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3
스카이 랜드 (3)
라스의 돌진을 막을 이는 아무도 없었다.
추종자들이 아무리 그의 앞을 가로막으려 해도 라스의 불길은 모든 것을 태울 기세로 뿜어져 나왔다.
추종자 중 한 명이 크게 외쳤다.
“녀석들을 풀어라!”
“하지만……!”
“놈들은 너무 위험합니다! 아직 제대로 잠식되지 않아 저희의 통제에 따르지 않습니다!”
“상관없으니까 어서 풀기나 해! 저놈을 칠흑님께 접근시키지 않게 만드는 것이 우리의 임무라는 걸 잊었나!”
“아, 알겠습니다!”
얼마나 위험한 존재들이기에 칠흑의 추종자들조차 의견이 갈리는 걸까?
갑작스럽게 지면이 크게 울리기 시작했다.
쿵, 쿵, 쿵!
흔들림은 점점 라스 일행에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카이딘은 혀를 찼다.
“칫, 안 좋은 예감이 들어.”
“이미 적진 한복판에 들어온 순간부터 안 좋은 예감은 시작된 거 아닙니까?”
엔드라의 말이 옳았다.
스카이 랜드에는 라스 일행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많은 적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솔직히 이건 라스도 예상치 못했다.
그래도 칠흑을 없앨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는데 눈앞에서 놓칠 순 없었다.
쩌저적!
나무들이 무언가의 힘에 짓눌려 쓰러졌다.
양쪽에서 덮쳐 오는 거대한 괴수 몬스터.
엘라시아가 활을 장전하면서 몬스터의 이름을 읊었다.
“델타드롭. 대형 몬스터 중에서도 포악하기로 유명한 녀석이에요.”
한 마리 상대하기에도 버거운 델타드롭이 자그마치 여덟 마리나 등장했다.
게다가 평범한 델타드롭도 아니었다.
안 그래도 흉악한 공격성이 2배, 아니 적어도 5배 이상은 되어 보였다.
그들은 주변에 있는 추종자들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악!”
“사, 살려……!”
무참히 죽어 가는 추종자들.
살육에 미쳐 있던 델타드롭들은 뒤늦게 라스 일행을 발견했다.
카이딘은 쌍검을 꺼내 들면서 라스에게 외쳤다.
“어쩔 거냐, 라스! 이대로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건 미친 짓이라고!”
“여기에 발을 들여놓은 것도 충분히 미친 짓이야.”
한번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 한다.
라스는 오른손으로 지면을 내려쳤다.
그러자 델타드롭이 서 있는 곳에서 강한 불기둥이 치솟아 올랐다.
사방에서 퍼지는 델타드롭의 굉음.
그것은 불에 타들어가는 고통에 견디지 못하고 새어 나오는 고통의 신음이었다.
단 한 번의 일격으로 칠흑의 조각과 융합한 여덟 마리의 델타드롭을 순식간에 소멸시켰다.
카이딘은 멍한 시선으로 라스를 바라봤다.
“……진짜 미친놈이 따로 있었네.”
라스의 강함은 동료들조차도 혀를 내두르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 * *
추종자와 검은 괴물들을 차례차례 없애면서 앞으로 전진하는 라스 일행.
스카이 랜드를 휘젓고 다니는 이들의 활약에 새로운 적이 등장했다.
“저번에 봤던 그놈들이잖아?”
얼굴의 반이 검은 연기에 잠식된 남자, 루크.
그의 곁에는 마리와 다수의 추종자들도 있었다.
라스는 루크와 마리를 차례차례 훑었다.
“네놈들이 여기에 있다는 건, 자기가 정의의 사도인 척하는 그 빌어먹을 백작 녀석도 있다는 뜻이군.”
반대쪽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답이다.”
데르킨 백작.
그는 굳은 얼굴을 한 채 라스 앞에 등장했다.
“이런 식으로 또 만나게 될 줄이야. 역시 자네와 나는 이럴 운명인가? 하늘이 원망스럽다고 느껴지는 건 오랜만이군.”
“혼자서 많이 원망해. 나는 전혀 원망스럽지 않으니까.”
“아직도 우리의 원대한 꿈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가?”
“꿈이 아니라 세계 멸망 계획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싶은데.”
혼돈을 통한 세계의 올바른 정립.
이것이 데르킨 백작이 노리는 것이다.
라스는 그의 생각에 동의할 수 없었다.
애초에 라스가 칠흑과 같이 행동하는 자의 말을 들을 리가 없지 않은가?
라스의 손에 불덩이들이 형성되었다.
“우리 사이에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 없다고 보는데. 안 그런가.”
“하긴, 듣고 보니 자네 말이 맞군.”
데르킨 백작도 능력을 발동시켰다.
일곱 번째 조각, 샤크(Shark)가 소환되었다.
