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엑스트라-164화 (164/240)

# 164

뒤집힌 도시, 리플란 (5)

무사히 지하 공간으로 대피한 우리들.

아니, 솔직히 말해서 ‘대피’라는 표현을 써도 좋을지 잘 모르겠다.

우리는 도망친 거다.

칠흑을 피해서.

‘설마 여기서 최종 보스와 싸우게 될 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게다가 무지막지하게 강하다.

안 그래도 강한데, 내 능력의 반 가까운 것들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패널티까지 받고 싸워야 하니 미칠 노릇이었다.

압도적인 강함이라는 게 무엇인지 처음 느꼈다.

반면 제나드는 아직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방금 그 녀석은 누구지? 칠흑의 조각인가?”

리오나가 우리를 대신해서 제나드의 물음에 답해 줬다.

“아니요, 단장님. 그자는…… 칠흑입니다.”

“칠흑?”

“예, 칠흑의 본체로 예상됩니다. 그렇지? 레임스.”

“네, 아마도요.”

단장은 그제야 레임스의 생존을 확인했다.

“오랜만에 보는군.”

“……면목이 없습니다, 단장님.”

“상관없다, 살아만 있으면 되니까. 그런데 보니까 전부가 살아 있는 건 아닌 거 같은데…….”

용병들의 숫자가 줄어 있음을 뒤늦게 확인한 제나드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다가 사령 몬스터들과 만났는데. 갑자기 놈들이 다른 곳으로 우르르 몰려가더군. 혹시 너희 때문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뒤를 쫓았는데, 설마 이런 상황과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어.”

그래도 제나드가 합류한 덕분에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만약 제나드가 없었더라면, 나 혼자 칠흑과 죽어라 싸워야 했을지도 몰랐다.

제나드의 기습 덕택에 칠흑의 집중을 잠시나마 흐트러뜨릴 수 있었다.

그 결과, 우리는 무사히 살아남았다.

하지만 아직 멀었다.

리플란에서 벗어나야 한다.

“여기서 계속 머무를 수는 없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야 해요.”

모두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여기에 남아 있을 이유는 없다.

레임스와 용병들의 신변도 확보했으니, 이제 남은 건 도망치는 일뿐이다.

하지만…….

“어떻게 벗어나려고? 방법은 있어?”

“…….”

나는 리오나의 질문에 입을 다물었다.

마땅히 떠오르는 방법이 없었다.

“그건 이제부터 생각해 봐야지.”

언제까지 이 좁은 공간에 머무를 생각은 없다.

칠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계획을 떠올려야 한다.

생각하자, 생각하다 보면 분명 답이 나올 텐데.

갑자기 확인해 보고 싶은 것이 생겼다.

“레임스.”

“왜.”

“혹시 ‘중력의 핵’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어?”

“넌 여기까지 와서도 보물 타령이냐?”

쓴소리를 이어 가려던 레임스였으나, 도중에 리오나가 레임스에게 일침을 가했다.

“대답부터 해 줘.”

“예, 대장님.”

리오나가 말하면 즉답이다.

못마땅한 시선으로 나를 째려보던 레임스는 마지못해 답을 했다.

“위치는 알고 있어.”

“여기서 멀어?”

“멀지 않아. 리플란 도심 한가운데에 있으니까. 너도 아마 오다가 봤을 거다, 커다란 물고기 조각상을.”

“아, 그거?”

물론 봤다.

디자인이 눈에 띄어서 아직도 머릿속에 잔상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중력의 핵 위치를 알아서 뭐 하게?”

“나한테 작전이 있어. 모여 봐.”

우리가 유일하게 살 수 있는 방법.

나는 그것을 이들에게 공유하기로 결심했다.

* * *

터엉!

지하실 문을 박차고 나온 나는 제나드와 함께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아무도 없다.

심지어 사령 몬스터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는 무기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 칠흑이 튀어나올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나는 제나드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고개를 끄덕인 제나드는 전방으로 빠르게 이동을 개시했다.

우리 둘은 먼저 건물을 빠져나왔다.

이윽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좋아, 준비 완료!

지금이다 싶을 때, 나는 드래곤 피어를 발동시켰다.

“야, 이 먹보 녀석아! 나 여기 있으니까 또 다시 집어삼키려 와 보시지!”

드래곤 피어 덕분에 주변 일대에 내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어차피 공포 효과가 칠흑에게 먹힐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애초에 그걸 노리고 스킬을 사용한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내 위치를 칠흑에게 알려야 해!’

