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1
스카이 랜드 (1)
델리피나 전기의 주인공, 라스.
그는 동료들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면서 입을 열었다.
“칠흑의 목격 정보가 들어온 것 중 가장 최근 것이 뭐지?”
언령술사 엔드라가 다수의 글자가 적혀 있는 수첩을 꺼냈다.
“리보크 마을에서 목격된 정보가 가장 최신에 들어온 겁니다. 그 이후부터는 정보가 없네요.”
“리보크, 리보크라…….”
라스는 다시 술잔을 기울였다.
술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술을 싫어하는 것도 아니었다.
있으면 마시지만 없으면 굳이 술을 찾으려고 돌아다니지 않는 정도.
딱 그 정도 선이 라스의 술 취향이었다.
그러나 카이딘은 달랐다.
“야, 라스. 넌 술자리에서도 칠흑, 칠흑 이야기뿐이냐?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야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술 맛 다 떨어지게.”
“그게 우리 여행의 목적이니까.”
“융통성 없는 녀석. 쯧쯧쯧.”
라스와 카이딘은 성격이 정반대다.
이런 두 사람이 같이 파티를 꾸려 여행을 해 오고 있다는 사실이 동료들에겐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하이 엘프 엘라시아는 카이딘이 주문한 술을 따라 한 모금 음미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인간계의 술은 도수가 너무 낮은 거 같아요.”
카이딘은 라스와의 말다툼에서 벗어나 엘라시아의 말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래? 이거 꽤 독한 술인데. 하이 엘프들도 술 마시고 그래?”
“아니요, 마시진 않아요. 하지만 취하지도 않죠.”
“불쌍하구먼! 술이라는 건 말이야, 취하기 위해 마시는 거야.”
“왜 그런 건가요?”
엘라시아는 카이딘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취해 봤자 머리가 어지러울 뿐이고, 구토만 하고……. 그렇다고 일의 능률이 올라가는 것도 아니잖아요?”
“대신, 괴로운 걸 잊게 해 주잖아! 인간이란 말이야…… 누구든 잊고 싶은 과거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거야. 물론 나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라스, 저 친구도 똑같지.”
“…….”
일행들은 침묵했다.
그들은 라스의 과거를 알고 있다.
칠흑에게 최초로 잠식되었던 남자, 테이른.
그는 라스의 아버지였다.
라스는 칠흑의 손에 의해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사랑하는 모든 이들을 잃었다.
라스가 살아가는 원동력.
그건 바로 복수(復?)다.
라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카이딘 저 녀석이 또 취했나 봐. 엔드라, 미안한데 카이딘 좀 방으로 데려가 줄래?”
“알겠습니다. 카이딘 씨, 어깨 빌려드릴게요. 저한테 기대세요.”
“얀마! 내가 남자 따위랑 왜 밀착해야 하는디……! 히끅!”
“그럼 남장한 여자라고 생각하시고 기대세요. 자자, 갑시다.”
엔드라와 카이딘이 자리를 비운 사이, 라스는 엘라시아와 릴리안에게 말했다.
“너희도 그만 들어가도 돼. 내일부터 또 강행군이 될 테니까. 가서 일찌감치 자 두는 게 좋을 거야.”
“알았어요. 그럼 내일 봬요.”
엘라시아는 미련없이 방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릴리안은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너는 안 가?”
라스는 그녀에게 물었다.
릴리안은 대답 대신 술잔을 채웠다.
“나도 잊고 싶은 과거가 있어. 그러니까…… 오늘은 마실래.”
“…….”
릴리안의 본명은 아무도 모른다.
심지어 그녀조차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녀는 여태껏 실험체, 002로 불려 왔기 때문이다.
실험체로 이용당하면서 모진 수모를 겪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었다.
라스와 같은 아픔을 겪고서 이 자리까지 오게 된 릴리안을 라스는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라스 역시 술잔을 채웠다.
그리고 이내 술잔을 들었다.
“어울려 주도록 하지.”
“고마워.”
라스와 릴리안은 서로를 바라보면서 미소 지었다.
아픔을 지닌 자들끼리의 건배.
오늘 밤은 생각보다 길어질 것 같았다.
* * *
동이 트기 직전 라스는 눈을 떴다.
