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6
다짐 (2)
B팀에 관해서 대대적인 회의를 가지겠다고 들었을 때, 나는 라크스 공작을 데려와야겠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그래서 여기에 오기 전에 라크스 공작에게 미리 편지를 보내 뒀다.
회의가 열릴 장소, 시간, 그리고 현재 리오나가 처한 상황을 적어 뒀다.
이건 드레인과 가르시아에게도 비밀로 했던 일이다.
드레인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대장이 데려왔어?”
“네.”
“아니, 잠깐만. 저건 오히려 마이너스 아니야? 대장도 알잖아, 라크스 공작님은 리오나가 용병 활동을 하는 것 자체를 매우 아니꼽게 보시는 분이라고! 저러다가 리오나를 데려가기라도 하려면 어쩌려고 그래?”
안 그래도 리오나는 B팀 대장직에서 내려오고 싶어 했다.
대장직을 내놓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다.
그녀는 블루로즈단 자체를 떠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와중에 내가 라스크 공작을 불렀으니 드레인이 보기에는 아마 기가 찰 것이다.
하나 내 생각은 달랐다.
“지금 리오나를 다시 복귀시킬 수 있는 사람은 라크스 공작님밖에 없어요.”
“무슨 헛소리야, 그게?”
“리오나는 마음이 크게 꺾여 있어요. 이 꺾인 마음부터 먼저 바로잡아야 해요. 그런 과정 없이 그냥 리오나를 B팀 대장으로 남겨 둬 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지금은 결단이 필요한 때입니다.”
나의 결단은 바로 ‘라크스 공작’이다.
한편, 라크스 공작은 첸버를 바라봤다.
“한창 회의하던 도중에 멋대로 들어와 미안하오. 괜찮다면 나도 이 자리에 참석해도 되겠소?”
“그건…….”
첸버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받아들여야 하나?
고민이 많을 거다.
왜냐하면 첸버도 드레인과 같은 생각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제나드가 입을 열었다.
“앉으시죠.”
“단장!”
첸버는 제나드에게 무슨 짓이냐며 외쳤지만, 제나드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여기에 앉으시면 됩니다.”
“고맙소.”
라크스는 제나드에게 짧게 감사를 표했다.
단장이 허락했다. 아무리 첸버라 하더라도 더 이상 이거 가지고 왈가왈부할 수 없었다.
한숨을 크게 내쉰 첸버는 어쩔 수 없이 회의를 이대로 진행하기로 했다.
“그럼 다시 회의를 진행하겠습니다만…… 공작님께서는 혹시 이 회의가 열리게 된 목적이나 이유를 알고 계십니까?”
“물론이오. 그리고 하고 싶은 말도 많고.”
그러니까 나한테 발언권을 달라, 지금 당장.
라크스 공작은 첸버에게 간접적으로 이렇게 말한 셈이었다.
눈치 빠른 첸버가 라크스 공작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할 리 없었다.
“…….”
첸버는 제나드를 바라봤다.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는 제나드.
어쩔 수 없이 첸버는 라크스 공작에게 발언권을 넘겨주게 되었다.
“말씀하시지요.”
의자를 살짝 비튼 라크스 공작은 리오나 쪽으로 몸을 아예 돌렸다.
“리오나.”
“……예, 공작님.”
“자초지종은 로인에게 다 들었다. 너를 따르던 부하들이 칠흑과의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하던데.”
“제 잘못입니다. 제가 좀 더 신경을 썼더라면……. 아니, 제가 좀 더 강했더라면, 레임스와 단원들을 허무하게 잃진 않았을 겁니다.”
맞는 말이긴 하다.
하지만.
“그건 리오나, 너뿐만이 아니라 나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야.”
나는 입을 열어 내 생각을 계속 들려줬다.
“너 혼자만의 책임이 아니야. 강해져야 하는 책임 역시 너에게만 있는 것도 아니고. 솔직히 나도…… 자만하고 있었어. 내 힘이 있다면, 그 어떠한 위기가 닥쳐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자만에 빠져 있었던 거야. 하지만 칠흑은 강했지, 내가 지금까지 상대했던 어떠한 적들보다도 훨씬 더. 그러니까 너 혼자 자책할 필요는 없어. 이건 우리 모두의 책임이야.”