이게 목적이었다.

나의 의도는 제대로 적중했다.

“겁도 없는 녀석이군.”

칠흑의 목소리가 맞은편 건물 위에서 들렸다.

칠흑은 나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나에게 그토록 먹히고 싶어 할 줄이야. 눈치채지 못해서 미안하군. 사과의 의미로 네 소원을 이루어 주도록 하지.”

칠흑은 다시 거대한 입을 소환했다.

보면 볼수록 참 징그럽다.

입 안은 마치 우주의 공간처럼 수심 깊은 어둠밖에 보이지 않았다.

저거에 삼켜지면, 과연 어떻게 될까?

궁금하긴 하지만…….

‘굳이 자처해서 느끼고 싶진 않아!’

떨어진 건물 잔해를 들어서 놈을 향해 투척했다.

칠흑은 잔해를 그대로 씹어 먹었다.

생물, 무생물 가릴 것 없이 전부 집어삼키려는 포식 본능.

어마어마한 놈이다.

“이쪽이다!”

나는 칠흑을 유인했다.

다시 인간의 모습을 돌아온 칠흑은 빠른 속도로 나를 뒤쫓기 시작했다.

나의 작전은 이렇다.

나와 제나드가 칠흑의 관심을 끄는 동안, 리오나와 B팀 용병들이 물고기 조각상으로 가서 중력의 핵을 찾는다.

그리고 그것을 파괴한다.

중력의 핵이 사라지면, 리플란은 중력 영향권에서 벗어나 아래로 떨어질 것이다.

그때를 노려 이곳을 벗어나기로 했다.

작전이 성공하려면 아주 중요한 조건이 선행되어야 한다.

‘칠흑이 우리의 작전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해야 해!’

혹은 그전에 미끼 역할을 맡은 나와 제나드가 칠흑에게 당하기라도 하면 그대로 게임 오버(Game over)다.

무엇하나 어긋나서는 안 된다.

그 즉시 작전은 실패로 돌아가고, 우리는 칠흑의 먹잇감이 될 것이다.

어떻게든 최대한 시간을 벌어야 한다!

아직까지 칠흑은 우리의 작전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녀석은 갑자기 벌어진 술래잡기를 오히려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재미있군! 안 그래도 사령만 상대하기 지겹던 찰나에 잘됐어! 있는 힘을 다해 도망쳐라! 나에게 잡아먹히기 싫다면 말이지!”

놈은 마치 우리를 장난감 취급하는 듯했다.

얀이었다면 욱하는 성격을 이기지 못하고 바로 덤벼들었겠지.

작전이고 나발이고 신경 안 쓰고 말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나와 제나드는 저런 도발에 쉽게 넘어가지 않는 성격이었다.

최대한 물고기 석상이 있는 곳에서 먼 쪽까지 칠흑을 떨어뜨리려 했다.

바로 그 순간.

까앙!

이질적인 소리가 리플란 전역에 울려 퍼졌다.

동시에 칠흑의 움직임이 멈췄다.

녀석은 썩은 미소를 지었다.

“……나를 유인하기 위한 작전이었군.”

빌어먹을.

너무 빨리 눈치챘다!

방금 그 소리는 중력의 핵을 깨뜨리려는 과정에서 발생한 소음일 것이다.

칠흑은 바로 방향을 틀었다.

녀석은 석상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망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뒤쫓죠!”

내 말에 제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쫓는 자, 쫓기는 자가 서로 뒤바뀌었다.

나는 용의 숨결을 발동시켰다.

벨라시오닉의 브레스가 정확히 칠흑을 노렸으나, 칠흑은 가볍게 내 일격을 피했다.

속도가 미친 듯이 빠르다!

감히 쫓을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반드라도 이건 힘들 거야!’

이런 생각이 떠오를 정도였다.

이렇게 되면 방법은 하나다.

칠흑이 도착하기 전에 리오나 일행이 먼저 중력의 핵을 파괴해야 한다!

나는 다시 한번 드래곤 피어를 발동시켰다.

“리오나!! 검은 녀석이 그쪽으로 가고 있어! 어떻게든 빨리 파괴해!”

제발, 내 목소리가 리오나에게 닿기를!

석상이 있는 곳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마침 리오나는 칠흑과 나, 제나드가 이쪽으로 빠르게 달려오는 것을 포착했다.

“레임스! 시간 없어!”

“알고 있습니다아아아아아앗!”

해머를 움켜쥔 레임스는 있는 힘을 다해 석상을 후려쳤다.

