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
칠흑에게 삼켜진 세계 (1)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어디론가 계속해서 이동을 시작했다.
정말 휴즈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 주려는 건가?
‘에이, 설마.’
대충 보디랭귀지로 설명을 하긴 했지만, 내가 해 놓고도 믿음이 잘 안 간다.
그냥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안내하려는 거겠지.
그나저나…….
‘주변이 뭔가 좀 이상한데?’
도시이긴 한데, 건물들이 죄다 파괴되어 있었다.
‘황폐화’라는 말이 잘 어울렸다.
풀이나 꽃 같은 식물들도 보이지 않았다.
여기저기 보이는 검은 물질들도 굉장히 신경 쓰였다.
검은 물질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설마 저건…….’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 우려는 잠시 접어 두기로 했다.
우리는 지하로 향했다.
앞서가던 남자가 불을 켰다.
슈트 자체에 손전등 기능이 내장되어 있었다.
‘엄청 미래지향적인 아이템이네.’
저런 슈트, 예전에 게임할 때 자주 봤었는데. 실제로 보니까 뭔가 기분이 뒤숭숭하다.
동시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는 소설 속 세계가 아니라 게임 속 세계에 떨어지기라도 한 거냐.’
나란 인간은 이런저런 세계에 참 많이 떨어지는 운명인가 보다.
일단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내가 다른 차원으로 휩쓸려 온 건 확실한 듯했으니 말이다.
지하 안쪽으로 계속 들어가던 도중에 앞쪽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꽤 많았다.
지하에 아예 도시 하나를 꾸리고 살아가고 있었다.
‘이건 또 뭐래?’
처음 보는 광경에 할 말을 잃었다.
지상을 놔두고 이들은 왜 지하에서의 삶을 택한 걸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를 데리고 온 자들은 더 깊숙한 곳으로 나를 이끌었다.
내가 향한 곳은 지하 도시 한가운데에 있는 어느 한 건물이었다.
그곳으로 들어서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스승님!”
“로인, 역시 살아 있었군.”
휴즈는 나를 향해 오른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낯선 세계에서 아는 얼굴을 보니까 이렇게 반가울 때가 없었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보다시피. 카오스 필드 3레벨에서 다른 차원으로 휩쓸려 온 모양인가 보다.”
“스승님은 언제 눈을 뜨신 겁니까?”
“너보다 하루 빨리. 이 친구들에게 나랑 비슷한 옷차림을 한 사람이 근처에서 보이거든 이쪽으로 데려와 달라고 했는데 내가 했던 말이 제대로 통했나 보군.”
“스승님은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게 가능합니까?”
“물론.”
갑자기 기대가 샘솟기 시작했다.
역시 권왕이다, 못하는 게 없네.
“그럼 간단하게 의사소통할 수 있는 말이라도 알려 주실 수 있나요? 답답해서요.”
“오냐. 알려 주마. 자, 나를 잘 봐라.”
그러더니 휴즈가 이상한 손 모양을 보였다.
검지와 약지, 그리고 엄지를 펼쳤다.
“이건 ‘앞장서라.’라는 의미의 손동작이야. 내가 정했지.”
“……손동작이요?”
“어. 이름하야 ‘보디랭귀지’.”
“…….”
기대했던 내가 바보였다.
휴즈는 나와 같은 수준이었다.
어쩐지, 대화가 스무스하게 통한다는 말을 할 때부터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런 내 모습을 지켜본 휴즈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반응이 영 별로인데?”
“저는 여기 사람들 언어를 아는 줄 알았어요.”
“몇 개는 알지만 다는 몰라.”
“그럼 이상한 보디랭귀지 말고 그냥 그 단어 몇 개만 알려 주세요.”
“그거야 어렵지 않지.”
한 번 말할 걸 굳이 두세 번 말하게 하는군.
귀찮게 하는 스승님이시다.
* * *
나보다 하루 먼저 이 세계로 넘어온 휴즈.
그는 이 세계가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해 알려 줬다.
“칠흑에게 세계의 절반이 먹혀 버린 차원이더군.”
“어쩐지, 군데군데 검은 연기를 뿜어내는 것들이 묻어 있던데, 그게 칠흑의 흔적이었군요.”
“그렇지. 언제 사람들을 잡아먹을지 모르니까 지하로 대피를 한 거다. 지상은 칠흑에게 거의 빼앗겼다고 봐도 무방하지.”
