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7
레드 라인 (1)
케프리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문 들었어. 칠흑과 직접 만났다며?”
“약속을 하고 만난 건 아니었지만 말이야.”
“칠흑은 지금 어디있지?”
“글쎄, 그거야 모르지. 아마 신만이 알고 있지 않을까? 아, 살아 있다면 칠흑 본인도 알고 있겠네.”
“농담 따먹기나 하자고 여기까지 온 거 아니야.”
케프리의 목소리 톤이 급격하게 낮아졌다.
동시에 녀석의 등에서 드레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드레드는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지금 당장에라도 나를 잡아먹을 것 같은 기세를 뿜어 댔다.
“얌전히 실토하는 게 좋을 거다, 인간. 만약 질질 시간을 끌 생각이라면…… 여기서 네놈을 하나도 남김없이 집어삼켜 줄 테니까.”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나도 참…….
“제대로 얕보였군.”
조용히 말로 해결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네.
버르장머리 없는 꼬맹이들에게 참교육부터 먼저 시켜 줘야겠다.
나는 오른손을 뻗었다.
그런 뒤, 손가락을 까딱였다.
“덤벼 봐. 애송이들.”
드레드의 머리가 급격하게 커졌다.
입을 쩍 벌린 채 나를 단숨에 삼키려 했다.
위협적이기는 하나…….
‘칠흑에 비하면 애들 장난에 불과하지!’
칠흑과의 전투를 통해 나는 한계선을 한 단계 뛰어넘었다.
주먹에 마나를 실었다.
놈을 향해 있는 힘을 다해 휘둘렀다.
마나의 파동이 드레드의 머리를 밀어냈다.
“망할 인간 녀석!”
“드레드! 융합하자!”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크큭!”
검은 연기가 풍겨져 나오더니, 이내 케프리의 몸을 감쌌다.
소년의 몸은 어느 새 2미터의 장신으로 폭풍 성장했다.
케프리와 드레드가 한 몸으로 융합할 때의 대표적인 외형 변화 중 하나였다.
검은 괴물로 재탄생한 케프리.
아니, 지금은 드레드라고 불러야 하는 편이 더 옳을 듯했다.
드레드는 나를 향해 검은 촉수들을 날렸다.
나는 촉수들을 손으로 일일이 다 튕겨 냈다.
오른쪽에 하나, 왼쪽에 둘, 정면에 셋!
‘능력 자체는 나쁘지 않아.’
힘, 그리고 속도까지.
내가 지금껏 맞붙어 왔던 그 어떠한 검은 괴물들보다도 압도적인 신체 능력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정교함이 부족해.’
아직 나이가 어려서 그런 걸까?
공격에 정밀도가 많이 떨어져 보였다.
그냥 자신의 힘과 속도를 앞세워서 마구잡이로 공격하는 느낌이 강했다.
‘처음에 용신단을 막 얻었을 때의 나를 보는 듯하네.’
나도 저런 때가 있었지.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싸움은 주먹으로 하는 게 아니다.
머리로 하는 거다!
곧바로 용언 마법을 발동시켰다.
“Gazua(멈춰라)!”
드레드의 모든 행동이 일시 정지했다.
용언 마법의 발동 범위 안에 녀석이 들어올 때를 노렸다.
드레드는 크르릉거리며 나를 매섭게 노려봤다.
“용언 마법을 사용하다니…… 인간이 드래곤의 언어까지 통달한 건가?”
“내가 워낙 다재다능하거든.”
상대방을 멈추게 만드는 용언 마법은 지속 시간이 굉장히 짧다.
기껏해야 10초 남짓.
하지만.
‘드레드를 제압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지!’
나는 드레드의 안면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드레드의 몸이 희미해졌다.
사라진 게 아니다.
케프리와 융합을 해제한 것이다.
융합 해제로 인해 2미터에 육박하던 드레드의 덩치는 다시 소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런 식으로 한 번 내 공격을 피해내는 데에 성공한 드레드.
하지만 오히려 잘됐다.
‘인간 폼이라면, 상대하기 더 쉽지!’
나는 케프리를 붙잡으려 했다.
소년 상태에서 멋대로 주먹을 휘둘렀다간, 자칫 잘못하면 케프리가 즉사할 수도 있다.
어차피 용언 마법의 효과에 의해 움직이지 못할 테니 붙잡기도 쉽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던 내가 바보였다.
케프리는 옆으로 몸을 날렸다.
