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엑스트라-163화 (163/240)

# 163

뒤집힌 도시, 리플란 (4)

칠흑(漆黑).

그 이름을 들은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칠흑의 조각도 아니고 칠흑 본인이 직접 등판했다.

나는 혹시 몰라 칠흑의 인물 정보를 확인했다.

-칠흑

-인물 등급 : 주연

-종합 능력 : ???

-부정한 것들을 집어삼키며 점점 힘을 길러온 존재. 《델리피아 전기》의 흑막이며 최종 보스다. ‘피어오르는 공포’, ‘검은 마왕’ 등 다양한 명칭을 가지고 있지만, 현재는 ‘칠흑’이라 불리고 있다. 생물, 무생물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집어삼키는 포식자. 한번 삼킨 존재의 능력을 그대로 카피해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특수 능력을 지녔다.

3권까지만 하더라도 칠흑의 본체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데 설마.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아직도 난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남자가 사용하는 능력은 확실히 내가 봐 왔던 칠흑의 조각들의 힘과 상당히 흡사했다.

그리고 어떠한 칠흑의 조각들보다 강한 힘을 보여 줬다.

온몸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는 수십…… 아니, 수백 개의 짐승의 머리로 변해 사령들을 잡아먹었다.

눈으로 직접 보고 있음에도 믿기 힘든 광경이 펼쳐졌다.

리오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수백 마리에 달했던 사령들을 전부 집어삼킨 장발의 남자.

그의 눈은 동공, 흰자 구분 없이 온통 검은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고개를 천천히 들더니…….

우리가 서 있는 쪽을 응시했다.

“이런……!”

나는 이들에게 다급하게 외쳤다.

“벽에서 떨어져! 놈이 우리를 봤어!”

“큭!”

레임스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피가 새어 나올 정도였다.

레임스와 용병들은 칠흑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이미 여실히 체감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두려움은 배로 작용하는 듯했다.

한편, 우리 쪽을 바라보던 칠흑은 천천히 왼손을 뻗었다.

왼손은 검은 연기와 동화되더니, 거대한 손으로 재탄생했다.

손은 우리가 있는 건물을 움켜쥐었다.

삽시간에 다수의 균열이 발생했다.

이대로 있으면 위험하다!

계단으로 도망칠 수는 없다.

칠흑이 조금이라도 손에 힘을 쥐는 순간, 건물은 바나나처럼 뭉개져 버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얄짤 없이 압사당한다.

그럴 바에야…….

“난간으로 가! 어서!”

“뭘 어떻게 하려고?”

도중에 리오나가 나에게 혹시 뭔가 번뜩이는 작전이라도 있는지 기대감을 가지며 물었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그런 건 없다.

“뛰어내려!”

“뭐?”

“진심이냐!”

레임스는 나보고 미쳤냐면서 따지고 들었다.

그러나 지금 이 위기는 미치지 않고선 극복할 수 없다.

“내가 어떻게든 알아서 할 테니까 나 믿고 뛰어!”

나는 그렇게 말하고서 먼저 아래로 뛰어내렸다.

빠른 속도로 낙하했다.

쿠웅!

다시 한번 두 다리에 충격이 전달되었다.

그래도 리플란에 처음 올 때에 비해서는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칠흑이 근처에 있는 사령 몬스터들을 전부 먹어치워 준 덕분에 근처에 나를 덮치는 사령 몬스터는 없었다.

그거 하나는 편해서 좋다.

하지만 그 대가로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된 건 좀 대가가 너무 크다고 생각한다.

“뛰어!”

나는 아직도 위에 남아 있는 용병들에게 외쳤다.

가장 먼저 뛰어내린 인물은 리오나였다.

나에 대한 믿음이 가장 강한 인물이기도 했다.

리오나가 떨어질 만한 위치에 미리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그녀를 그대로 받아 냈다.

‘나이스 캐치!’

조금만 실수했더라면 큰일 날 뻔했다.

이제 다음 차례!

“안 뛰어내리고 뭐 해!”

나를 대신해서 리오나가 용병들을 닦달했다.

내 말은 그렇다 치더라도 리오나의 말이라면 꿈뻑 죽는 B팀 용병들이다.

결국 이들은 처음에 내가 했던 말대로 건물에서 뛰어내리기로 했다.

하이라이트는 역시 레임스였다.

“우와아아아악!”

레임스는 덩치에 맞지 않게 비명을 지르면서 낙하했다.

하여튼 겁은 많다니까.

덩치가 워낙 커서 그런지 받아 내는 데에도 애를 먹었다.

레임스는 뒤늦게 눈을 떴다.

“나…… 살아 있냐?”

