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4
드디어 만나다 (2)
너무 늦은 시간까지 술을 마실 수는 없었다.
나는 체릴에게 슬슬 숙소로 돌아가는 게 어떻겠냐고 말을 전했다.
그러자 체릴은 혀가 꼬인 발음으로 내게 이렇게 말했다.
“저…… 치했나바여…….”
아니, 이 여자가 정말…….
술 얼마 마시지도 않았으면서 벌써 취하면 어쩌자는 거야?
분명 내가 기억하기로는 체릴은 술에 굉장히 강하다고 들었는데.
반쯤 풀린 눈으로 헤헤거리면서 틈만 나면 내 옆으로 와서 안기려고 했다.
‘……수상한데?’
느낌이 온다.
이건 공명의 함정…… 아니, 체릴의 함정이다!
취한 척하면서 은근히 스킨십을 시도한다.
날 유혹하려는 게 틀림없다.
나는 체릴을 부축해 주면서 가게 밖으로 나왔다.
“숙소, 어디라고 했죠?”
체릴은 손으로 맞은편 건물을 가리켰다.
부축한 채로 걷는 건 너무 불편해서 결국 나는 체릴을 그대로 안아 들었다.
마치 기회라는 듯이 체릴은 너무 자연스럽게 나에게 안겼다.
이게 정녕 술 취한 자의 움직임이란 말인가?
체릴이 머무르는 방의 호실을 찾아 움직였다.
302호.
받은 키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 위에 체릴을 얌전히 눕혔다.
“후우! 그럼 난 가 보겠습…….”
“로인 니임!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가시는 거예여?”
그럼 그냥 가야지, 여기서 내가 뭘 어떻게 하란 말인가?
체릴은 손으로 자신의 옆쪽을 가리켰다.
“저랑 가치 자여.”
미안하지만 그럴 생각은 없어요.
《델리피나 전기》는 19금 소설이 아니다.
심의 규정을 엄격하게 준수해야 하는 것도 편집자의 일이다.
나는 체릴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체릴은 기대에 가득 찬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Serpel(잠들어라).”
체릴의 몸이 축 늘어졌다.
음. 효과가 직방이네.
역시 용언 마법이다.
나는 체릴에게 이불을 덮어 준 뒤에 조용히 방을 나섰다.
혹시 칠흑이 근처에 있을지도 모른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에 나는 우선 내 숙소로 돌아가서 대기하기로 했다.
* * *
결국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래도 엄청나게 피곤하진 않았다.
용신단의 효과 덕분이었다.
용신단 덕분에 나는 몇날며칠 잠을 안 자고도 충분히 정상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었다.
나는 체릴이 머무는 숙소로 다시 찾아갔다.
문틈 사이로 편지 하나를 몰래 넣어 뒀다.
바쁜 일이 생겼으니 나 먼저 가 보겠다는 내용을 담은 편지였다.
‘슬슬 갈로아로 가 볼까?’
여기서부터가 본론이다.
말을 타고 갈로아를 향해 나아갔다.
아스툰 다음으로 처음 들렸던 도시, 갈로아.
그곳으로 향하는 길은 내겐 너무나도 익숙했다.
‘반갑기도 하고, 그립기도 하고. 막 그러네.’
뒤숭숭한 기분이었다.
3일 동안 말을 타고 달리고, 혼자서 야영을 하고…… 이런 생활을 반복했다.
드디어 갈로아의 전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얼마 만에 보는 갈로아의 풍경일까?
‘변한 건 없네.’
변두리에 있는 도시라 그런지 크게 달라진 모습을 보이진 않았다.
여기서 조금만 더 들어가면 아스툰이 나온다.
간만에 그곳 사람들도 한 번 볼까? 하고 생각했으나,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선은 카인의 일부터 먼저 해결하고.’
이터블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갈로아에 세워진 이터블은 델리피나 대륙 전체를 통틀어 딱 10번째로 세워졌다고 한다.
최초는 아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최초가 되는 셈이지.’
여기서 나는 처음으로 블루로즈단과 만나게 되었다.
이터블 앞에는 많은 꽃들이 놓여 있었다.
여기까지 왔으니까 나도 한 송이 놓아 둘까.
‘블루로즈단이니까 파란 장미가 좋겠군.’
마침 근처에서 파란 장미를 파는 노점 상인이 보였다.