녀석을 붙잡으려던 내 손은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다.
왜 용언 마법의 효과가 사라진 거지?
의구심은 머지않아 풀렸다.
“드레드! 이제 좀 정신이 들어?”
“……앞으로 5초. 어떻게든 네놈이 알아서 도망쳐라.”
“알았어!”
그렇다.
용언 마법 효과는 ‘드레드에게만’ 발동되었다.
즉, 케프리는 내 용언 마법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케프리는 저렇게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었다.
‘이건 몰랐네.’
하지만 아무렴 어떠랴?
드레드의 힘이 없으면, 케프리는 그저 일반 소년에 불과하다.
나는 드레드와 케프리가 다시 융합하기 전에 케프리를 먼저 제압하기로 했다.
바로 그 순간.
“곱게는 안 당해!”
케프리가 주머니에서 작은 포션 병을 꺼내 터트렸다.
실명 포션이었다.
갑자기 내 눈앞에서 실명 포션이 터졌다.
드레드가 용언 마법의 효과에서 벗어날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 일부러 포션을 터트린 것이다.
다시 드레드와 융합한 케프리.
검은 괴물의 드레드는 나를 향해 거대한 촉수 손톱을 휘둘렀다.
그러나.
“까불지 마라, 애송이 녀석들아.”
나는 드레드의 팔을 덥썩 낚아챘다.
“뭣이……?”
순간 드레드는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일시적인 실명 상태에 빠져든 나를 역으로 제압할 생각을 했던 거 같지만…….
“미안한데 내 대처가 한발 더 빨랐어.”
실명 포션이 터지기 전에 나는 마나를 모아 내 눈을 보호했다.
그래서 실명 포션의 효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업어치기를 하면서 드레드를 바닥으로 냅다 꽂아 버렸다.
쿠우우웅!
드레드의 거대한 육체가 방바닥에 그대로 박혀 버렸다.
나는 드래곤 클로를 발동시킨 뒤에 드레드의 목에 겨눴다.
“움직이지 마라.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순간, 네놈의 목이 날아갈지도 모른다.”
“검은 괴물을 처음 상대하나? 머리 하나 잘라 낸다고 내가 죽을 리가 있겠나.”
“네 머리는 무사할 테지. 하지만 케프리, 그 소년의 머리는 과연 무사할까? 인간은 머리가 잘리면 죽는다. 그걸 모르진 않겠지?”
“…….”
나는 알고 있다.
케프리와 드레드는 공생 관계다.
케프리의 육체가 없다면, 드레드는 갈 곳 잃은 칠흑의 조각에 불과하다.
드레드에게 케프리가 어떻게든 필요하다.
드레드는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올려다봤다.
“죄 없는 소년을 죽일 생각인가, 인간?”
“죄가 없진 않지. 듣자 하니 민간인들도 잡아먹고 그랬다던데.”
“그건 놈들이 우리에게 먼저 시비를 걸어 왔으니까 그런 거다. 정당한 대가를 치른 거지.”
“그건 정당방위가 아니라 과잉방위라고 하는 거다. 잘 기억해 둬.”
아무리 어린 소년이라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을 헤칠 우려가 있는 위험인물이라면, 나는 제아무리 나이 어린 소년이라 하더라도 목숨을 빼앗을 각오가 되어 있다.
드레드는 나의 이런 결의를 눈치챘다.
결국 놈은 먼저 항복 의사를 드러냈다.
“……네 녀석이 이겼다. 원하는 게 뭐지?”
“우선 첫 번째. 융합을 해제해라.”
“알았다.”
다시 케프리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등에는 여전히 드레드가 머리를 내민 채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매우 간단한 조건이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얌전히 들어라. 잊지 마라. ‘얌전히’다.”
더 이상 내 집을 엉망으로 만드는 꼴은 보고 싶지 않다.
나중에 청소하기 귀찮다고.
* * *
케프리와 드레드는 나를 매섭게 노려봤다.
나 정도는 아마 쉽게 제압할 거라고 믿었나 보다.
하지만 미안해서 어쩌나?
나란 남자, 생각보다 많이 강하다고.
산전수전에 공중전까지 다 겪은 마당에, 이제 와서 꼬맹이 하나와 칠흑의 조각 하나에게 질 일은 없었다.
“너희를 직접 이곳으로 부르기 위해 일부러 클루도를 중심으로 소문을 퍼뜨리게 했다.”
