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
대현자 카일루스 (3)
자신의 목숨까지 바치면서 나에게 협조를 구하는데, 솔직히 내가 여기서 뭐라고 더 할 말이 있겠나.
일단 마일을 믿기로 했다.
나는 마일에게 내가 알고 있는 미래의 지식 중 딱히 알려져도 크게 손해 볼 것 없는 것들을 위주로 정보를 전달했다.
내게는 별로 가치가 없는 정보들이었다.
그러나 마일에게는, 아니 베르투의 입장에선 굉장히 높은 가치를 지닌 정보로 분류되었다.
내가 제공한 정보로 인해 마일은 본격적으로 차기 대현자 후보로서 자질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심사를 받을 자격을 거머쥐었다고 했다.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일주일이 소모된다고 했다.
그동안 나는 마일이 건네준 라크스 공작과 웨일의 개인 정보를 샅샅이 살폈다.
그 결과.
‘두 사람도 라스를 배신할 이유가 전혀 없어.’
라크스 공작은 그렇다 치더라도 애초에 웨일은 라스를 죽일 만한 능력이 되지 못한다.
웨일은 재력으로 SSS랭크를 받은 인물이지, 라크스 공작처럼 뛰어난 무술 실력으로 상위 랭크를 받은 인물이 아니다.
돈으로 뛰어난 암살자를 고용하면 된다고 하지만, 라스보다 강한 이를 어디서 구할 수 있으랴.
기껏해야 칠흑의 추종자들, 혹은 라스의 동료들밖에 없다.
‘그렇다면 대체 누구지?’
남은 후보는 한 명뿐이다.
아직 제대로 정보 조사를 하지 못한 레이샤르뿐.
그러나 나는 레이샤르가 라스를 배신할 거란 상상이 잘 안 들었다.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라스를 뒤에서 지원해 준 존재가 바로 레이샤르다.
게다가 레이샤르는 칠흑과 적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라스를 왜 죽이겠나.
‘하, 진짜 머리 터질 것 같네.’
카인, 그 양반은 알고 있겠지?
다음 차원 이동을 기다릴 바에야 차라리 카인을 먼저 찾는 게 더 빠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 아직까지도 카인의 소재지는 정확히 파악되지 않았다.
문제점도, 해결책도 알고 있는데 일이 좀처럼 풀리질 않으니까 참으로 답답하다.
그렇게 답답한 심경과 함께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 * *
치유소에 들른 나는 여전히 의식을 잃은 채 누워 있는 라스를 바라봤다.
‘언제쯤 눈을 뜰 거야, 주인공 양반. 이러다가 대륙 전체가 칠흑에게 먹힐 거라고.’
아직까지는 괜찮지만, 계속 라스가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면 문제가 커진다.
“파이스, 언제쯤이면 라스 씨가 눈을 뜰 거 같아?”
“글쎄요. 저도 정확히 잘 모르겠습니다.”
파이스조차도 라스의 회복 정도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라스라도 빨리 정신을 차려 준다면 좋을 텐데.
나는 파이스의 어깨를 토닥여줬다.
“계속 체크하고 만약 무슨 일이 벌어졌다 싶으면 바로 나한테 보고해.”
“예, 대장님.”
치유소를 나온 이후에 나는 레드 라인 기사단의 본거지로 향했다.
레드 라인에 관련된 사무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나는 새로운 사무원을 고용했다.
이름은 레비.
라비와 거의 흡사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외형도 비슷했다.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다.
두 사람은 쌍둥이다.
라비가 언니고, 레비가 동생 쪽이라고 한다.
내가 레드 라인 기사단을 서포트할 인재를 찾고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라비는 자신의 동생인 레비를 추천했다.
아니, 추천이 아니었다.
강제로 끌고 나왔다.
집에서 빈둥거리는 여동생을 더 이상은 봐주지 못하겠다나 어쨌다나.
그래도 라비를 닮아서 그런지 생각보다 일은 싹싹하게 잘해내는 편이었다.
“기사단장님 오셨어요?”
“안녕, 레비. 많이 바쁘지?”
“언니에 비하면 이 정도는 굉장히 한가한 편이죠.”
레드 라인은 R팀에 비해서 자주 외부 활동을 하진 않는 편이었다.
검은 괴물의 출몰 소식, 혹은 추종자와 연관되어 있는 사건이 벌어질 때만 레드 라인 기사단이 출동했다.