단지 목숨을 잃은 용병이 리오나의 부하였다는 것 때문에 유독 심하게 자책감을 느끼는 듯했다.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선 강해져야 한다.
지키기 위한 힘.
우리에겐 그게 부족했다.
그래서 레임스는 스스로를 희생했다.
레임스야말로…….
우리가 가지지 못했던 ‘지키기 위한 힘’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우리가 그 의지를 이어받으면 된다.
라크스 공작은 나를 칭찬했다.
“로인이 바른 말을 했군.”
그는 나보다 더 오랫동안 리오나를 봐 온 사람이다.
리오나에 대해서도 나보다 잘 알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현명한 사람이다.
라크스 공작이라면 마음이 무너진 리오나를 바로잡아 줄 수 있을 것이다.
“리오나, 내가 예전에 너에게 했던 말이 있을 거다. 혹시 기억하고 있느냐?”
“……나무 같은 사람이 되라고 했습니다.”
“그래, 나무 같은 사람. 비바람이 몰아쳐도, 폭우가 쏟아져도.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대피처, 안식처가 되어 줄 수 있는 거대한 나무가 되라고 했다.”
라크스 공작은 리오나를 바라봤다.
“하나 그 나무가 흔들리는 순간, 네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더 큰 위험을 줄 수도 있다. 나무는 결코 흔들려서는 안 된다. 그 어떠한 순간이 오더라도, 절대로 꺾여선 안 된다. 흔들리지 않는 나무가 되거라. 그러기 위해서…… 강해져라, 실력뿐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라스크 공작의 말은 나에게도 크게 와닿았다.
움츠러든 리오나에게 다가간 라크스 공작.
그는 리오나의 양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러면서 직접 그녀의 어깨를 펴 줬다.
“주눅 들지 말거라. 너는 나의…… 라크스 공작의 자랑스러운 딸이다. 리오나 라크스, 네 이름을 항상 기억하거라. 그리고 네가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을 품을 수 있는 거대한 나무로 성장하거라. 블루로즈단의 용병으로서, 그리고 B팀의 대장으로서!”
“…….”
한참 동안 입을 굳게 다물던 리오나의 눈동자에 생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네, 공작님.”
이제 더 이상 무의미한 희생이 발생하는 걸 지켜만 보진 않겠다.
그녀는 그렇게 다짐했다.
물론 그건…….
‘나도 마찬가지지.’
* * *
리오나에게 할 말만 딱 한 뒤에 라크스 공작은 다시 본인의 영지로 돌아갔다.
상남자 그 자체다.
회의가 끝난 이후 블루로즈단 용병 전체가 한 자리에 모였다.
칠흑에게 희생당한 레임스 및 용병들의 죽음을 기리고자 장례식을 거행하기 위함이었다.
장소는 나울로 정해졌다.
바우너가 장례식을 거행할 곳과 기타 필요한 것들을 아낌없이 지원해 줬다.
우리는 시야가 탁 트인 공터로 향했다.
그곳에 레임스와 용병들의 이름이 적힌 묘비를 세웠다.
블루로즈단 용병으로서 목숨을 다한 경우 특별한 장례식을 치른다.
용병 조직 명칭인 ‘블루로즈단’답게 파란 장미를 오른쪽 가슴 위치에 꽂았다.
묘비 앞에도 파란 장미가 여러 송이 놓여졌다.
제나드와 첸버가 먼저 본인들이 들고 있는 파란 장미를 레임스의 묘비 앞에 내려놓았다.
이후, 나와 리오나도 나란히 파란 장미를 바쳤다.
리오나는 이들의 죽음 앞에서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비록 마음이 크게 꺾이긴 했지만, 슬픔을 딛고 다시 일어섰다.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고.
장례식이 끝나 갈 무렵, 리오나는 나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
“천만에. 어려울 때일수록 서로 돕고 살아야지.”
“이 은혜는 어떻게 해서든 갚을게. 반드시.”
“그래, 하지만 우선은 B팀 정비에 먼저 힘써. 당분간 의뢰 처리는 우리 R팀이 맡을 테니까.”
“응, 알았어. 최대한 빨리 진행할게. 오늘부터 당장.”
“그렇다고 너무 무리하진 말고.”
풀이 죽은 것보다 의욕이 넘치는 모습이 훨씬 더 보기 좋다.
리오나와 헤어진 후 나는 R팀 용병들을 모았다.
“가르시아.”