자연스럽게 잠에서 깨어나 천천히 눈을 뜨는 그런 형태가 아니었다.
“……누구냐?”
라스는 어둠으로 물든 자신의 방 구석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언제든 ‘불’을 꺼낼 준비를 마쳤다.
추종자? 검은 괴물?
아니면…….
“칠흑이냐?”
칠흑도 라스가 그의 뒤를 쫓고 있다는 걸 잘 알 터.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라스를 습격해 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습을 드러낸 건 칠흑이 아니었다.
라스가 잘 아는 존재였다.
“좋은 아침이에요, 라스 님.”
흰색 가면을 쓴 여성이 라스에게 태연하게 아침 인사를 건넸다.
라스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베르투의 48현자 중 한 명.
라스의 전담인인 티아나였다.
“무슨 일이야? 부르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불쑥 나오고. 그리고 내가 예전부터 말했지? 예고도 없이 갑자기 나타나지 말라고.”
“죄송해요. 하지만 대신 중요한 정보를 가져왔답니다.”
“중요하지 않다면 내 아침잠을 방해한 것에 대해 책임져야 해.”
“라스 님이 충분히 만족할 만한 정보에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목소리를 가다듬은 티아나는 자신이 가져온 정보를 라스에게 공유했다.
“칠흑의 위치를 알아냈어요.”
“어디 있지?”
“스카이 랜드에요. 아시나요?”
라스가 모를 리 없었다.
델리피나 대륙에 존재하는 유명한 불가사의 중 하나가 바로 스카이 랜드다.
공중에 붕 떠 있는 거대한 섬.
마법사들은 스카이 랜드가 왜 부유 섬이 되었는지 아직까지 그 이유를 밝혀내지 못했다.
그래서 불가사의한 존재라 불리는 것이었다.
“저번에는 리플란, 이번에는 스카이 랜드인가? 왜 그곳에 있지?”
“칠흑이 그곳에 갈 이유는 하나밖에 없지 않나요?”
“벨라시오닉의 보물이 그곳에 있나?”
아이템을 삼킬수록 강해지는 존재는 라스가 아는 한 딱 두 명 있다.
하나가 칠흑, 그리고 다른 하나가 바로 로인이다.
칠흑은 전성기 시절 때의 힘을 되찾기 위해 벨라시오닉의 보물들을 찾아 해매고 있다.
그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추종자들 역시 벨라시오닉의 보물을 확보하기 위해 발 빠르게 행동하고 있는 중이다.
칠흑이 벨라시오닉의 보물을 독점하게 놔둬선 안 된다.
“스카이 랜드에 얼마나 많은 보물들이 묻혀 있지?”
“확인된 바에 의하면 다섯 점 정도 된다고 하네요.”
“많군.”
벨라시오닉의 보물 다섯 점은 꽤 크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한다.
“정보 고마워. 앞으로도 계속 들어오는 정보가 있으면 언제든 알려줘.”
“물론이죠. 라스 님은 저에게 언제나 희귀한 정보를 계속 제공해 주시는 VVIP시니까요. 마일만 없다면 제가 라스 님이 주시는 정보들을 가지고 당당하게 차기 대현자 자리를 굳힐 텐데, 그게 문제에요.”
“마일? 로인 씨의 담당 현자인가?”
“네, 그쪽도 정보량이 장난이 아니더라고요. 아, 제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라스 님이 굳이 압박 느끼실 필요는 없답니다. 지금까지 해 오신 것처럼 변함없이 저에게 정보를 제공해 주시면 되요. 저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해요.”
“애초에 그런 압박을 느낄 생각은 없어.”
라스는 현자들의 서열 싸움에는 관심이 없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칠흑에게 향해 있었으니 말이다.
짐을 꾸리고 밖으로 나온 라스.
이미 동료들은 떠날 채비를 마친 상태였다.
카이딘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별일이네. 맨날 일찍 나오던 네가 오늘은 지각을 다 하고.”
“일이 있었어. 그보다 목적지를 수정한다.”
“응? 어디로 가게?”
라스는 저 멀리 짙은 안개가 깔린 곳을 가리켰다.
“스카이 랜드로.”
