 현상이었다.
우르투는 꺼지지 않는 글레드의 불길을 가리키면서 나에게 물었다.
“이건?”
무슨 기술인지 묻는 행동이었다.
글레드는 언제 어디든 존재할 수 있는 생명의 흔적, 생명의 불씨라고 들었다.
그건 설령 다른 차원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이야기였다.
‘……그렇군.’
나는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 어떤 것인지 깨달았다.
우르투에게 잘 보라는 듯이 손으로 글레드를 가리켰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을 구원해 줄 희망의 불씨야.”
* * *
글레드만 있다면, 이들은 좀 더 수월하게 칠흑에게 저항할 수 있을 것이다.
우르투는 우리에게 정말로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이들은 글레드의 불씨가 남아 있는 곳을 중심으로 끝까지 항전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나는 화이트 플레임이 이들에게 힘을 빌려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우르투 일행과 헤어진 이후, 나는 휴즈와 함께 어느 장소로 향했다.
“여기가 제가 쓰러졌던 장소입니다.”
“이런 곳에서 쓰러져 있었군.”
우리가 처음으로 차원 이동을 한 장소에 가면 다시 델리피나 대륙으로 넘어갈 힌트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첫 번째 시도는 꽝이었다.
“스승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여기서 멀지 않다. 걸어서 5분이면 충분해.”
“그럼 거기도 가 볼까요?”
“그러자꾸나.”
나는 휴즈와 함께 그가 발견된 장소를 향해 나아갔다.
휴즈는 나보다 더 구석진 장소에서 발견되었다.
“여기였는데…….”
휴즈가 주변을 살피는 동안, 내 눈에 이상한 게 보였다.
“이게 뭐지?”
공중에 작은 균열이 보였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그 순간, 깜짝 놀랄 만한 일이 벌어졌다.
“뭐, 뭐야!”
갑자기 균열이 벌어지더니, 사람 손 하나가 튀어나와 내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공포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너무 놀란 나머지 제대로 반응을 하지 못했다.
게다가 힘도 어찌나 센지, 순식간에 나를 균열 안으로 끌어당겼다.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어지러움이 나를 덮쳤다.
그리고 머지않아…….
나는 또 다시 의식을 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