“여기 있는 사람들이 이 차원에 거주하는 사람들 전부입니까?”
“아니, 곳곳에서 아직도 칠흑을 상대로 항전을 펼치고 있는 무리가 존재한다고 하는데…… 숫자는 그리 많지 않다고 들었다.”
휴즈는 해맑게 웃으며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대로 가다간 이 차원은 머지않아 칠흑에게 삼켜지게 되겠지.”
델리피나 대륙보다 더 최악의 상황이었다.
거기는 그래도 칠흑이 본격적인 활동을 하기 이전이니까.
그러나 여기는 이미 세계의 반이 칠흑에게 먹혀 버렸다.
아이들과 다르게 어른들의 얼굴에는 피곤함에 묻어났다.
계속되는 싸움을 반복하다 보니 피로가 쌓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와 휴즈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한 젊은 남자가 우리를 찾아왔다.
“안녕하십니까.”
나는 남자의 말을 알아들었다.
휴즈가 알려 준 기본 커뮤니케이션 문장 중 하나가 바로 인사말이었다.
나도 이 차원의 언어로 남자에게 답했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로인입니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우르투입니다.”
아주 기본적인 회화들뿐이었다.
‘아임 파인 땡큐, 앤드 유?’ 같은 거라고 보면 될 거 같아.
그 이후에 이어지는 우르투의 말은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우르투를 대신해 휴즈가 설명을 해줬다.
“저 남자는 이곳 피난민들을 이끄는 리더 격인 존재라고 하더군. 나를 처음 발견한 것도 저 우르투라는 남자였다.”
“스승님에게는 생명의 은인인 셈이군요.”
“뭐, 그렇지. 그리고 이야기도 잘 통해. 만약 언어의 장벽만 아니었더라면, 나의 절친이 되었을지도 모를 거다. 하하하!”
이 와중에 휴즈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보통은 다른 차원으로 휩쓸려 오게 되면 당황하기 마련이겠지만 휴즈는 그런 게 없었다.
오히려 낯선 세계가 휴즈에겐 더 안심이 될지도 모른다.
인간 불신에 걸려 초야에 묻혀 살던 휴즈이지만, 이 세계에서는 휴즈가 누군지, 뭐 하는 사람인지 아는 자가 없지 않은가.
마음이 편할 것이다.
우르투는 나와 휴즈에게 손짓했다.
“식사. 이쪽.”
밥 먹으러 오라는 뜻이었다.
우르투는 우리가 알아듣기 쉽게 일부러 쉬운 말을 문장이 아닌 단어만 써서 언급했다.
나와 휴즈는 우르투의 뒤를 따랐다.
식량은 상당히 조촐했다.
미래 시대 식량이라고 해서 잔뜩 기대를 하고 왔건만.
내 눈앞에는 알약 몇 개가 전부였다.
휴즈는 알약을 그대로 삼켰다.
“이걸 먹으면 포만감이 들 거다. 이 차원의 식사라고 생각해라.”
“알겠습니다.”
내가 아이템을 삼킬 때 먹는 환약과 비슷했다.
혹시 이걸 먹으면 레벨 업을 하진 않을까?
이런 기대를 걸어 봤지만…….
-경험치에 변동이 없습니다.
-고등급의 아이템을 삼키시기 바랍니다.
헛된 기대였던 것으로 결론이 났다.
식감은 없지만, 포만감은 확실히 들었다.
휴즈는 추가 설명을 들려줬다.
“이것도 이들에겐 굉장히 귀한 식량이니까 감사하는 표정으로 먹는 게 좋을 거다.”
“알겠습니다.”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이런 선의를 베푸는데, × 씹은 표정을 하면 굉장한 무례로 비칠 테니까.
나는 미소를 유지하며 이들을 바라봤다.
그때, 갑자기 위에서 흙먼지가 우수수 떨어지기 시작했다.
지면이 울렸다.
우르투는 사람들에게 다급히 뭐라고 외쳤다.
우르투의 말에 따라 사람들은 혼비백산하며 피난처로 몸을 숨겼다.
나는 휴즈에게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지상 쪽을 바라보던 휴즈는 침음을 흘렸다.
“놈들이 온다.”
“놈들이라니요. 설마……?”
휴즈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칠흑의 무리다.”
* * *
우르투는 전투원들을 데리고 바깥으로 향했다.
이들이 든 무기 역시 꽤나 미래지향적이었다.
