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엑스트라-181화 (181/240)

# 181

대현자 카일루스 (2)

이른 아침, 나는 갑작스레 느껴지는 낯선 인기척에 눈이 떠졌다.

방에 나 말고 누군가가 있다!

‘칠흑의 추종자인가!’

이불을 그대로 걷어 내며 바로 주먹을 휘두르려 했다.

그러나 내 주먹은 상대방의 바로 얼굴 앞에서 일시 정지할 수밖에 없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로인 님.”

가면을 쓴 마일이 내게 태평하게 아침 인사를 건네 왔다.

“이건 또 뭐냐? 현자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신종 아침 인사법이야?”

“티이나라는 현자를 기억하십니까? 그 현자가 가끔 라스 님을 놀려 먹을 때 사용하는 방법이라고 합니다. 근데 이렇게까지 효율적일 줄은 몰랐군요.”

“그 말은…… 너도 나를 놀려 먹으려고 일부러 이런 짓을 저질렀다는 뜻 아니냐?”

“그럴 리가요. 로인 님이 얼마나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지 테스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오늘은 제가 왔지만, 저 말고 정말로 칠흑의 추종자가 이곳에 서 있었을지도.”

“서 있을 이유가 전혀 없지. 무슨 합체 로봇이 합체할 때까지 얌전히 기다려 주는 악당도 아니고. 그냥 바로 날 죽이려고 들었을 거다.”

“로봇? 그건 또 뭡니까?”

“몰라도 돼.”

마일의 호기심을 자극하면 골치 아프다.

나는 재빨리 화두를 다른 것으로 돌렸다.

“왜 찾아왔는데?”

“어제 저한테 따로 부탁하신 일이 있지 않습니까? 라스 님의 일행분들을 조사해 달라고.”

“아, 그랬지.”

시켜 놓고 깜빡 잊고 있었네.

요즘 신경 써야 할 일이 한두 개가 아니다 보니 나도 모르게 이렇게 깜빡할 때가 종종 있다.

편집자 일을 할 때에도 나왔던 안 좋은 습관인데.

“여기 있습니다.”

마일이 건넨 두꺼운 종이 더미들.

생각보다 많았다.

“이게 엔드라, 카이딘, 엘라시아, 릴리안. 이렇게 네 사람의 몫이지?”

“아니요. 한 사람 분량입니다만.”

“뭬야?”

나도 모르게 되물었다.

마일이 살짝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자 가려져 있던 종이 뭉치들이 탑을 이루고 있었다.

말 그대로 ‘오 마이 갓!’이다.

“분량이 조금 많습니다, 로인 님.”

“조금이 아니잖아.”

저게 어딜 봐서 ‘조금’이란 말인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침부터 꼼짝없이 종이 속에 파묻히는 신세가 되겠군.

시작이 영 좋지 않다.

* * *

카이딘을 시작으로 엘라시아, 엔드라, 그리고 릴리안까지.

그 동안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던 그들의 과거를 모조리 살폈다.

정말 사소한 것까지 다 조사했다.

‘카이딘의 여자 취향 같은 건 필요 없고.’

그나저나 취향 참 특이하군.

수비 범위가 너무 광범위하다고 해야 할까?

‘취향은 존중해야 한다.’라는 말이 있지만…… 솔직히 난 이해 못 할 것 같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가 않다.

카이딘은 특별히 문제가 없어 보였다.

오히려 라스를 생명의 은인으로 생각하면서 그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었다.

엘라시아와 엔드라도 마찬가지였다.

엘라시아는 본인이 말했듯이 라스에게 딱히 원한을 살 만한 일이 없었다.

엔드라는 오히려 카이딘과 같은 케이스였다.

라스가 그를 위기에서 구해 준 덕분에 동료로 합류했다.

물론 엔드라의 목숨을 구해 준 장본인은 사실 바로 나지만 말이다.

자료의 분량이 가장 적은 건 역시 릴리안이다.

실험실에서 계속 실험체로 이용만 당했으니, 과거랄 게 딱히 없었다.

그리고 릴리안은 히로인이다.

라스에게 동료 이상의 감정을 서서히 느끼는 중일 터인데 그를 죽인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일단 자료들로만 봤을 때에는 이 네 사람은 무죄다.

원래 이런 건 판사가 판결을 내려야 하지만, 없으니까 내가 임시로 내리기로 했다.

이다음이 필요하다.

