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엑스트라-170화 (170/240)

# 170

출범식 (2)

체릴.

상당히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었다.

여전히 계속해서 나에게 러브레터를 보내오는 여인이긴 하지만, 그동안 여러모로 바쁜 일들을 소화하느라 러브레터에 전혀 신경도 안 썼다.

라비한테 알아서 대충 처리해 달라고 했지만, 오히려 라비에게 역으로 잔소리만 들었다.

뭐라고 했더라?

-여자의 마음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시는 거 아니에요? 너무해요, 대장님!

……이라고 했었나?

아무튼 이런 뉘앙스였던 것 같다.

러브레터는 변함없이 내 사무실에 차곡차곡 쌓여 가고 있었다.

한번 쌓이기 시작하니까 정주행할 엄두가 안 났다.

그런데 이제 와서 내 쪽이 체릴에게 연락을 해야 하다니.

“체릴 말고 다른 사람은 없어?”

혹시나 해서 물었지만, 라그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른 유명 디자이너들한테 문의해 봤습니다만……. 요즘 패션쇼 때문에 한창 바쁘다고 해서요. 그거 준비한다고 일감 안 받는다고 합니다.”

“패션쇼라니. 그게 뭔데?”

“데릴라 패션쇼라는 행사가 있습니다. 델리피나 대륙에서 가장 큰 규모의 패션쇼라 불리죠. 모든 디자이너들의 꿈의 무대라 불릴 만큼 유명합니다. 모르셨습니까?”

“내가 데릴라 패션쇼를 알았다면 너한테 물어보지도 않았겠지.”

“듣고 보니 그렇군요.”

갑자기 문득 이런 궁금증이 들었다.

“그러면 체릴도 그 패션쇼 준비한다고 바쁘지 않을까?”

“아니요. 체릴 양은 참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 유명한 곳이라며? 모든 디자이너들의 꿈의 무대인데. 디자이너에 한 발 걸치고 있는 체릴이 그걸 포기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이해가 잘 안 간다.

그러나 잠시 후, 왜 체릴이 그곳에 참가하지 않는지 단번에 알게 되었다.

“체릴 양은 그 무대에 너무 많이 섰거든요. 5년 연속으로 데릴라 패션쇼의 대미를 장식한 디자이너는 체릴 양이 유일할 겁니다.”

이미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워서 더 이상 데릴라 패션쇼 무대에 욕심이 안 난다.

이런 이유가 있었다.

하여튼 대단하다.

디자이너 업계에선 이미 정점을 찍은 먼치킨이었군.

그저 러브레터 보내는 데에 중독된 여자로만 알고 있었는데 왠지 라그너한테 이런 말을 들으니 체릴이 달라 보였다.

어쩔 수 없나.

폼 나게 레드 라인이라는 기사단을 만들었는데, 문양하고 제복, 갑옷 디자인이 형편없으면 개망신이다.

외형이라는 건 상당히 중요하다.

사람들에게 첫인상을 심어 주는 게 바로 외형, 즉 꾸밈새기 때문이다.

“혹시 체릴이 구상한 디자인 포트폴리오 같은 거, 몰래 구할 수 없을까?”

“가능합니다. 이럴 줄 알고 미리 챙겨 왔습니다.”

라그너는 감춰 뒀던 파일들을 꺼냈다.

무슨 도×에몽도 아니고, 말만 하면 알아서 척척 튀어나오네.

체릴이 디자인한 스케치들을 빠르게 훑었다.

보면서 절로 ‘와!’ 하는 감탄이 튀어나왔다.

‘센스가 있네.’

이 디자인 감각은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이건 재능이다.

디자인에 대해 모르는 나도 체릴의 재능을 알 정도인데, 같은 업계 사람들은 얼마나 뼈저리게 체감할까?

이걸 보고 나니, 체릴이 아닌 다른 사람한테 맡길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결단이 필요한 때다.

“체릴한테 맡겨 보자.”

“예. 하지만 미리 알아 두셔야 할 게 있습니다.”

“또 뭔데?”