빔 소드 같은 무기라든지, 광선총 같은 것도 보였다.
이런 최첨단 무기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칠흑의 잠식을 막지 못했다.
대신, 마법은 존재하지 않는 세계인 듯했다.
마치 내가 원래 살고 있던 세계처럼.
나와 휴즈도 이들과 함께 바깥으로 나갔다.
지상으로 나온 순간, 나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저것들은 대체 뭐야?”
검은 괴물이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검은 괴물과는 확연하게 다른 모습들이었다.
검은 괴물은 아무리 커봤자 3~4미터 정도밖에 안 된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검은 괴물들은…… 거인족이라 불러도 될 만큼 엄청난 거구들이었다.
몬스터라 봐도 무방했다.
휴즈도 저런 형태의 검은 괴물들은 처음 보는 모양인지 혀를 내둘렀다.
“기가 막히는군. 칠흑에게 잠식된 세계라는 게 이런 건가?”
그야말로 지옥 그 자체였다.
검은 괴물들은 도시를 마구잡이로 파괴하기 시작했다.
아니, 이 세계 자체를 잠식해 가고 있었다.
검은 괴물들의 행보를 막아서지 않으면, 칠흑의 흔적들이 도시를 가득 채울 것이다.
우르투는 병력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email protected]#!”
발사 명령인 듯했다.
병사들은 일제히 사격을 개시했다.
얇은 빔들이 검은 괴물들에게 쏟아졌다.
그러나 검은 괴물들은 꿈적도 하지 않았다.
세계를 잠식시키던 검은 괴물들은 우르투와 병사들의 존재를 뒤늦게 알아차린 모양인지, 이들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검은 괴물 중 한 명이 쿵쿵거리면서 우리들에게 달려오기 시작했다.
움직임이 생각보다 빨랐다.
우르투는 창을 들고서 검은 괴물에게 달려들었다.
다른 병력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검은 괴물의 거대한 팔 앞에 우수수 떨어져 나갔다.
슈트 덕분에 치명상은 면한 거 같지만, 우르투와 병력들의 공격이 통하지 않는다는 건 치명적이다.
휴즈는 내 쪽을 돌아봤다.
“아무래도 우리의 차례인가 보군.”
“그런 거 같군요.”
휴즈와 나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자세를 취했다.
가장 먼저 휴즈가 검은 괴물이 있는 방향으로 쇄도했다.
크게 도약한 휴즈.
순식간에 검은 괴물의 가슴 위치까지 도달했다.
휴즈는 검은 괴물을 상대하는 방식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심장을 노리면 된다.
“허업!”
기합과 함께 휴즈의 팔이 검은 괴물의 가슴팍에 박혔다.
푸우욱!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퍼어어어엉!
검은 괴물의 가슴팍이 폭발했다.
주먹에 마나를 응집시킨 휴즈는 모은 마나를 검은 괴물의 신체 속으로 집어넣어 폭발시켰다.
그 여파로 검은 괴물의 상체가 한쪽이 거의 날아가다시피 했다.
검은 심장이 외부에 또렷이 보였다.
휴즈는 검은 괴물의 반파된 어깨에 올라탔다.
“덩치에 걸맞게 심장도 크군. 하지만 그래 봤자지!”
왼발을 휘둘렀다.
휴즈의 발 차기 공격에 검은 심장을 손쉽게 파괴되었다.
괴성을 지르면서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는 검은 괴물.
놈의 사체는 재가 되어 사라졌다.
‘나도 질 순 없지!’
엑스트라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활약은 주인공 이상으로 해 온 나다.
휴즈한테 뒤쳐질 생각은 없었다.
양다리를 쫙 벌리고서 몸을 고정시켰다.
다수의 적을 한꺼번에 쓸어버릴 때 가장 효과적인 기술이 있다.
바로 ‘용의 숨결’이다.
번쩍!
내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온 굵직한 빛의 기둥이 검은 괴물들을 모조리 쓸어버렸다.
일일이 검은 심장들을 파괴하기에는 너무 귀찮다.
그래서 택한 것이 바로 ‘용의 숨결로 일망타진(一網打盡)’ 작전이다.
작전이라고 할 필요가 있나 싶지만 말이다.
휴즈와 내가 검은 괴물을 모조리 없애 버리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바라본 우르투와 병사들.
이들은 우리를 멍한 눈빛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그들의 반응은 마치 이러했다.
‘신문물을 접한 원시 부족 같은 모습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