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8
약한 건 죄가 아니다 (2)
의뢰를 대신 받아들이겠다는 나의 말에 라스는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저 때문에 그런 민폐를 끼칠 수는…….”
“민폐가 아닙니다. 정식 의뢰니까요. 그러니까 민폐라고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도 제게 들어온 일인데…….”
“괜찮습니다. 지금은 라스 씨가 원래의 컨디션을 회복하는 게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아까 그 남자의 표정을 보니까 엄청 급한 일도 아닌 것 같더라고요. 금방 가서 해결하고 오겠습니다.”
사소한 의뢰에 라스를 움직이게 만들 수는 없다.
라스는 칠흑을 상대해야 하는 중요한 인물이다.
괜히 라스에게 무리한 일정을 강요했다가 그가 목숨이라도 잃게 되면 델리피나 대륙은 끝이다.
칠흑의 의도대로 흘러가게 할 수는 없었다.
나는 남자를 따로 불렀다.
귀족의 대리인으로 찾아온 남자는 이제 내 말이라면 곧이곧대로 따르고 있었다.
“라스 씨는 아직 몸이 제대로 회복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저희 블루로즈단이 그 의뢰를 대신 맡겠습니다.”
“블루로즈단? 방금 블루로즈단이라고 했습니까?”
“네, 모르셨습니까? 이곳 나울은 R팀의 본거지가 있는 도시입니다.”
“그, 그럼 당신이 혹시…… 로인 대장?”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남자는 나에게 대뜸 사과했다.
“모, 몰라 봬서 미안합니다!”
남자는 나에 대해서 익히 알고 있는 듯했다.
뭐,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나도 이제는 유명인사지.
하여튼 잘 됐다.
“우리 블루로즈단이라면 그쪽에서 원하는 검은 괴물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 겁니다. 어떻습니까? 그 의뢰, 우리한테 넘기겠습니까?”
남자는 아직까지도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다.
하긴 원래 의뢰를 맡기려고 한 대상은 라스였으니까.
남자는 어디까지나 와모르 남작의 대리인에 불과하다.
그런데 의뢰를 라스가 아닌 나에게 맡기겠다고 본인이 알아서 결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일단 와모르 남작님께 여쭤보겠습니다.”
“다녀오는 시간만 하더라도 꽤 걸릴 텐데요?”
“통신기가 있습니다. 금방 여쭤볼 수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남자는 주머니에서 작은 구슬을 꺼내 들며 치유소의 한쪽 구석으로 향했다.
저 구슬, 마법사 길드에서 본 적이 있다.
마법사들끼리 원거리 통신을 주고받을 때 사용하는 아이템이다.
꽤 고가에 거래되는 물건이라고 알고 있는데.
와모르 남작이라고 했나? 돈이 꽤 많은 사람인가 보다.
‘소설책에서는 본 적 없는 이름인데.’
뭐, 직접 만나 보면 알겠지.
남자는 통신을 마치고 다시 내게 돌아왔다.
“남작님께서 허락하셨습니다.”
“다행이군요.”
“언제쯤 오실 수 있겠습니까? 남작님께서는 지금 많이 불안해하십니다. 가급적이면 내일이라도 당장 출발해 주셨으면 합니다만.”
“그럼 내일 바로 이동하겠습니다. 메블로라고 했죠?”
“예.”
“거리가 얼마나 됩니까?”
“말을 타고 이동하면 넉넉하게 잡아서 3일은 걸릴 겁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단원들을 꾸려서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도착할 테니, 남작님께는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고 전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남자는 바로 메블로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나와 얼굴을 계속 마주보는 게 부담스러울 거다.
언제 용언 마법에 걸려 또 고통받을지 모를 테니 말이다.
* * *
남자를 보낸 뒤에 나는 R팀 본부로 향했다.
“라비, 가용할 수 있는 용병들 명단 좀 뽑아 줄래?”
“아까 그 의뢰 때문에 그러시는 거죠?”
“어, 일정 넉넉하게 잡아서…… 한 15일은 나울을 비워도 문제가 없을 단원들로만 선정해 줘.”
“알았어요. 사무실로 가져다 드릴게요.”
“땡큐.”
사무원이 있으니까 확실히 편하다.