“체릴 양이 데릴라 패션쇼에 나가지 않는다는 말이 곧 한가하다는 말과 동일한 건 아닙니다. 체릴 양에게 디자인을 맡기고 싶어 하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귀족들은 기본이고, 듣자 하니 한 나라의 왕조차도 체릴 양에게 직접 디자인을 의뢰할 정도라고 하더군요. 아마 대기 순번이 꽤 길 겁니다. 어쩌면 출범식이 끝난 이후에나 작업물을 받아볼 수도 있습니다. 이 점은 유의하시는 편이…….”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예? 죄송합니다, 로인 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내가 의뢰하고 싶다고 말하면, 체릴은 내가 준 일을 최우선 순위로 삼아서 작업할 거야. 출범식 이전에 디자인 작업을 끝낼 테니까, 대장장이하고 세공사들 미리 포섭해 둬. 바로 제작 들어가게.”

라그너는 내가 허풍을 부리는 게 아닐까 하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러나 허풍이 아니다.

사실이다.

“그리고 의뢰 넣을 때, 나한테 미리 말해 둬. 같이 보낼 게 있으니까. 그것만 있으면 체릴은 방금 내가 한 말대로 움직여 줄 거야.”

“그게 뭡니까? 혹시 인센티브를 미리 두둑하게 넣어 주신다든지…….”

“아니.”

돈이 아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어쩌면 평범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체릴에게 있어선 결코 평범하지 않다.

“러브레터에 대한 답장. 이거면 체릴은 만족할 거야.”

* * *

역시나 예상대로 체릴은 내 부탁을 받아줬다.

대신 조건이 있었다.

1일 데이트권.

체릴은 이것만 자신에게 준다면, 의뢰비고 뭐고 다 없던 걸로 하고 공짜로 처리해 주겠다고 했다.

솔직히 공짜로 처리해 주든 아니든 난 상관없다.

어차피 돈은 많으니까.

그저 체릴과 하루 동안 어울려야 한다는 게 귀찮을 뿐.

그냥 돈 내고 해 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체릴은 내 의뢰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아서 그냥 어쩔 수 없이 체릴이 하자는 대로 하기로 했다.

체릴에게 디자인 의뢰를 맡긴지 반나절 만에 결과물이 도착했다.

너무 빨리 와서 대충 일한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건 결과물을 보기 전까지의 오해에 불과했다.

“놀랍군요.”

라그너는 혀를 내둘렀다.

“이제 와서 말씀드리는 거지만, 사실 제가 로엘 쪽 제품을 꽤 많이 사 모으거든요. 단언컨대, 여태껏 봤던 디자인 중에서 가장 뛰어납니다!”

로엘은 체릴이 가지고 있는 패션 관련 레이블이다.

로엘 제품을 자주 이용하는 라그너가 이렇게 말할 정도면 틀림이 없다.

사실 그걸 몰라도 디자인이 정말 잘 뽑혔다는 건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괜히 체릴의 종합 능력치가 SS급이 아닌가 보다.

덕분에 출범식 이전까지 깃발과 각종 군수물자, 그리고 갑옷과 제복을 다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적어도 제복만큼은 어떻게든 마련하고 싶었는데 잘됐다.

명색이 출범식인데, 기사들에게 사복을 입힐 수는 없지 않은가.

이게 다 체릴 덕분이다.

‘하루를 희생하기로 한 보람은 있네.’

* * *

출범식 당일.

레드 라인 1기 멤버들은 이른 아침에 나울에 모여 한 차례 출범식 리허설을 가졌다.

이들은 로그 상단이 지급한 정식 제복을 입고 있었다.

레드 라인이라는 명칭답게 붉은색과 흰색이 절묘하게 배합되어 있는 제복이었다.

보면 볼수록 멋있네.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체릴의 재능에 찬사를 보냈다.

원래 오늘 출범식에 체릴도 오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체릴은 갑자기 급한 용무가 생긴 탓에 출범식에 불참하게 되었다.

내 입장에선 다행인 일이었다.

출범식에 참석한 주요 인사로는 바우너 그랑트, 블루로즈의 단장인 제나드, 부단장인 첸버, B팀 대장인 리오나, 그리고 마법사 길드장인 기간트와 대상인 웨일, 마지막으로 라크스 공작 등등…… 많은 이들이 참여했다.

라스는 보이지 않았다.

‘칠흑의 뒤를 쫓고 있다는 말까진 들었는데, 어찌 되었을지 모르겠네.’

레드 라인 기사단장 제복을 갖춰 입은 나는 이들에게 일일이 고마움의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웨일 님. 몸이 불편하신대도 불구하고 먼 길을 달려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당연히 와야지. 그리고 오랜만에 자네 얼굴도 보고 싶어져서 말이야. 허허.”