델타드롭보다 큰 덩치를 자랑하는 검은 상어가 라스를 향해 날카로운 이빨을 자랑했다.
금방이라도 집어 삼킬 것 같은 거대 상어 앞에서 라스는 주눅 들지 않았다.
오히려 상어를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화르르르륵!
강력한 화기가 상어를 덮쳤다.
데르킨 백작이 소환한 샤크는 수 속성을 지닌 소환수다.
불 속성 공격은 통하지 않는다.
상식적으로는 그렇다.
하나 라스의 불은 상식조차 뛰어넘었다.
물조차 집어삼키는 게 바로 라스의, 불 그 자체인 인페르노 하트의 능력이다.
불길에 휩싸인 샤크는 검은 연기의 형태로 흩어졌다.
데르킨 백작은 쓴 웃음을 지었다.
“자네는 나를 참 곤란하게 만드는군.”
“나한테는 그 말이 최고의 칭찬이야.”
데르킨 백작과 라스가 전투를 벌이는 동안 루크와 마리, 그리고 추종자들도 행동을 개시했다.
카이딘은 쌍검을 힘 있게 쥐면서 외쳤다.
“저 낫 든 놈은 내가 맡을게! 나머지는 너희들이 알아서 분배해!”
“그럼 저 괴물 여성은 제가 상대할게요!”
엘라시아가 마리를 마크하기로 했다.
엔드라와 릴리안은 일대일보다는 후방 지원 포지션을 맡는 게 훨씬 편했다.
릴리안은 카이딘과 엘리시아에게 각각 원하는 버프를 걸어줬다.
“버프 줄 테니까 마음껏 싸워!”
“앵글 브릿지 건널 때에는 안 주더니만!”
“그때와 이때는 상황이 많이 다르잖아!”
“융통성 쩌네!”
카이딘의 쌍검과 루크의 낫이 정면충돌했다.
까아앙!
귀가 찢어질 듯한 충돌 음이 주변에 퍼져 나갔다.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루크의 낫.
그럼에도 카이딘은 어렵지 않게 루크의 공격을 전부 받아쳐 냈다.
루크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오호, 제법인데? 상대가 로인이 아니라서 맥이 잔뜩 빠져 있었는데. 싸울 맛이 나게 만드네!”
“로인, 그자가 대단하긴 하지. 그렇지만 나도 네까짓 놈한테 얕보일 정도는 아니야!”
대등하게 맞붙는 카이딘과 루크에 비해, 마리 쪽은 한쪽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양상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엘라시아가 소환한 정령들이 마리를 정신없게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잇, 귀찮은 녀석들!”
마리의 칼날 채찍이 정령들에게 향했다.
그러나 잊어선 안 될 게 있었다.
마리가 싸우고자 하는 건 정령들이 아니다.
바로 엘라시아다.
“한눈팔지 마세요. 그러다가 저한테 당할 겁니다.”
“……!”
엘라시아가 바로 등 뒤에 접근했다.
그때까지 마리는 엘라시아의 기척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스윽!
엘라시아의 단검이 마리의 옆구리를 크게 베었다.
물리적인 상처는 금방 낫게 만들 수 있지만, 계속 이런 식으로 유린당하면 제아무리 마리라 하더라도 힘들다.
“루크! 저 엘프 년, 혼자서 상대하기에는 너무 버거워요! 좀 도와주세요!”
그러나 루크도 도와줄 여력이 안 된다.
카이딘 한 명 마크하는 게 고작이었다.
이대로 라스 일행이 루크와 마리 일당을 제압한 후에 라스와 힘을 합쳐 데르킨 백작을 친다면 승산이 있을 터.
하나 망각해서는 안 된다.
이곳에 있는 건 데르킨 백작 일행만이 아니라는 것을.
“도움이 필요한가 보군.”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마리와 엘라시아의 관심을 끌었다.
흑색 장발의 남성이 엘라시아를 빤히 응시했다.
“하이 엘프라…….”
남성의 입이 쩌억 벌어졌다.
“맛있어 보이는군.”
“엘라시아 양! 녀석한테서 떨어지세요!”
엔드라가 빠르게 언령술을 발동했다.
그가 새긴 다수의 문자가 흑발의 남성에게 쏘아졌다.
퍼버버버벙!
그러나 남성은 그 폭발 속에서도 온전히 살아 있었다.
엔드라는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말도 안 돼……!”
“뭐가 말이 안 되지? 방금 그게 네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공격이었나? 그렇다면 충격 받을 만하군. 너무 약해. 삼키고 싶다는 생각조차 안 들 정도로 약해 빠졌어.”
이들은 남자의 정체가 뭔지 알 것 같았다.
카이딘은 뒤로 물러서며 진영을 가다듬었다.
“칠흑……!”
침음을 삼킨 카이딘은 라스에게 외쳤다.
“라스! 언제까지 그놈하고 소꿉놀이나 하고 있을 거냐! 네가 그토록 찾던 녀석이 여기 있다고!”