레드 라인 기사단도 동원할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2기 멤버를 뽑고 있는 중이었기에 이번에는 나울에 그냥 대기시키기로 했다.
새 기수를 뽑는 일 때문에 정신이 없을 테니 말이다.
소설책에서 봤던 내용을 다시금 떠올렸다.
그곳에서 ‘메블로’라는 도시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즉.
‘거기서 강적이 튀어나오거나 그러진 않는다는 소리겠지.’
병력을 많이 꾸릴 필요도 없을 것 같다.
마침 라비가 명단을 가져다줬다.
대부분은 한가해 보였다.
누구를 데려갈까?
병력 선정도 대장으로서 중요한 업무 중 하나다.
그래도 1개 소대 정도는 데려갈 생각이다.
의뢰인이 귀족이기 때문이다.
대리인으로 찾아온 사람만 봐도 자존감이 쩌는데, 의뢰에 3~4명만 데리고 가 봐라.
와모르인지 아모르인지 하는 귀족이 아마 화를 엄청 낼 것이다.
‘보여 주기’식을 생각해서라도 적어도 1개 소대는 데려가야 한다.
그렇다면…….
‘역시 1소대가 좋겠지.’
가르시아가 이끄는 2소대는 파견을 갔다가 이제 막 돌아온 참이라 다시 의뢰로 끌고 가고 싶진 않았다.
드레인이 이끄는 1소대를 데려가기로 결정했다.
여기에 에나 정도만 추가해서 데려가면 될 거 같다.
파이스는 치유소를 지켜야 하고. 반드와 베라는 혹시 모를 추종자들의 침공에 대비해 이곳에 남겨 두기로 했다.
공격도 중요한 만큼 방어도 중요하니까.
게다가 라스가 요양을 취하고 있는 만큼, 나울의 수비벽을 더욱 굳건하게 만들어야 한다.
나는 출전 명단을 작성하고서 라비에게 건넸다.
“내일 바로 출정에 오를 테니까 준비해 두라고 전해 줘.”
“알았어요.”
메블로, 어떤 곳일지 궁금해졌다.
* * *
말을 타고 메블로로 향했다.
생각보다 꽤 큰 도시였다.
현재의 나울과 비슷하다고 봐야 하나?
그러나 내실로 봤을 때에는 나울이 압승이다.
요즘 나울에는 별게 다 있다.
차원 이동 마법 연구소에다가 레드 라인 기사단의 본거지 등등.
그리고 최근에 사업을 확장한 덕분에 여러 상단과 길드 들의 건물이 나울에 무수히 늘어나고 있다.
그렇게 일자리가 많이 창출된 덕분에 나울로 이주해 오는 사람들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덕분에 지금의 나울은 대도시라 불릴 만큼 커졌다.
좋은 현상이다.
와모르 남작의 성으로 가기 위해 메블로의 시내를 지나가던 도중에 나는 이상한 점을 하나 목격했다.
‘사람들의 얼굴 표정이 영 좋지 않은데?’
게다가 나를 굉장히 수상하게 바라봤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나를 수상하게 보는 게 아니라 우리 용병단 전체를 수상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중간에 이런 소리가 들렸다.
“와모르, 그자가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게 분명해……!”
“……망할 녀석! 하늘은 뭐하나, 그런 놈 안 데려가고!”
음, 와모르의 평판이 상당히 안 좋다는 건 알겠다.
무슨 짓을 하고 다녔기에 그러나 모르겠다.
아무튼 우리는 의뢰를 받았으니까, 일단 와모르 남작이 있는 저택으로 바로 향했다.
우리가 왔다는 소식이 벌써 전달된 모양인지 저택 입구를 지키던 경비병은 우리를 바로 안으로 들여보냈다.
저택이 상당히 넓다.
거의 웨일이 살고 있는 저택급이었다.
‘왜 주민들에게 욕을 먹는지 알 거 같군.’
절로 시나리오가 그려졌다.
단어 하나가 머릿속에 절로 떠올랐다.
‘착취’다.
흔하게 볼 수 있는 시나리오지.
소설속이라고 별반 다를 거 없구나.
아니지, 소설이라서 오히려 이런 자가 버젓이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나와 드레인, 그리고 에나만 따로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드레인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까지 여러 귀족의 저택들을 다녀 봤지만, 단언컨대 그중에서 가장 화려한 곳 같아.”