라크스 공작도 웨일과 비슷한 이유에서였다.

“나도 간만에 자네 얼굴이 보고 싶더군.”

“공작님께서는 저와 만나신 지 얼마 안 되지 않았습니까?”

“음? 그랬나?”

“블루로즈단 회의 때, 제가 공작님을 직접 초대했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아, 그랬지. 미안하군. 나이가 드니까 깜빡하는 경우가 많아. 하하!”

웃을 일이 아닌데요.

아무튼 뭐, 축하해 주기 위해 왔다는데 얼굴 붉힐 이유는 전혀 없다.

그리고 델리피나 대륙 전체에 크나큰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이 자리를 빛내 주면, 내 체면이 산다.

슬슬 출범식을 진행하려던 찰나였다.

근처에서 소란이 벌어졌다.

뭔 일인가 싶어서 직접 소동이 발생한 장소로 향했다.

R팀 용병 하나가 나를 보자마자 예를 표했다.

“대장님 오셨습니까?”

“무슨 일이야?”

“웬 거지 하나가 자기도 출범식을 보고 싶다고 생떼를 부리더라고요. 그래서 내쫓으려 하고 있었습니다.”

“거지?”

“예, 등에 낚시 가방을 짊어지고 다니는 왜소한 체격의 중년 남성입니다. 저기 보십시오.”

‘낚시 가방’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바로 알아차렸어야 했다.

나는 남자를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스승님이 여긴 어떻게……!”

권왕 휴즈.

그는 쓴웃음과 함께 이렇게 말했다.

“그냥 가던 길에 잠깐 들렀다.”

* * *

권왕 휴즈가 이곳에 올 거라고는 미처 예상 못 했다.

3권까지만 하더라도 속세를 완전히 떠난 것으로 묘사되었는데…….

‘혹시 내 기억이 잘못 되었나?’

아니, 그럴 리 없다.

내가 아무리 정신이 없어도 원고 내용을 잊거나 하는 실수는 저지른 적이 없다.

이래봬도 나는 편집자다.

원고 내용은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다.

휴즈의 등장에 대상인 웨일, 라크스 공작, 그리고 제나드 등이 휴즈에 대한 예의를 갖췄다.

그는 라바인 전투 때 맹활약을 했던 영웅이다.

레드 라인 기사들은 이제야 휴즈를 알아보고 크나큰 잘못을 저질렀다며 사과했다.

나 또한 마찬가지로 사과의 말을 건넸다.

“죄송합니다, 스승님. 제 부하들이 미처 스승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아니, 괜찮다. 그럴 수도 있지. 실제로 여기까지 오는 동안 아무도 내가 휴즈라는 것을 모르더라. 이런 비렁뱅이를 알아보는 것도 문제겠지만. 허허허!”

자학 개그까지 펼쳤다.

그나저나 참 놀랍다.

진실의 눈 때문에 사람들이 싫어져서 네스킨 산맥으로 은거하는 삶을 택한 그가 뜬금없이 나울에 등장하다니.

‘별일이 다 있네.’

이건 리플란에서 칠흑을 직접 만난 것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충격적인 일이었다.

기사단 출범을 축하하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고 하니까.

개인적으로 기쁜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근황이라도 물을 겸해서 말을 좀 더 붙이려고 했다.

“대, 대장님!”

라비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크, 큰일 났어요!”

“큰일? 뭔데.”

휴즈가 갑자기 이곳에 등장한 것보다 더 큰일이 벌어질 수 있나?

“급하게 의뢰가 들어왔어요! 내용은……!”

* * *

출범식은 약식으로 빠르게 진행되었다.

사회를 맡은 라그너는 나를 단상으로 이끌었다.

“로인 기사단장님을 모셔 보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단상에 오르자, 부관을 맡게 된 게럴이 기사단과 함께 나를 향해 경례했다.

“아아.”

목소리를 가다듬은 나는 기사단원들에게 말했다.

“우선 레드 라인 기사단의 일원이 된 걸 축하한다. 그리고 이 기쁜 날에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한데…….”

기사단원들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떠오르는 듯했다.

내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지금부터 나와 함께 라스 일행을 구하러 간다. 이것이 우리의 첫 번째 임무가 될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구해야 한다.

주인공이 죽으면 안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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