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엑스트라-190화 (190/240)

# 190

약한 건 죄가 아니다 (4)

이미테이션을 해제한 나는 사건이 대충 마무리되었을 무렵, 와모르 남작이 부른다는 말을 들었다.

드레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거 봐, 내가 뭐라고 했어, 대장. 그 일 때문에 와모르한테 소환당할 거라고 말했지?”

“제가 잘못한 건 없잖아요. 정체만 안 들키면 됩니다.”

“그야 그렇지만……. 어휴, 이제는 나도 모르겠다.”

와모르 남작이 어떤 이유로 나를 부르려는 것인지 대충 감이 온다.

와모르 남작에게 불만을 품은 시민이 오늘처럼 시위나 과격한 행동을 할 조짐이 보이면 앞으로 우리에게 대신 제압해 달라고 부탁하려고 그러는 거겠지.

‘경비병은 못 믿을 테니까.’

블루로즈단이 가지고 있는 강함의 이미지를 자신의 폭군 정치에 활용하려고 하는 듯했다.

그래도 불렀으니 일단 가 보는 수밖에 없다.

자리를 이동하기 전에 한 명의 손님이 나를 찾아왔다.

“제가 안 좋은 타이밍에 찾아온 거 같군요.”

마일이었다.

그의 손에는 두터운 서류더미가 들려 있었다.

“자료 조사, 다 끝났어?”

“예, 여기 있습니다.”

마일이 건네준 자료를 빠르게 훑었다.

가장 많이 눈에 들어오는 항목은 역시 ‘여자 문제’였다.

와모르 남작은 예쁘다고 불리는 여자들은 죄다 자신의 저택으로 강제로 끌고 갔다고 한다.

첩으로 삼거나 자신의 곁에 두기 위해서. 이게 목적이었다.

와모르 남작이 데려간 여자들의 숫자만 하더라도 20여 명이 넘는다.

그중에는 와모르 남작의 첩이 되는 걸 거부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여인도 있었다.

자살한 여인의 이름은 ‘에들리’였다.

내가 보기에는 검은 괴물을 사냥하기 이전에 와모르라는 남자부터 먼저 처단해야 할 거 같은데.

아까 그 폭행당했던 남자가 차라리 와모르 남작이 준 돈보다 더 많은 돈으로 우리 블루로즈단에게 의뢰를 넣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의뢰 내용은 ‘와모르 남작에게 하늘을 대신해 천벌을…….’이라고 하면 좋을 거 같은데.

나는 드레인의 잔소리가 더 커지기 전에 마일에게 건네받은 자료를 용병에게 건네줬다.

“내 방 책상에다 올려놔 줘.”

“예, 대장님.”

나는 이대로 드레인과 함께 와모르의 저택으로 향했다.

정말 가기 싫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돈을 받았으니 까라면 까야지.

* * *

와모르의 저택에 도착하여 그의 집무실로 향하던 와중에 내 눈에 유독 젊은 하녀들이 많이 들어왔다.

그녀들은 아직 젊고 아리따웠다.

하지만 얼굴 표정은 죄다 어두웠다.

‘와모르 남작에게 어쩔 수 없이 끌려온 여인들인가?’

몇몇은 첩이 되어 있겠지.

참 슬픈 현실이다.

소설 속에서나 보던 귀족의 기행을 이렇게 직접 내 눈으로 보니까 더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보통 이런 상황이 펼쳐지면 주인공이 나타나서 권선징악을 하는데.

정작 주인공인 라스는 기력 회복을 위해 요양 중이다.

뭐, 내가 라스보고 쉬라고 했으니까 할 말은 없지만 말이다.

와모르 남작이 기다리고 있는 집무실에 들어갔다.

그는 방에 들어온 나와 드레인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물었다.

“에나라는 그 여인은 오늘 안 왔나?”

“순찰 중입니다.”

“크흠…… 그렇군.”

티를 내려면 안 들키게 내든가.

이렇게 노골적으로 에나를 노리는 티를 내니까 오히려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이 없어졌다.

와모르 남작은 집사에게 손짓했다.

집사는 우리 앞에 돈다발을 펼쳤다.

“이게 뭡니까?”

“추가 의뢰를 하려고 한다.”

“어떤 의뢰죠?”