“그 정도입니까?”
“어, 나는 무슨 왕궁 온 줄 알았어.”
확실히 크긴 크다.
그러나 에나에겐 크기가 중요하지 않았다.
“살짝 덥긴 하지만, 그래도 다른 곳에 비해선 추운 편이라 마음에 드네요.”
온도만 낮다면 에나는 초가집이라도 마음에 들어 할 사람이다.
메블로라는 지역 자체가 온도가 좀 낮은 지역에 속한다.
나울에 있을 때에는 티 하나만 입어도 돌아다니기에 충분했는데, 메블로는 두꺼운 털옷 없이는 돌아다니기 힘들 정도였다.
“이쪽입니다.”
젊은 집사가 우리를 이끌었다.
손님접대용 방으로 안내된 우리의 눈앞에 거대한 돼지……가 아니라, 와모르 남작이 모습을 드러냈다.
“반갑군. 내가 바로 와모르 남작이오.”
난 로인이다.
……라고 말하려고 하다가 도중에 관두기로 했다.
귀족 앞에서 자존심 싸움 해봤자 무엇하랴.
쓸데없는 에너지 낭비밖에 안 된다.
“블루로즈단 R팀 대장인 로인이라고 합니다. 이쪽은 부대장인 드레인, 그리고 여기는 제 직속 부하인 에나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와모로 남작님.”
“반가워요.”
드레인과 에나가 순차적으로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와모르는 우리의 인사는 듣는 체 마는 체했다. 대신, 에나를 굉장히 주의 깊게 바라봤다.
“에나라고 했나?”
“예.”
“흐음…… 예쁘군.”
이 한 마디로 나는 와모르 남작이 어떤 사람인지 바로 파악했다.
여자를 굉장히 밝히는, 이른바 호색한이다.
돈 있고 권력 있고 그러면 여자를 밝히곤 한다.
뭐,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몇몇에 해당될 뿐.
에나의 고운 미간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노골적으로 불쾌함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와모르 남작은 에나의 표정 변화가 무엇을 나타내는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한 듯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에나를 두고 올 걸 그랬네.
내 실수다.
와모르 남작이 에나에게 더 관심을 가지기 전에 나는 화두를 돌렸다.
“검은 괴물 때문에 남작님께서 많이 신경을 쓰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만.”
검은 괴물을 언급하니, 와모르 남작은 에나에게서 바로 관심을 거둬들였다.
여자가 좋긴 하지만, 목숨이 걸려 있는 일인데 계속 여자만 밝히고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와모르 남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흠! 그렇지.”
“혹시 저택 안에서 목격된 겁니까?”
웨일 건이 떠올라서 물었다.
잠식된 자가 저택에서 일하는 사람 중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와모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부인은 아닌 거 같더군.”
“내부인이 아니라는 확실한 증거가 있는 것 같군요.”
“…….”
와모르는 우리를 여기까지 안내한 집사에게 눈빛을 보냈다.
이 이상은 집사보고 알아서 설명하라는 듯한 그런 눈짓이었다.
집사는 헛기침을 몇 번 한 이후에 와모르가 내부인이 아니라고 단정 지은 증거를 밝히기 시작했다.
“저택의 담벼락이 무너져 있는 흔적을 여러 차례 발견했습니다. 만약 내부인이 범인이라면, 굳이 담벼락을 넘어 바깥으로 도망칠 필요가 없겠지요. 그래서 남작님은 내부인 중에는 칠흑의 조각에게 잠식된 자가 없다고 확신하고 계십니다.”
일리는 있다. 하지만…….
‘내가 만약에 머리를 좀 굴릴 줄 아는 범인이라면, 일부러 담벼락을 무너뜨린 다음에 내부인은 절대로 아니라고 단정 짓게 만들 텐데.’
즉, 트릭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와모르 남작은 그 부분에 대해선 전혀 의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 듯했다.
오히려 ‘어때. 나, 머리 좀 굴리는 남자야.’라면서 자랑을 하는 것 같다.
와모르 남작이라…….
‘이거, 왠지 의뢰를 잘못 받아들인 거 같은 기분이 드는데?’
라스에게 괜히 내가 이번 의뢰를 도맡겠다고 했나?
갑자기 급격하게 후회가 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