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5
다짐 (1)
무너져 내리는 리플란.
이대로 여기에 가만히 있으면 칠흑에게가 아니라 건물에 깔려 죽을지도 모른다.
나는 리오나의 손목을 낚아챘다.
“언제까지 멍하니 서 있을 거야?”
“레임스가……!”
리오나는 아직도 레임스와 칠흑이 사라진 방향을 응시하고 있었다.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B팀에서 오랫동안 같이 호흡을 맞춰왔던 두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목숨과 직결되는 위기 상황 속에서 멋대로 추억에 잠기게 만들 순 없었다.
나는 레임스에게 부탁을 받았다.
그녀를 지켜 주겠다고.
“리오나, 너답지 않아.”
“…….”
“너도 알잖아, 지금 이 상황 속에서 네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레임스가 자신의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우리를 구해 줬다.
그런데 이제 와서 리플란과 최후를 함께 맞이한다는 건 레임스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리오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애써 재촉했다.
그래, 이거면 된 거야.
이거면…….
* * *
리플란이 붕괴됨으로 인해 도시로 들어갈 수 있는 입구조차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이제 더 이상 ‘뒤집힌 도시, 리플란’은 존재하지 않는다.
제나드는 얼굴과 몸에 묻은 먼지를 털어 냈다.
“벨레너의 난제가 또 하나 사라졌군.”
“그러게요.”
나는 쓴웃음이 나왔다.
내가 손을 대는 곳마다 난제가 알아서 클리어되는 거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제나드는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칠흑은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겠군.”
그에 대해선 확실하게 말해 줄 수 있었다.
“아마 살아 있을 겁니다.”
“글레드가 약점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러면 살아남지 못할 텐데.”
“레임스가 스스로 글레드의 장작이 된다 해도 그건 억지로 글레드의 힘을 잠깐 불러일으킨 것에 불과해요. 칠흑을 소멸시키기에는 역부족이겠죠.”
하지만 레임스의 죽음이 헛되진 않았다.
레임스 덕분에 우리는 살아남을 수 있었으니까.
물론 칠흑까지 없앴더라면 더욱 좋았을 테지만…….
‘그건 이제 살아남은 우리들의 몫으로 남겨 둬야지.’
언젠가는 또 다시 맞붙게 될 것이다.
그때는…….
‘내가 확실하게 없애 주마!’
엑스트라라 해도 최종 보스를 쓰러뜨릴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다.
* * *
나울로 돌아가기 전에 나는 레이샤르가 있는 곳을 먼저 들렸다.
레이샤르는 마침 마법사 길드에 있었다.
길드 측에는 내가 왔다는 사실을 비밀로 했다.
괜히 환영 인사라든지, 식사 대접이라든지 하는 거창한 이벤트들을 거치고 싶지 않아서였다.
나는 페나트의 개인 사무실 창문을 두드렸다.
페나트는 누구인지 확인하지도 않고 창문을 열어줬다.
“오랜만입니다, 레이샤르 님.”
“너인 줄 알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잠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레이샤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들어오자마자 레이샤르는 창문을 닫고 커튼을 쳤다.
동시에 벽에 그려져 있는 마법진을 발동시켰다.
“저건 뭡니까?”
“소음 차단 마법진. 우리가 여기서 나누는 대화가 바깥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해 주지.”
“그렇군요.”
“너와 만나면 항상 중요한 이야기들로 가득하니까. 그래서 혹시 몰라서 미리 작업해 뒀지.”
“역시 철저하십니다.”
본의 아니게 레이샤르 찬양 모드를 가동시켰다.
나의 쉼 없는 찬양에 기분이 좋아진 건지, 레이샤르는 나에게 차를 직접 타 주기까지 했다.
드래곤이 타 준 차를 마시는 건 색다른 느낌이었다.
“자네도 바빠 보이니까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지. 무슨 일로 날 찾아온 건가?”
안 그래도 레이샤르에게는 요점만 정리에서 알려 줄 생각이었다.
“칠흑을 만났습니다.”
“칠흑이라고……?”
레이샤르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들고 있던 찻잔까지 떨어뜨릴 뻔했다.
“어디서 봤나?”