라스가 스카이 랜드로 가자는 말을 했을 때, 카이딘은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그가 기뻐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곳에 진귀한 아이템들이 많이 묻혀 있다고 하던데? 라스, 그거 아냐? 스카이 랜드는 섬 자체가 보물창고야. 아직 미개척 지역이라 그런지 아이템뿐만 아니라 듣도 보도 못한 희귀 광물들도 많이 있지. 우린 부자가 될 거야!”
“부자나 되려고 거기 가는 거 아니야. 칠흑이 거기에 있다는 정보가 있어서 가는 것이지.”
“티아나, 그 아가씨가 준 정보야?”
“어.”
“흠, 그래? 기왕이면 어느 어느 지역에 이런 아이템이 묻혀 있는지, 이런 정보도 한번 물어보지 그랬어.”
“방금 네 입으로 말했잖아. 스카이 랜드는 미개척 지역이라고. 티아나가 그런 상세한 정보를 가지고 있을 리 없지.”
“하긴 네 말이 맞네.”
스카이 랜드가 미개척 지역이라고는 하나, 사람의 손길이 단 한 차례도 닿지 않았던 곳은 아니다.
고대 문헌에 따르면, 스카이 랜드는 처음부터 부유 섬으로 불린 건 아니었다.
그냥 평범한 곳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섬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유는 모른다.
단순히 하늘로만 떠오르게 되었다면 큰 문제가 안 됐을지도 모른다.
스카이 랜드가 부유 상태에 접어들기 시작하면서 몬스터들이 섬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더 이상 사람이 살기 어려운 지역이 되어 버린 것이다.
결국 스카이 랜드에 터전을 잡고 살아왔던 사람들은 눈물을 머금고 자신의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천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아직까지도 스카이 랜드가 왜 부유 섬이 되었는지, 그리고 갑자기 몬스터들이 몰리게 되었는지 대해 밝혀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가끔 스카이 랜드의 불가사의를 조사하기 위해 탐사대가 파견되곤 하지만, 몬스터들 때문에 조사는커녕 멀쩡히 살아 돌아오는 것만으로도 용한 수준이 되었다.
그런 위험한 곳에 가게 된 것이다.
엔드라는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칠흑도 칠흑이지만, 거기에 있는 몬스터들도 상대해야 하는데…… 걱정이군요.”
“너무 그렇게 겁먹지 마. 여차하면 라스가 알아서 다 해결해 주겠지.”
카이딘과 라스는 성격이 정반대이긴 하지만, 실력으로는 서로를 인정하는 사이다.
특히 라스의 능력은 독보적이다.
인페르노 하트.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불을 다룰 수 있는 벨라시오닉의 보물, 아니 벨라시오닉의 심장을 가진 남자.
생명의 불씨, 글레드마저 손에 얻은 그는 칠흑에게 위협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말을 타고 짙은 안개 지역으로 돌입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엘라시아가 선두로 나섰다.
“여기서부터는 제가 안내할게요.”
하이 엘프의 방향 감각은 굉장히 유명하다.
시야가 방해되는 지역이라 할지라도 엘라시아는 제대로 된 방향을 찾아 일행들을 이끌었다.
엘라시아의 바로 뒤에 따라붙은 라스는 자신의 오른쪽 어깨 근처에 불 하나를 띄웠다.
“이 불을 보고 따라와.”
일행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엘라시아의 길 안내와 라스의 불 덕분에 일행들은 혼선 없이 스카이 랜드가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스카이 랜드로 향하는 첫 번째 관문, 짙은 안개를 어렵지 않게 통과한 라스 일행.
그러나 아직 두 번째 관문이 남아 있었다.
“우왓, 이게 뭐야!”
카이딘은 경악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다리가 이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경이롭기까지 했다.
엘라시아는 다리를 가리켰다.
“스카이 랜드로 향하는 유일한 수단이 바로 이 다리, 앵글 브릿지를 건너는 거예요.”
카이딘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마법으로 날아갈 순 없어?”
“스카이 랜드 근처에 마나의 흐름을 방해하는 무언가가 있어서 부유 마법으로 날아가는 건 불가능해요.”
“하아. 편한 게 없구나, 편한 게 없어.”
카이딘의 한숨은 갈수록 점점 무거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