나는 베르투의 수첩으로 마일에게 지금 당장 내 사무실로 튀어 오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5분 뒤, 마일은 가면을 쓰고 다시 내 앞으로 나타났다.

“부르셨습니까, 로인 님.”

“실내인데 왜 가면을 쓰고 있어?”

현자들의 가면은 자신의 정체를 다른 사람에게 감추기 위해 쓰는 일종의 장치다.

반대로 말하면, 아는 사람만 있는 공간에선 굳이 가면을 쓸 이유가 없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실제로 마일은 그래 왔다.

내 앞에서는 가면을 줄곧 벗어 왔으니 말이다.

“사정이 있습니다.”

“무슨 사정인데? 얼굴에 여드름이라도 났어?”

“아니요. 로인 님이 저를 너무 자주 부르셔서 표정 관리가 잘 안 되더군요. 그래서 그걸 감추기 위해 가면을 쓰고 있는 겁니다.”

“……그런 말을 할 거면 왜 쓰고 있냐?”

이미 속내를 다 말해 버렸잖아.

가면의 의미가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마일은 여전히 가면을 벗지 않았다.

“아무튼 이번에는 또 무슨 일로 저를 부르셨습니까?”

“세 명만 더 조사해 줘.”

“그분들 말고 다른 사람들입니까?”

“어. 라크스 공작하고 웨일,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사람이 아니야.”

“…….”

마일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마치 뭔가 알고 있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레이샤르군요.”

“엥? 알고 있었어?”

“예, 인간으로 둔갑하고서 로인 님과 자주 만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역시 현자다.

솔직히 나는 마일이 모를 줄 알았다.

그래서 레이샤르에 관한 건을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루 종일 고민했는데.

“드래곤의 위치, 그리고 상태는 예의 주시하고 있어야 합니다. 드래곤이 한번 변덕을 부리는 순간, 델리피나 대륙 전체가 불바다가 될 테니까요.”

“하긴 그 말도 맞네.”

드래곤은 강력한 우군이면서도 동시에 위험한 존재다.

베르투가 드래곤의 소재지를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있지 않으면 곤란하다.

그래야 문제가 생겨도 미리 대응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라니, 어떤?”

“라크스 공작과 웨일은 조사할 수 있습니다. 워낙 유명한 분들이니까요. 하지만 레이샤르의 조사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한계라는 게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겠는데.”

“드래곤의 정보는 베르투 내부에서도 대현자만 다룰 수 있는 특급 기밀입니다. 48현자인 저로선 드래곤의 정보를 얻어 낼 수 없습니다.”

이러면 좀 곤란한데.

정보가 있긴 한데, 그걸 공개할 수 없다니, 납득이 가면서도 한편으로는 골치가 아파 왔다.

“대현자만 드래곤의 정보를 알고 있다고 했지?”

“예.”

“그러면 그 대현자라는 사람을 내가 만나면 되는 거 아니야?”

“그건 불가능합니다.”

“왜? 함부로 안 만나 주는 비싼 몸이라도 돼?”

“대현자님을 만날 수 있는 존재는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로인 님이 저희 베르투를 위해 희귀한 정보를 많이 주시긴 하셨지만, 아직 대현자님을 만날 수 있는 단계까지는 아닙니다.”

마일리지 많이 쌓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결제하려고 보니까 마일리지가 부족하다는 통보를 받은 기분이었다.

“정보를 얻어 낼 다른 방법은 없어?”

“있습니다. 단, 로인 님의 ‘적극적인’ 협조가 필요합니다.”

유독 ‘적극적인’이라는 단어를 강조했다.

수상한데……?

일단 방법이 있다고 하니 들어 보기나 하자.

“무슨 협조를 해야 하는데?”

“도와주시겠습니까?”

“도와줄게.”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저를 도와주시겠습니까? 만약 여기서 ‘Yes’라는 선택지를 고르게 된다면, 돌이킬 수 없습니다.”

“…….”

이 녀석, 파랑새의 버릇이 옮기라도 했나?

두 번이나 묻고 그러네.

게다가 아주 강력하게 경고하기까지 했다.

이렇게까지 말하니까 잠시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흐음…….

“내가 엄청나게 손해 봐야 할 일이라도 돼?”

“아주 넓은 범위로 말하자면 그렇죠. 손해라기보다는 수고스러움을 좀 겪으셔야 합니다.”

“대현자라는 자를 찾아가서 강제로 탄핵시키기라도 해야 하나?”

“베르투는 아주 평화로운 시스템을 채용하고 있습니다. 그런 발상은 야만인들이나 하는 거죠.”