“뒤집힌 도시, 리플란에서 만났습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요.”
“없어지다니, 설마 칠흑이?”
“아니요, 리플란을 말씀드린 겁니다. 칠흑을 따돌리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리플란을 무너뜨려야 했습니다.”
“그러면 네가 또 다시 벨레너의 난제를 클리어한 셈이 되는 거로군.”
“그러게요.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벨레너의 13난제 중 자그마치 다섯 개나 클리어를 했다.
조만간 용병계에 내 이름이 또 한 차례 유행처럼 언급될 것이다.
하나 이게 중요한 게 아니다.
“중력의 핵을 차지하기 위해 리플란으로 온 거 같더군요. 덤으로 사령까지 먹어치우고 말이죠.”
“칠흑의 포식 본능은 벨라시오닉 시절부터 잘 알고 있으니까.”
벨라시오닉도 포식 본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칠흑처럼 마구잡이로 집어삼키는 타입은 아니었다.
벨라시오닉은 보물이라 불리는 아이템만 삼켰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강화시켰다.
이 특성은 칠흑에게 잠식되었어도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래도 자네가 칠흑으로부터 무사히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더 기쁘군.”
“누군가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레이샤르는 잠시 말을 잃었다.
이후에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슬픈 일이로군.”
레이샤르는 레임스가 누구이지도 모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이샤르는 잠시 그를 위해 추모의 시간을 가졌다.
다시 눈을 뜬 레이샤르는 이야기를 진행시켰다.
“칠흑은 어땠지?”
“보이는 모든 것들을 집어삼키더군요. 용신단의 능력도 통하지 않았습니다. 글레드로 죽창이라도 한번 꽂아 보려고 했습니다만, 없애는 데에는 실패했습니다.”
“그 와중에 칠흑을 제거할 생각을 한 자네도 대단하군. 아무튼 고생했어.”
“그리고 이걸 받아 주셨으면 합니다.”
나는 레이샤르에게 서류 봉투 하나를 건넸다.
“이게 뭔가?”
“제가 칠흑과 싸우면서 보고 느낀 정보들을 모두 적은 자료입니다. 이걸 라스 일행과 테일, 마법사 길드, 그리고 라크스 공작 등에게 전달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뿐만 아니랴 레이샤르 님이 칠흑의 자료가 필요할 것 같다고 판단이 들 때가 있다면, 이 정보를 마음껏 활용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칠흑과 조각들, 그리고 추종자와 싸우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중요한 정보를 맨입으로 받을 순 없지. 나도 이렇게 된 거, 자네에게 선물을 주겠네.”
선물을 기대하고 자료를 넘긴 건 아니었다.
어차피 내 목적은 칠흑을 쓰러뜨리는 것이다.
칠흑과의 전투에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이 정보는 언제든 이용되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료를 넘겼던 것이다.
레이샤르는 내게 두 개의 아이템을 넘겼다.
“벨라시오닉의 보물이라네. 경매장에 올라와 있었기에 내가 사들였지.”
“이 귀한 걸……! 감사합니다, 레이샤르 님.”
“천만에. 가치로 따지면 자네가 준 자료가 훨씬 더 값어치가 높은 건데, 뭘. 오히려 이것밖에 못 줘서 미안하군.”
“아닙니다. 벨라시오닉의 보물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안 그래도 나는 용신단의 레벨을 올리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리플란에 있던 중력의 핵도 사실은 가능하다면 내가 삼키려고 했다.
그러나 여건이 되지 못했기에 어쩔 수 없이 중력의 핵은 포기했다.
그 자리에서 나 말고 칠흑을 상대하며 유인하는 역할을 맡을 수 있었던 사람은 제나드, 단 한 명뿐이었다.
제나드에게만 칠흑을 맡길 순 없었다.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중력의 핵을 포기하고 미끼 역할을 자처했다.
아쉬워도 어쩔 수 없다.
그때 당시에는 중력의 핵보다 칠흑에게서 벗어나는 것이 더 중요했으니까.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레이샤르 님.”
“알았네. 그리고 몸조심하게. 칠흑과 마주쳤으니, 앞으로 추종자들이 자네를 노릴 거야. 어딜 가든 주변을 항상 경계하고 다니도록.”