쩌적!

석상에 큰 균열이 발생했다.

무너지는 석상 안에서 작은 보라색의 구슬이 등장했다.

틀림없다.

중력의 핵이다!

검을 빼 든 리오나는 중력의 핵을 정확히 반으로 갈랐다.

퉁!

반으로 나뉜 중력의 핵은 보라색의 빛을 잃어 갔다.

동시에…….

우르르르르르르!

뒤집힌 도시가 아래로 낙하하기 시작했다!

중력이 뒤바뀌었다.

우리 역시 아래를 향해 빠른 속도로 떨어졌다.

칠흑은 처음으로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내 식사를 방해했군.”

중력의 핵 또한 녀석의 식사 메뉴에 포함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중력의 핵을 노리고 이곳까지 왔을지도 모른다.

백날 사령 몬스터를 삼켜 봤자 중력의 핵 하나에 못 미칠 테니 말이다.

그것을 B팀 용병들이 파괴한 것이다.

화가 날 만도 하다.

칠흑의 몸에서 사기를 품은 검은 연기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모두 이 자리에서 씹어 먹어 주마!”

연기가 뭉쳐지며 날카로운 이빨을 지닌 괴생명체들이 형성되었다.

마치 얼마 전에 봤던 드레드를 수십 마리 보는 듯했다.

공중에서 무게중심을 잡기가 쉽지 않다.

이 와중에 칠흑의 공격까지 피하는 건 나조차도 어려운 일이다.

이럴 때, 비장의 수단을 꺼내기로 했다.

생명의 불씨, 글레드.

내 양손에 글레드의 불길이 깃들었다.

순간 칠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화이트 플레임을 가진 자가 라스 말고 또 있을 줄이야!”

칠흑은 라스의 존재도 알고 있었다.

잘됐네.

이렇게 된 이상…….

나는 있는 힘을 다 끌어다 썼다.

글레드의 발동 시간까지 줄이면서 모든 힘을 집중시켰다.

일격에 끝낸다!

여기서 최종 보스를 쓰러뜨리면 그만이잖아!

“가랏!”

생명의 불씨를 쏘아 보냈다.

부정한 것들을 정화하는 불길, 글레드는 역으로 칠흑을 집어삼키려 했다.

하나 문제가 발생했다.

갑자기 칠흑은 지금까지 삼켰던 사령의 조각들을 토해 냈다.

칠흑에게 향해야 할 글레드는 사령의 조각들 앞에 가로막혔다.

집어삼켰던 것을 다시 토해 낼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이것은 나에게 치명적인 독으로 작용했다.

“젠장!”

나는 다시 글레드를 꺼내려 했다.

그러나 힘을 전부 소진해 버렸다.

칠흑은 미소를 머금었다.

“왜 그런가? 더 이상 글레드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나?”

다시 수십 개의 입이 등장했다.

“그렇다면 얌전히 나에게 먹히도록.”

칠흑의 입들이 움직이기 직전에 한 남자가 먼저 칠흑에게 달려들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악!”

레임스였다.

녀석은 칠흑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꽉 붙잡았다.

칠흑의 입들이 레임스의 팔과 다리, 어깨, 옆구리를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레임스는 칠흑을 놓지 않았다.

“나 혼자 죽진 않는다!”

레임스의 몸에 흰색의 불꽃이 번졌다.

글레드다!

내가 글레드를 쏘아 보낼 때, 근처에 있던 레임스의 옷자락에 글레드가 옮겨 붙었던 것이다.

레임스는 스스로가 장작이 되기로 결심했다.

자신의 목숨을 바쳐 생명의 불씨를 활활 지폈다.

“감히……!”

칠흑은 레임스를 떼어 내기 위해 발버둥 쳤다.

그러나 레임스는 끝까지 칠흑을 놓지 않았다.

“리오나 대장님!”

레임스는 죽음을 각오한 듯 외쳤다.

“그동안 함께하게 되어 정말 영광이었습니다. 부디 이 못난 부하를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레임스! 무슨 짓이야! 어서 떨어져!”

리오나는 레임스에게 다가가려 했으나, 떨어지는 건물 잔해가 그녀를 방해했다.

생명의 불꽃이 다할 때쯤.

레임스는 나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대장을…… 잘 부탁한다.”

칠흑과 함께 점점 멀어져가는 레임스를 보며 나는 주먹을 쥐었다.

그래…….

“……나한테 맡겨라, 망할 놈아.”

누군가의 희생.

그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나 자신에 대한 무력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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