“파란 장미 있어요?”
“여기 딱 한 송이 남아 있수.”
운이 좋네.
그러고 보니 파란 장미를 구입하는 과정에서 레임스와 시비가 붙은 적이 있었는데.
옛 기억이 절로 떠올랐다.
나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레임스의 최후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내가 좀 더 강했더라면, 레임스가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결과도 없었을 텐데.
나는 파란 장미를 건네받기 위해 손을 뻗었다.
도중에 갑자기 옆에서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이나 지금이나, 그 꽃을 고르는 건 여전하군.”
“……!”
나는 옆을 바라봤다.
낡아빠진 로브를 걸친 한 남자.
얼굴은 확인할 수 없었다.
후드를 눌러 쓰고 있는 탓에 입 부근밖에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계속해서 의미심장한 말을 들려줬다.
“내심 내가 보낸 편지를 잘못 해석해서 다른 곳에 갔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천만다행이군.”
설마.
이 남자가 혹시…….
“카인?”
남자는 씨익 웃었다.
그리고 이렇게 답했다.
“오랜만이군, 편집자 양반.”
* * *
드디어…….
드디어 찾았다, 카인!
“진짜로 당신이 카인이라고? 왜 이제야 나타난 거야! 여태껏 내가 얼마나 고생을……!”
“쉿.”
카인은 내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추종자 녀석들이 근처에 있을지도 모른다. 목소리를 낮추도록.”
“…….”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게 좋을 거야. 괜히 수상쩍은 모습을 보이면 여러모로 골치 아파지니까.”
카인의 말이 옳다.
나는 파란 장미를 들고 이터블 앞으로 걸어 나갔다.
카인도 마찬가지였다.
이터블 앞에 꽃을 놓으면서 나는 작은 목소리로 카인에게 물었다.
“……왜 이제야 나타난 거지?”
“너에게 묻고 싶은 게 있으니까.”
“입장이 뒤바뀐 거 같은데? 묻는 건 나고, 대답해야 하는 건 당신이 해야 할 일 아닌가?”
“4권까지는 그랬겠지. 하지만 5권부터는…….”
카인은 말끝을 흐렸다.
뭐, 아무튼 좋다.
“묻고 싶은 게 뭔데?”
일단 카인이 원하는 걸 들어주고 난 다음에 내 요구를 말하기로 했다.
나는 과연 누가 라스를 암살했을지 이게 가장 궁금하다.
카인이라면 분명 알고 있을 거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했다, 그것도 아주 큰 문제가.
“얼마 전에 네가 차원 이동 마법으로 저쪽 세계에 다녀왔다는 걸 들었다. 책을 보고 왔겠지?”
“어.”
“몇 권까지 보고 왔지?”
“5권 중간까지였을 거야.”
“그렇다면…… 라스가 누구에게 암살당했는지 보고 왔나? 만약 알고 있다면, 나에게도 알려 줬으면 좋겠군.”
가만?
이야기가 뭔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는 거 같은데?
“그건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책을 본 건 맞지만, 라스가 암살당했다는 부분까지밖에 확인을 못했어. 범인이 누구인지 보려고 하는 순간, 강제로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버렸으니까.”
“……이런!”
카인은 난감하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에이, 아니겠지. 설마.
“그쪽도…… 모르는 거야?”
“…….”
카인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왜 말을 안 해, 불안하게.
결국 카인은 최악의 대답을 들려줬다.
“나도 모른다.”
“아니, 잠깐만. 당신이 쓴 책이잖아? 예언서라고 했나? 어쨌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니까 넘어가고. 주인공이 죽는 일인데, 누가 죽였는지 내용 정도는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어야 되는 거 아니야?”
이해가 되지 않았다.
《델리피나 전기》 내용이 그렇게 긴 것도 아니고, 설령 길다 하더라도 주인공이 죽었는데 거기에 관련된 에피소드를 기억 못한다는 게 말이 되나?
어쩌면 이자, 카인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런 의구심마저 들 정도였다.
카인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 갑자기 오른팔의 소매를 살짝 걷어 올렸다.
순간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팔이…… 썩어 가고 있었다.