“우리를 부르기 위해서?”
“그래.”
나는 우선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리고 이들을 부른 목적을 간단하게 압축했다.
“너희들, 내 부하가 되어라.”
“…….”
“…….”
케프리와 드레드는 어이없다는 시선으로 바라봤다.
내가 그렇게 이상한 말을 한 건가?
“왜. 내 밑으로 오기 싫어?”
두 녀석은 격렬하게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이유가 뭔데? 돈이라면 원하는 만큼 주마. 그것도 부족하면 편의는 최대한 다 제공할게.”
“그전에 우리에게 이런 제안을 하는 이유가 뭔데?”
케프리의 질문이었다.
나는 숨김없이 답했다.
“칠흑을 없애기 위해서.”
“거기서부터 아웃이야.”
“너희들도 칠흑이 목적 아니냐?”
“우리는 칠흑을 ‘없앤다.’가 목적이 아니라 칠흑을 ‘삼킨다.’가 목적이니까. 애초에 목적이 다른데, 왜 내가 형씨 밑으로 들어가겠어?”
묘하게 설득력 있는 말이다.
뭐, 좋다.
처음부터 문제아 녀석들이 곱게 내 밑으로 들어오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으니까.
최선책이 안 된다면 차선책을 노리기로 했다.
“그렇다면 동맹을 맺자.”
“무슨 동맹?”
“칠흑을 쓰러뜨리기 위한 연합 동맹. 내가 너희에게 칠흑에 관련된 정보를 주기적으로 제공하마. 대신, 너희는 필요에 따라 나에게 도움을 주면 된다.”
이번에는 케프리 대신 드레드가 입을 열었다.
“우리는 칠흑 말고 다른 존재 따위에겐 관심 없다. 일반인들이 추종자에게 학살당하든, 다른 괴물에게 잡아먹히든, 내가 알 바 아니다. 난 오직 칠흑만을 노린다. 그걸 기억해라.”
“알고 있어.”
나는 케프리와 드레드 콤비를 대칠흑 전용 병기로 이용할 예정이다.
저들의 힘이 칠흑에게 얼마나 먹힐지 모르지만, 그래도 칠흑에게 쉽게 당할 녀석들처럼 보이진 않았다.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라스나 나, 그리고 라크스 공작에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는 카드가 있다면, 무조건 써먹어야 한다.
케프리와 드레드 콤비는 그 카드 중 한 장이다.
“그럼 내 제안을 받아들일 텐가?”
한 소년과 한 칠흑의 조각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승낙의 표시를 보였다.
이것으로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마지막으로 나는 둘에게 동맹 제의와 관련 없는 질문을 하나 던졌다.
“왜 칠흑을 노리는 거지?”
나는 예전부터 이것이 궁금했다.
케프리는 의외로 내가 묻는 말에 순순히 답을 해줬다.
이번에도 그러지 않을까 싶었으나…….
“알 필요 없어.”
반항기 사춘기 소년 같은 태도를 보였다.
반면, 드레드는 ‘끌끌끌.’ 하는 가래 섞인 웃음소리를 냈다.
“로인이라고 했나? 그런 질문은 내 파트너한테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어렵게 맺은 동맹을 파기하기 싫다면 말이지. 크큭.”
“……명심하지.”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지금 당장은 알 방법이 없었다.
* * *
케프리와 드레드는 동이 트기 전에 나울을 벗어났다.
거의 밤을 새다시피 한 나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R팀 본부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1층에선 라그너와 라비가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두 사람은 나를 보자마자 반갑게 인사를 건네 왔다.
“오셨습니까, 로인 님.”
“대장님, 좋은 아침이에요.”
“어, 좋은 아침. 내가 부탁했던 일은 잘 추진되고 있겠지?”
라비가 대표로 대답했다.
“네, 오늘 접수 마감하고 내일부터 서류 심사 들어갈 거예요. 대장님하고 라그너 씨하고 직접 검토하실 거죠?”
“물론이지.”
내 명령을 최우선으로 따르며 움직일 병사들을 모집하는 일인데, 내가 직접 하지 않으면 누가 한단 말인가?
“맞다, 대장님.”
라비는 종이와 펜을 들고서 내게 외쳤다.
“혹시 새로 모집하실 사병 조직, 명칭이 어떻게 되나요?”
예전부터 생각해 둔 명칭이 있었다.
“레드 라인. 어때, 강렬하고 멋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