“예, 명심하겠습니다.”
그건 이미 각오하고 있었다.
차라리 잘됐다.
라스나 라크스 공작에게 돌아갈 감시의 눈을 내가 분할해서 받게 된다면, 그만큼 추종자 세력의 전력을 분산시키는 효과를 가져올 테니 말이다.
나 자신에 대해선 딱히 걱정은 없다.
문제는…….
‘리오나지.’
이게 가장 걱정이다.
* * *
나울에 잠시 들른 뒤에 나는 부대장급인 드레인과 가르시아를 데리고 리오나와 B팀 용병들이 모여 있는 도시로 향했다.
그곳에는 제나드와 첸버도 있었다.
첸버는 우리를 반가이 맞이했다.
“생각보다 일찍 왔군.”
“다들 모여 있다고 들어서요.”
“안으로 들어오게.”
첸버를 따라 어느 공간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제나드와 리오나, 파랑새가 미리 앉아 있었다.
“오랜만이야, 대장.”
파랑새는 나를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반면 제나드는 묵묵부답이었다.
우리가 이곳에 모인 이유는 다름이 아닌 B팀 때문이었다.
현재 B팀은 크나큰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뒤집힌 도시, 리플란에 도전했던 부대장인 레임스와 용병들의 죽음, 그리고 스스로 대장직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언한 리오나까지.
B팀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를 위해 첸버는 대책 회의를 진행하기로 했다.
나를 중심으로 가르시아, 드레인이 각각 좌우측에 앉았다.
모든 핵심 멤버들이 회의에 무사히 참가했다.
“어흠!”
첸버는 헛기침을 하면서 목을 가다듬었다.
“그럼 지금부터 블루로즈단 긴급회의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슬쩍 리오나의 안색을 살폈다.
그녀의 얼굴 표정은 좋지 못했다.
리플란을 나오고 난 이후부터 줄곧 저 표정이었다.
리오나가 부하들을 얼마나 위하고 아끼는지에 대해선 이미 정평이 나 있었다.
느와르 남작 사건 때, 나 역시 그것을 여실히 느꼈다.
리플란 사건을 통해서 리오나의 멘탈이 많이 안 좋아졌다는 사실 또한 알아차렸다.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우선은…….”
첸버가 말을 잇기 전이었다.
제나드가 먼저 의견을 내비쳤다.
“리오나, 대장직을 내려놓겠다는 건 받아들일 수 없다.”
“……어째서죠?”
“그건 도망치는 꼴밖에 안 되니까.”
상대가 풀이 죽어 있다 하더라도 제나드는 할 말이 있으면 직설적으로 하는 남자였다.
리오나라고 예외는 없었다.
하나 리오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느와르 남작 사건을 시작으로 리플란 사건까지. 저 때문에 많은 부하들이 목숨을 잃었어요. 제가 계속 대장직을 유지한다 하더라도 무의미한 죽음만 되풀이될 게 뻔해요.”
“그건 네 탓이 아니야. 세상사는 ‘아무리 노력해도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자주 벌어지곤 하지. 나는 B팀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이 그런 경우라고 생각한다.”
“…….”
“B팀 대장을 맡을 사람은 너밖에 없다. 그러니 대장직에서 내려오겠다는 생각은 접도록 해라.”
제나드는 리오나를 상당히 고평가했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다.
하나 리오나는 좀처럼 제나드의 말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리오나는 필요한 인재다.
B팀을 위해서라도, 그리고 우리 블루로즈단을 위해서라도.
나를 위해서라도……라고 말하면, 이상한 오해를 받을 거 같으니까 생략하겠다.
“잠깐만요.”
나는 손을 들었다.
첸버가 고개를 돌려 나를 응시했다.
“왜 그런가?”
“모시고 싶은 분이 계신데, 여기 회의에 참석하게끔 해도 되나요?”
“누구지?”
나는 여기 오기 전에 비책을 하나 강구하고 왔다.
리오나를 설득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을 여기까지 데려온 것이다.
“보시면 바로 알 겁니다.”
내 말이 신호가 되었다.
회의실의 문이 열렸다.
천천히 회의실로 들어오는 한 남자.
리오나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라크스 공작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