“기다려, 바로 갈 테니까!”
화기를 모았다가 한꺼번에 터트린 라스는 일시적으로 데르킨 백작의 소환수들을 무력화시켰다.
그런 뒤에 칠흑에게 바로 달려들었다.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칠흑!”
“오랜만에 보는군. 어디…….”
칠흑의 한쪽 입꼬리가 위로 향했다.
“내 식욕을 얼마나 자극시킬 수 있을지, 한번 보도록 할까?”
* * *
라스와 칠흑의 싸움이 펼쳐졌다.
라스는 아껴두었던 비장의 수단, 글레드를 꺼내 들었다.
생명의 불씨를 이용해 사정없이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칠흑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입을 벌려 그가 먹었던 것 중 하나를 토해 냈다.
검은 연기에 물든 오우거 몬스터가 튀어나왔다.
오우거 몬스터는 글레드를 맞고 바로 소멸되었다.
검은 괴물이 된 오우거는 라스를 쓰러뜨리기 위해 토해져 나온 게 아니었다.
그저 글레드를 막는 일회용 방패로 써먹기 위해 불러낸 것이다.
“크윽!”
라스는 계속해서 화이트 플레임을 날렸다.
하나 칠흑은 먹은 것들을 계속해서 토해 내며 라스의 일격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그러는 사이에 데르킨 백작의 소환수들이 라스를 노렸다.
라스는 왼손에 맺힌 글레드를 얇게 펴면서 방어막을 만들어 냈다.
라스의 동료들이 그를 돕기 위해 공격을 감행했으나, 칠흑의 검은 연기 앞에서는 모든 공격이 무효화되었다.
승리의 여신은 더 이상 라스를 위해 웃어 주지 않았다.
게다가.
‘글레드를 너무 낭비했어!’
라스의 호흡은 점점 거칠어졌다.
글레드는 강한 공격 수단이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용하는 데에 있어서 제약이 걸려 있다.
생명의 불씨를 사용하기 위해선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 대가는 바로…….
자신의 생명력을 불태우는 것이다.
그나마 인페르노 하트 덕분에 남들에 비해선 훨씬 부작용이 덜한 상태로 글레드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이걸 지나치게 남발하면 감당할 수 없는 후폭풍이 밀려온다.
라스는 글레드를 한계치까지 사용해 본 적이 없다.
이걸 계산하지 못한 게 컸다.
가장 강력한 무기라 생각했던 것이 오히려 라스를 절체절명의 위기로 몰아세우고 만 것이다.
칠흑은 지친 라스를 보며 웃었다.
“왜 그런가? 더 이상 그 흰 불꽃은 소환 못 하나?”
“…….”
칠흑은 일부러 라스가 글레드를 사용하게끔 유도했다.
스스로 지치게 만들게 하기 위해서.
동료들의 눈빛에 절망감이 어리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카이딘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어렴풋이 ‘죽음’이라는 것을 직감한 것이다.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라스는 마지막 생명의 불꽃을 태우기로 결심했다.
라스와 일행들을 중심으로 화이트 플레임 장벽이 세워졌다.
엘라시아는 놀라 외쳤다.
“글레드를 너무 낭비하면 라스님의 목숨이……!”
“괜찮아.”
라스는 정좌를 취한 채 천천히 눈을 감았다.
“여기에 오기 전에 티이나에게 미리 말해 둔 게 있어. 곧 있으면 지원군이 올 거야. 그때까지 어떻게 해서든…… 내가 이 불의 장벽을 유지할 테니 나를 믿고 끝까지 버텨 줘.”
“…….”
“…….”
일행들은 할 말을 잃었다.
한편. 칠흑은 데르킨 백작에게 지시했다.
“생명의 불꽃이 다 꺼지거든 놈들을 바로 제압해라. 그리고 내게 바쳐라. 먹음직스러운 녀석들이니까.”
“예, 칠흑님.”
라스의 생명의 불꽃이 다하기 전까지 지원군이 와야 한다.
강력한 지원군이!
* * *
출범식을 다급하게 마친 나는 우리에게 라스 일행을 구해달라고 찾아온 의뢰인과 다시 만났다.
흰색 가면을 쓴 여성은 나에게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제 의뢰를…… 아니, 라스 님의 의뢰를 받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로인 님.”
티이나라고 하는 이름을 가진 베르투의 48현자였다.
라스는 스카이 랜드로 들어간 이후 연락이 두절되면 티이나에게 나를 찾아가라는 부탁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티이나가 나에게 이런 의뢰를 해 온 것이다.
하지만 이제부터 출발한다 해도 스카이 랜드까지 가는 데 최소 3일이 걸린다.
그때까지 과연 라스가 살아 있을까?
‘돌아버리겠네, 정말로.’
하아…….
갑자기 머리가 아파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