“보면 알겠지만…… 나에게는 시간이 얼마 없다. 난 과거와 함께 점점 죽어 가고 있지. 《델리피나 전기》를 쓰기 위해 모든 힘을 다 끌어 쓴 탓이야. 이에 따른 반작용으로 내 몸은 쇠약해지기 시작했고, 기억력도 감퇴되어 가고 있다. 《델리피나 전기》의 내용조차 기억나지 않지. 이미 5권 내용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머릿속에서 사라졌어.”
“…….”
작가가 본인이 쓴 소설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는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거짓말처럼 들리진 않았다.
“미래를 보고 온 너라면 라스를 죽인 범인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지. 하지만…… 내 예상이 틀렸나 보군.”
“타이밍이 너무 안 좋았어.”
나에게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더라면.
혹은 라스가 암살당한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차원 이동을 했더라면, 나는 차원 이동을 하자마자 바로 범인의 이름부터 확인했을 것이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둘 다 해당 사항이 없었다.
카인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마지막 희망까지 사라져 버렸다.
이터블에서 잠시 물러난 나는 카인에게 다른 질문을 던졌다.
“왜 하필 나를 골랐지? 많고 많은 사람들을 놔두고 왜 나를 이 세계에 끌어들이게 된 거야.”
“너라면 이곳의 ‘비틀어진 결말’을 올바르게 수정해 줄 거라고 믿었으니까.”
“난 일개 편집자라고.”
“하지만 이야기의 수정은 편집자의 일일 텐데.”
“…….”
정확히 말하자면 작가의 영역이긴 하지만, 정작 작가 본인의 상태가 이러니…….
그렇다면 하다 못해 편집자가 수정을 대신해 줄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방식의 수정은 난생 처음이라고.
“그럼 다른 질문. 왜 여태껏 나를 찾아오지 않은 거야?”
“칠흑에게 쫓기는 몸이니까. 만약 처음부터 내가 너를 찾아갔다면, 넌 힘을 기르기도 전에 칠흑과 맞붙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넌 칠흑에게 잡아먹혔을 거야.”
내가 성장할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 일부러 나와 접촉하지 않았던 건가.
기왕 이렇게 된 거, 평소에 궁금했던 것들을 다 물어보기로 했다.
“칠흑이라는 게 뭐지? 놈의 정체가 뭐야?”
“인간의 부정한 것들이 모여 형상화된 괴물이다. 만약 놈이 델리피나 대륙을 집어삼키는 데에 성공한다면…… 다음 먹잇감은 네가 사는 세계가 될지도 몰라.”
이런 망할! 갑자기 이야기가 차원급 스케일로 커지네.
결국 살기 위해선 여기서 칠흑을 없애야 한다는 거잖아?
다른 질문을 꺼내려고 할 때였다.
카인이 작게 중얼거렸다.
“여기까지인가 보군.”
“뭐? 아직 이야기 안 끝났…….”
내 말은 이어질 수 없었다.
갑자기 등장한 괴한 때문이었다.
거대한 낫이 나와 카인 사이를 갈라놓았다.
“여기 있었군, 카인! 얼마나 찾아다녔다고. 쫓는 우리 입장도 좀 생각해 줘.”
루크였다.
저 미치광이 녀석! 하필이면 이런 타이밍에 나타나냐!
갑작스러운 루크의 등장에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루크만 온 게 아니었다.
추종자들과 검은 괴물들도 사방에서 튀어나왔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이 싸워야만 했다.
루크가 조종하는 낫이 카인에게 향했다.
루크의 목적은 내가 아닌 카인인 듯했다.
나는 그대로 낫을 발로 뻥! 차 버렸다.
궤도에서 벗어난 낫은 빙글빙글 돌더니,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루크는 나를 바라보면서 기분 나쁜 웃음을 흘렸다.
“크큭……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당하기만 하면 너무 재미없잖아. 안 그래? 적어도 살기 위한 발버둥은 쳐 보라고. 그래야 사냥하는 맛이 날 테니까!”
예전부터 느꼈던 건데, 루크가 반드보다 더 중2병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데르킨 백작이나 칠흑이 없다면 충분히 해볼 만하다.
그러나 적들이 너무 많다.
그리고 나는 카인을 지키면서 싸워야 한다.
여러모로 제한이 많다.
어떻게 싸울지 고민하던 찰나였다.
“걱정 안 해도 된다.”
카인은 로브 안에서 나이프를 꺼내 들었다.
자세를 잡으면서 내게 말했다.
“나도 내 몸 정도는 스스로 지킬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