레드 라인 기사단은 칠흑과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을 전담 마크할 목적으로 창설한 조직이다.
처음에는 약간 어수선한 느낌이 있었으나, 지금은 착실히 기사단으로서의 모습을 갖춰 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게럴의 활약에 많이 놀랐다.
처음에는 그냥 입만 산 녀석인 줄 알았는데, 내가 부재중일 때에는 확실하게 부단장으로서의 역할을 소화해 냈다.
덕분에 레드 라인 기사단의 명성은 점점 드높아지고 있었다.
“의뢰 들어온 거, 없지?”
“네, 아직까지는요.”
“다행이네. 언제 또 출동해야 할지 모르니까 기사들한테 평상시에 푹 쉬어 두라고 전해둬.”
“알았어요. 그렇게 전할게요.”
그 다음 나는 R팀 본거지로 향했다.
R팀도 레드 라인 기사단과 마찬가지로 제법 한가했다.
이렇다 할 큰 건수가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첸버가 우리 R팀을 배려한 모양인지, S팀이 많이 활약을 해 주고 있는 상황이었다.
쉬는 기간이라곤 하지만, 그래도 너무 경계심을 늦춰선 안 된다.
라비는 나를 보자마자 대뜸 물었다.
“대장님, 레비는 일 잘하고 있나요?”
“어. 잘하더라.”
“원래 걔가 능력은 좋은데, 의욕이 너무 없는 아이라서요. 게으른 모습 보이면 잔소리 팍팍 날려 주세요.”
“하하, 알았어. 그렇게 할게. 나한테 온 편지 같은 건 없지?”
“체릴 씨가 편지 한 통 보냈는데, 확인해 보실래요?”
또 러브레터인가…… 싶더니만, 그건 아니었다.
지난번의 일로 나에게 1회 데이트 이용권을 받아 내는 데에 성공했던 체릴.
그 기회를 이번에 사용할 심산인가 보다.
“카람의 매직 쇼……가 뭐야?”
“어머, 모르셨어요, 대장님?”
라비는 아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마법 쇼잖아요. 그러고 보니 바로 다음 주에 시작되겠네요.”
“어. 안 그래도 여기에 티켓이 들어 있더라.”
“정말로요? 우와! 대장님, 축복받으신 거예요! 그 표, 구하기가 얼마나 어려운데요! 저도 구하려고 몇 번을 도전해 봤는데……. 아무튼 부러워요!”
그렇게 부럽나?
라비한테 티켓을 양도할까 생각도 해 봤지만, 체릴이 얼마나 화를 낼지 짐작조차 되지 않아서 얌전히 포기하기로 했다.
그리고 체릴이 나를 위해 열심히 도와준 건 사실이니까. 그에 따른 보답은 착실하게 해 줘야 한다.
‘다음 주란 말이지……?’
일단 티켓을 고이 안주머니로 찔러 넣었다.
잠시 R팀 사무실에 들르기로 했다.
문을 열려던 순간.
“…….”
나는 낯선 인기척을 감지했다.
적인가?
하지만 이 기척은 낯이 익다.
과감하게 문을 열었다.
그러자 흰색 가면을 쓴 한 남자가 나를 반겼다.
마일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로인 님.”
“그러게. 정확히 일주일 만이네?”
“예.”
나는 문을 꽉 닫았다.
“결과는 나왔어?”
“나왔습니다. 그걸 보고드리기 위해 일부러 로인 님을 찾아온 겁니다.”
마일은 가면을 벗었다.
“통과되었습니다.”
“그래? 축하해.”
“왠지 별 감흥이 없으신 거 같군요.”
“어차피 거의 결정된 일 아니야? 강력한 라이벌인 티이나가 강제 휴업 상태니…… 누가 네 적수가 되겠어?”
“그렇긴 하죠.”
내가 듣고 싶은 대답은 따로 있었다.
“레이샤르에 관한 정보는? 대현자가 되었으니까 이제 얻을 수 있겠지?”
“엄밀히 말하자면 정식 대현자가 아니라 차기 대현자입니다.”
“그럼 못 얻는다는 거야? 이야기가 다르잖아.”
“너무 성급하지 마시길. 전 ‘안 된다.’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마일은 감추고 있던 서류 뭉치 하나를 꺼내보였다.