……난 졸지에 야만인이 되고 말았다.

마일 이 녀석, 요즘 들어서 나 놀려 먹기에 맛이 들렸나, 절묘하게 나를 까네.

마일은 문이 제대로 잠겨 있는지, 그리고 창문이 제대로 닫혀 있는지 확인했다.

다른 사람이 들어서는 절대로 안 되는 말이라도 하려는 듯이 보였다.

“베르투의 시스템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는 로인 님도 아실 거라 믿습니다.”

“어, 알지. 자세히는 몰라도 시스템 자체는 아니까.”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마일은 천천히 가면을 벗었다.

그는 여태껏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쪽 입꼬리만 올라간 기묘한 미소.

눈을 가늘게 뜨면서 나에게 이런 제안을 해 왔다.

“저는 대현자가 될 겁니다. 로인 님이 저를 도와주십시오. 만약 협조해 주신다면, 레이샤르의 정보를 제공할 것을 약속하겠습니다.”

이 자식…….

야망 쩌네.

* * *

마일과 나는 작전을 하나 세우기로 했다.

이름하야 ‘마일, 대현자로 만들어 주기!’ 작전.

내용은 간단했다.

“로인 님이 알고 계시는 고급 정보를 저한테 다량으로 넘겨주시면 됩니다. 잊으시면 안 됩니다. ‘다량으로’입니다. 한두 개 가지고는 모자라니까요.”

“대현자는 실적제라고 했지?”

“예, 그리고 마침 지금이 적기입니다.”

“적기라고?”

“저와 차기 대현자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현자가 바로 티이나거든요.”

“……아!”

그랬었지. 잠깐 잊고 있었다.

티이나에게 정보를 제공해 주는 남자, 라스가 지금 치유소에서 안정을 취하고 있다.

이때까지 티이나는 정보를 얻지 못한다.

즉, 강제 휴업이다.

이 틈을 노려 마일은 정보력을 앞세워서 자신이 대현자의 자리를 굳히려고 할 생각이었다.

작전은 괜찮다.

하지만…….

‘주인공의 기회를 내가 빼앗아 가도 괜찮을까?’

이게 걱정이다.

원래 내가 없었더라면 소설 속에서 라스의 파트너인 티이나가 대현자로 올라선다.

나와 마일은 속칭 ‘빈집털이’를 하는 것이다.

우리 작전이 제대로 통한다면, 티이나를 대신해 마일이 대현자가 될 것이다.

과연 이게 정답일까?

오래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라스를 살리기 위한 일이잖아! 찔리더라도 일단 이 기회는 내 것으로 가져와야 해!’

결국 나는 마일에게 협조하기로 했다.

단, 얌전히 협조해 줄 생각은 없었다.

“나와의 계약을 어기면 어떻게 할 거지?”

“저를 못 믿으십니까?”

“어.”

난 친구들한테 돈도 안 빌려주는 사람이다.

아무리 마일과 돈독한 사이라 하더라도 집고 넘어가야 할 건 확실하게 집고 가야 한다.

마일이 ‘정보 먹튀’라도 하면, 나만 손해 보는 게 아닌가.

“그럼 이걸 드리겠습니다.”

마일은 상의 주머니에 꽂혀 있는 만년필 한 자루를 건넸다.

“이건 또 뭐야?”

“‘데스 펜’이라는 아이템입니다. 데스 펜의 끝에 대상의 혈액을 묻히고 그자의 본명을 쓰면, 원하는 시간과 원하는 타이밍이 대상을 죽일 수 있는 아이템입니다.”

무슨 데×노트냐? 아니지, 데스 펜이라고 했나?

“현자들은 하나씩 다 가지고 있는 아이템입니다. 이건 제 혈액을 담은 유리병입니다. 만약 제가 로인 님과의 약속을 어길 것 같다 싶으시면…… 데스 펜에 혈액을 묻혀 제 이름을 적으시기 바랍니다.”

“네 본명이 마일이야? 그거, 코드네임 아니었어?”

“본명까지 알려 드리겠습니다. 제 이름은…….”

마일의 본명은 처음 들어 본다.

“클라우드 이튼입니다. 의뢰인에게 처음으로 제 본명을 공개하는군요.”

-띠링! 마일과의 친밀도가 초대량 상승합니다.

-마일과의 친밀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친밀도 올라가는 타이밍이 좀 이상한데?

그래도 뭐…… 상관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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