“오늘 봐서 알겠지만, 나에게 불만을 가진 몇몇이 저택에서 자주 소란을 일으키곤 한다. 아직까지는 별다른 문제가 없지만, 그래도 나중에 단체로 들고일어날 수도 있지 않겠나? 그러니 그 전에 문제를 일으킬 기미를 보이는 자들이 있다면 블루로즈단이 알아서 처리해 줬으면 좋겠군.”

내 예상대로였다.

드레인은 내 눈치를 봤다.

어떻게 할 것인지 알아서 결정하라는 뜻이었다.

물론 나는 이렇게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드레인은 내가 와모르의 돈을 받을 줄은 몰랐는지, 놀란 눈빛을 애써 감췄다.

방금 전까지 와모르 욕을 그렇게 하던 사람이 와모르의 뜻대로 움직이려고 하니까 이해가 안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생각이 있었다.

“저를 보자고 한 건 이것이 끝입니까?”

나는 와모르 남작에게 아직 할 이야기가 더 남아 있는지 물었다.

그때, 와모르 남작이 이상한 질문을 했다.

“궁금한 게 하나 있다만.”

“물어보시지요.”

“넌 검은 괴물들을 많이 상대해 왔다고 들었다. 칠흑의 조각이라는 것도 많이 봐 왔다고 하더군.”

“예, 지겹도록 봐 왔습니다.”

“듣자 하니, 칠흑의 조각이라는 걸 자신의 것으로 흡수해 그 힘을 본인의 의지대로 컨트롤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인가?”

“…….”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그래도 일단 물어보니까 답은 해주기로 했다.

“예, 그런 존재가 있습니다.”

내가 아는 사람만 하더라도 몇 명 있다.

데르킨 백작, 루크, 마리, 그리고 케프리와 드레드 콤비까지.

……카인도 포함시켜야 하나?

애초에 카인이 칠흑의 조각과 융합된 상태인 건 맞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칠흑의 힘을 쓸 수 있다는 건 칠흑의 조각과 융합하지 않으면 불가능에 가까운데…….

그래도 아직까지 확실하게 밝혀진 게 없으니 카인은 논외로 치기로 했다.

와모르 남작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과연, 그런 용도로도 사용할 수도 있겠군.”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입니다만, 칠흑의 조각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존재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확률로 따지자면 0.000……1%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니 칠흑의 조각을 발견한다면, 혹은 칠흑의 조각이 남작님을 노리고 접근해 온다면, 얌전히 저희를 부르시는 게 좋을 겁니다.”

괜한 짓하지 말라고 간접적으로 경고를 했다.

하지만 와모르 남작은 내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 듯했다.

하긴 남의 충고를 귀담아 들을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마을의 여인들을 멋대로 끌고 오지도 않았을 테지.

와모르 남작은 나와 드레인에게 물러가 보라며 손짓했다.

저택을 나서자마자 드레인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불안한데, 저 사람……. 왠지 사고 한번 크게 칠 거 같단 말이지…….”

드레인도 나와 같은 안 좋은 예감을 느낀 듯했다.

“방금 제가 와모르 남작한테 쓸데없는 짓하지 말라고 말했는데, 들은 척도 안 하는 거 보셨죠? 문제 일으키면 그냥 어쩔 수 없구나 생각하고 가볍게 생각하는 수밖에 없을 거 같아요.”

“진짜 문제아네, 문제아. 가정교육을 어떻게 받은 거야?”

“글쎄요.”

소설책에 안 나와 있어서 난 잘 모르겠다.

“그런데 대장, 추가 의뢰는 왜 받아들이기로 한 거야? 아까 그토록 와모르 남작을 싫어하더니만.”

“아, 그거요?”

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근무 태만 하려고요.”

이름하야 ‘정의로운 근무 태만’이다.

드레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여튼 대장도 지독하네.”

“칭찬으로 들을게요.”

* * *

다시 숙소로 돌아온 나는 마일에게 추가 정보를 의뢰했다.

오늘 경비병들에게 폭행당했던 남자가 누구인지 알아봐 달라는 거였다.

마일은 금방 자료를 조사해 왔다.

울리버라는 이름의 남자였다.

슬하에 딸 한 명, 아들 한 명을 둔 가장이다.

특이 사항이 두 개 있었다.

아내는 5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

그리고 울리버라는 사람은 말을 못한다는 것.