“예, 대장님.”
“당분간 너하고 2소대가 B팀을 좀 도와줘야겠어. B팀이 인력을 다시 꾸리고 재정비를 마칠 때까지 너와 2소대가 임시 B팀 단원 소속이 될 거야. 그때까지 리오나를 성심성의껏 도와줘.”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에나, 파이스, 너희 둘도 가르시아를 따라 B팀으로 가. 너희의 힘도 필요할 거야.”
“알았어요, 대장님.”
“미인의 곁에 언제나 저, 파이스가 있어야죠. 잘 알겠습니다!”
파이스 저 녀석은 괜히 리오나에게 이상한 수작이나 안 걸었으면 좋겠다.
당분간 가용할 인력이 줄어들긴 했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나에게 다 방법이 있으니까.
나는 별도로 나만의 사병들을 모집할 예정이다.
대신, 블루로즈단 R팀 대장으로서 사병 조직을 만드는 게 아니라, 로그 상단 소속 사병 조직으로 운영할 생각이다.
이미 첸버에게도 다 동의를 구해 놓은 상태다.
이런 조직을 만드는 이유는?
뻔하지 않은가?
칠흑과의 대결을 위해서다.
나는 이번 일을 통해 깨달은 바가 있다.
힘을 길러야 한다.
나 스스로의 힘도 중요하지만, 나의 세력들 역시 늘려야 한다.
그래서 사병들을 모집하기로 했다.
내 명령을 우선적으로 수행하는 사병 조직을 꾸린다.
이것이 내 목표다.
‘이러면 추종자 세력을 견제하는 게 훨씬 쉬워지겠지.’
용병들에게도 내 뜻을 전달해 뒀다.
조만간 사병들을 뽑기 위한 테스트를 거행할 예정이다.
진행 과정은 라그너가 알아서 잘 처리해 줄 것이다.
그리고 하나 더.
용병들을 돌려보낸 뒤에 나는 수풀 쪽을 향해 외쳤다.
“마일, 거기 있는 거 다 알아. 나와 봐.”
숨어 있던 마일이 곤란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언제부터 눈치채고 계셨습니까?”
“장례식이 시작될 때부터. 그보다 넌 부르지도 않았는데 뭐 하러 온 거야?”
“블루로즈단의 장례식이 어떤 절차로 진행되는지 궁금해서요.”
“이미 알고 있던 거 아니야?”
“예, 알고는 있죠. 하지만 머릿속으로만 알고 있는 것과 눈으로 직접 보는 건 차이가 꽤 큽니다. 그래서 이렇게 몰래 참가하게 되었죠. 물론 장례식에 걸맞은 예의도 갖췄습니다.”
마일은 자신의 오른쪽 상의 주머니에 꽂혀 있는 파란 장미를 가리켰다.
짜식, 이래서 미워할 수가 없다니까.
“안 그래도 널 찾으려고 했는데 잘됐네.”
“시키실 일이라도 있습니까?”
“어,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내가 리플란에서 칠흑과 싸웠다는 이야기를 최대한 여기저기에 퍼트려. 클루도를 중심으로 퍼트리면 될 거야.”
“클루도 말씀이십니까? 거긴 저번에 칠흑의 조각과 공생하는 소년이 나타났던 곳 아닙니까?”
“맞아.”
“어떤 계획을 세우고 계신지 모르겠군요.”
“나중에 보면 알 거야.”
얼마 안 걸린다.
조만간 알게 될 테니 말이다.
* * *
장례식이 치러지고 난 뒤 가르시아와 2소대 단원들, 그리고 에나와 파이스는 리오나가 있는 곳으로 떠났다.
그날 저녁, 휑해진 R팀 본부를 벗어난 나는 늦은 시간에 집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서 안으로 들어섰다.
‘누군가가 있어.’
또 레이샤르가 온 건가?
아니, 레이샤르와는 다른 기운이다.
침입자는 1층 거실에 있었다.
내 모습을 확인한 침입자는 씨익 웃었다.
“오랜만이야, 형씨.”
“그렇게 오래 되진 않았잖아, 안 그래?”
“그렇긴 하지.”
침입자…… 아니, 케프리는 미소를 유지하면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이 나를 찾아올 줄 알았다.
왜냐하면…….
‘이걸 노리고 일부러 마일에게 소문을 퍼트리게 한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