“여기 있습니다.”
“이게 레이샤르에 대한 정보야?”
“예, 하지만 앞서 드렸던 분량에 비해 매우 적을 겁니다.”
딱 봐도 알 것 같다.
내가 지금까지 받아봤던 자료들의 5분의 1? 아니지, 7분의 1밖에 되지 않는 듯했다.
드래곤은 인간의 수명에 비해 몇십 배를 살아가는 존재다. 그런데 자료가 이렇게 적을 리가 없다.
왜 이렇게 자료가 없는지에 대해 마일은 해명을 들려줬다.
“드래곤에 관한 정보를 얻기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 정도의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선방했다고 하더군요. 그래도 레이샤르는 나은 편입니다. 인간계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드래곤의 경우에는 이름과 타입, 그리고 현재 나이만 딱 알고 있는 수준입니다. 종이로 정리하면 한 장…… 아니, 반 장 정도밖에 안 나올 정도로 정보가 부족하죠.”
공감은 한다.
드래곤이라는 존재가 인간계에 자주 나타나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그래도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나보다.
“알았어.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추가로 들어오는 정보 있으면 나한테 알려 줘. 레이샤르뿐만 아니라 내가 개인 자료를 요청했던 사람들까지 전부.”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추가로 하나 더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음? 뭔데?”
“카일루스 님께서 로인 님을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카일루스가 누군데?”
나는 전혀 모른다.
소설책에서도 그런 이름을 본 기억이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마일은 내 궁금증을 해소시켜 줬다.
“베르투의 수장입니다.”
“설마…… 대현자?”
“예.”
천하의 대현자께서 나를 보고 싶다고 하다니.
거절할 이유는 없다.
“알았어. 언제 만나는 건데?”
“지금 바로입니다.”
딱!
마일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 신호에 따라 내 사무실 바닥에서 밝은 빛이 새어 나왔다.
이윽고 마일과 같은 가면을 쓴 한 노인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노인은 알아서 자신을 소개했다.
“만나서 반갑소. 대현자 카일루스라 하오.”
이자가 바로 베르투의 수장인가?
말로는 많이 들어 봤는데. 이렇게 대면하는 건 처음이다.
나는 카일루스에게 대놓고 물었다.
“저를 만나고 싶어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게 제일 궁금했다.
여태껏 안 만나 주다가 왜 뜬금없이 만나겠다고 하는가.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기에 카일루스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궁금한 게 있어서 그렇소.”
이 사람도 마일처럼 호기심 덕후인가?
현자들은 왜 하나같이 호기심에 이리도 적극적으로 달려드는지 모르겠다.
“물어보세요. 단, 공짜로 알려 줄 생각은 없습니다.”
당연한 말이다.
카일루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따른 보답은 확실히 하겠소. 내가 묻고 싶은 건 한 가지뿐.”
카일루스는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카인 님과 어떤 관계인지 궁금하구려.”
흘려듣기 힘든 이름을 들은 거 같은데.
카인이라고?
“방금 카인이라고 했습니까?”
카일루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전담하는 분이기도 하오.”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아니, 그러면 지금 카인이 어디 있는지도 알고 있는 거 아닙니까? 카인한테 직접 가서 물어보면 되잖아요.”
“라바인 전투가 벌어지기 이전에 카인 님과의 연락이 두절되었소. 그래서 로인, 당신이 카인 님의 정보를 얻고 싶어 해도 우리 측에서 마땅히 제공할 정보도 없었고.”
대현자조차 모르고 있다니.
카인이라는 양반, 숨어 다니는 실력이 보통이 아니다.
숨바꼭질 세계 대회가 있다면 단연 우승이겠네.
나는 우선 카일루스가 물은 질문에 답하기로 했다.
“카인에게 부탁을 받았습니다. 이 세계를 멸망의 길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단지 그런 관계일 뿐입니다.”
“……그렇군.”
만족할 만한 답변은 안 되었을 것이다.
그래도 이게 사실인 걸 어찌하랴.
이제는 카일루스가 내게 보답을 해야 할 차례다.
“이걸 받으시오.”
“이게 뭡니까?”
편지 봉투였다.
“카인 님이 당신에게 전해 달라고 나에게 부탁한 물건이오.”
카인이 나에게 보내는 두 번째 편지.
이번에는 또 어떤 내용이 담겨져 있을지가 벌써부터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