‘청각장애인인가?’

맨 끝에 특이 사항이 하나 더 적혀 있었다.

딸이 반년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딸의 이름을 확인한 순간 나도 모르게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에들리, 이 여자는 분명……!’

와모르 남작의 첩으로 들어갈 운명에 처하자 죽음을 택한 여인의 이름이었다.

‘그랬군.’

울리버라는 남자가 왜 그토록 목숨을 걸고 와모르 남작의 저택 앞에서 시위를 하려고 하는지, 그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되었다.

나는 갑자기 그 울리버라는 사람이 만나고 싶어졌다.

숙소를 벗어나려고 하던 찰나였다.

“어머, 대장님? 어디 가시려는 거예요?”

에나에게 딱 들켰다.

“잠깐 밤 산책 좀 하고 오려고.”

“산책이라고 해 봤자 가게들 다 문 닫아서 볼 것도 없을 텐데요?”

검은 괴물이 나타난다는 소문이 무성하게 퍼지고 난 이후부터 저녁에 문을 여는 가게는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사람 한 명 없는 밤거리도 나름 진풍경이거든. 잠깐이면 되니까 금방 다녀올게.”

“대장님이라면야, 뭐…… 검은 괴물한테 당할 일은 없을 테니까요. 알았어요.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떠나기 전에 에나에게 신신당부를 할 게 있었다.

“맞다. 그리고 나 봤다는 거, 선배한테는 비밀로 해 줘.”

“네? 왜요?”

내가 울리버를 만나러 간 줄 알면 분명 또 잔소리를 하려고 할 테니까.

……라고 말을 하고 싶었으나, 에나는 전후 사정을 몰랐기에 그냥 다른 핑계를 둘러대기로 했다.

“괜한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아서.”

“후후, 알았어요. 정말 좋은 선후배 관계네요. 부러워요.”

거짓말해서 미안해, 에나.

하지만 이게 다 너를 위해서 하는 거짓말이야.

만약 네가 드레인한테 날 봤다고 말한다면 드레인이 너에게 내 거취를 엄청 캐물을 게 뻔하니까.

몰래 숙소를 나온 나는 울리버가 살고 있다고 알려진 집을 향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길거리에 사람들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런 광경은 또 처음이네.’

신기했다.

그만큼 사람들이 검은 괴물을 많이 무서워한다는 증거가 되리라.

‘와모르, 그 작자는 마을의 치안에 전혀 신경을 안 쓰는구나.’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겁을 먹고 있는데 해결할 생각을 안 하고 있다니. 어이가 없다.

이런 현상이 장기화되면,분명 도시 경제에도 악영향을 미칠 텐데……. 관광객도 진작부터 발길이 끊긴 거 같고.

하여튼 문제투성이다.

나는 당당하게 거리를 거닐었다.

검은 괴물이 나와도 딱히 걱정은 없다.

오히려 나와 줬으면 좋겠다.

‘검은 괴물, 본인이 알아서 내 앞에 나타나 준다면야 나야 땡큐지.’

찾을 고생을 덜하게 되는 셈이니 말이다.

하나 나의 이런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대로 쭉 걸어가서 울리버가 살고 있는 집에 도착했다.

“여기군.”

다 허물어져 가는 집이다.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게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다.

“세올라의 집을 찾아갔을 때가 떠오르네.”

그때도 지금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데.

우선 이미테이션을 발동시켜 내 외형을 바꿨다.

아까 울리버를 도와줬을 때 사용했던 노인의 외형이었다.

블루로즈단, 로인으로서 이 집을 방문하면 좋은 소리를 못 들을 거 같기 때문이었다.

나는 문을 살살히 노크했다.

저번처럼 세올라의 집 문을 부술까 봐 최대한 힘을 뺐다.

그러나 노크를 했는데도 반응이 없었다.

다시 한 번 노크를 했다.

이번에도 무반응이다.

‘하긴. 검은 괴물이 나타난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데, 문을 열어줄 리가 없…….’

……다고 생각했는데.

문이 열렸다.

오히려 문이 열려 버리니까 내가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한 소년이 나를 빤히 응시했다.

“……누구세요?”

소년을 딱 보자마자 누군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 소년이 울리버의 막내아들이군.’

자, 가정 방문을 시작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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