“살아 있으니까 후딱 나한테서 떨어지기나 해. 도망칠 테니까 뛸 준비하고.”

칠흑이랑 싸울 생각은 없다.

아직 나는 벨라시오닉의 혼을 각성시키지 못했다.

용신단의 레벨을 최고치까지 찍고 나서 칠흑과 싸우든 말든 하고 싶다.

그리고 글레드를 사용할 수 있는 시간에 아직 제한이 걸려 있다.

나는 아직 칠흑과 싸울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

곧장 레임스를 불렀다.

“도망칠 수 있는 공간, 또 없어?”

“있긴 한데…… 하지만 저놈을 따돌리지 않는 이상, 계속 우리를 따라올 거야. 그러면 금방 발각될 텐데!”

그 문제도 있었다.

일단 녀석의 걸음을 멈춰야 한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뒤를 돌아봤다.

그러나…… 아무도 없다.

‘분명 저기에 있었는데?’

저곳에 칠흑이 서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하나 칠흑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어디지?

그렇게 두리번거리며 놈의 행방을 찾고 있을 때였다.

“나를 찾나?”

“……!”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왼쪽 귓가에 들려왔다.

거리가 상당히 가까웠다.

나는 드래곤 클로를 발동시킨 채 녀석에게 휘둘렀다.

칠흑은 검은 연기로 모습을 바꾼 채 사라졌다.

그러더니 우리 앞으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먹잇감이 더 늘어났군.”

칠흑은 입맛을 다셨다.

녀석은 포식자다, 사령조차 먹어치우는 미친 포식자!

저놈을 상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해보는 수밖에 없다.

“Kusan(복종하라)!”

용언 마법을 발동시켰다.

그러나 되돌아오는 건 힘 빠지는 메시지였다.

-칠흑에게 용언 마법이 통하지 않습니다.

-같은 용족 타입에게는 용언 마법 효과가 발동하지 않습니다.

칠흑은 한번 삼킨 존재의 능력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용신단과 흡사했다.

칠흑은 예전에 드래곤 벨라시오닉을 삼킨 적이 있었다.

그 때문에 아마 ‘용족 속성’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용언 마법이 통하지 않는다는 건, 다시 말해서 드래곤 피어도 먹히지 않을 거라는 뜻과 마찬가지였다.

‘난감한데.’

용언 마법은 내 주 스킬이기도 한데 그게 면역이라면 답이 없다.

그나마 쓸 만한 건 드래곤 클로, 용의 숨결 정도일까?

나는 바로 용의 숨결을 준비했다.

“이건 어떠냐!”

양손을 전방으로 뻗었다.

빛의 기둥이 번쩍이면서 칠흑에게 쏘아졌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칠흑은 입을 쫙 벌렸다.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다.

거대한 입을 소환한 다음에…….

용의 숨결을 통째로 삼켰다!

“꺼억!”

트림까지 하는 기행을 펼쳤다.

“맛이 괜찮군. 이 힘, 이 맛…… 벨라시오닉의 것인가?”

한번 집어삼켰던 존재여서 그런지 벨라시오닉의 능력임을 바로 알아차린 듯했다.

참 비상식적으로 싸우네.

물론…….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웃기지만.’

나도 사실 비상식적으로 싸우는 사람 중 한 명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한 상대를 만나고 말았다.

칠흑은 어떤 공격을 해도 다 집어삼켰다.

그렇다면 과연…….

‘글레드까지 삼킬 수 있을까?’

생명의 불씨가 칠흑의 조각들에게 쥐약이라는 것까지는 밝혀냈다.

그러나 아직 칠흑 본체에게는 사용해 본 적이 없다.

하나 글레드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아껴 둬야 한다.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니니 말이다.

칠흑은 나를 바라보면서 웃었다.

“오랜만에 나의 미각을 충족시켜줬으니, 그에 보답하도록 하지.”

칠흑은 다시 입을 벌렸다.

마나들이 빠르게 집결했다.

나는 리오나와 B팀 용병들에게 외쳤다.

“좌우로 떨어져! 어서!”

녀석이 뭘 하려는지 바로 알아차렸다.

용의 숨결, 브레스를 쏘았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그리고 브레스에는 브레스라 이 말이지!

옆으로 몸을 날리면서 브레스를 피해 냈다.

용의 숨결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하나 존재한다.

시전하고 나서 바로 움직일 수 없다는 게 큰 단점이다.

나는 그것을 노렸다.

빠르게 접근해 드래곤 클로를 휘둘렀다.

칠흑은 드래곤 클로조차 집어삼키려고 입을 벌렸으나, 나는 궤도를 틀어 녀석의 턱을 강타했다.

찌익! 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의 턱 밑이 툭! 하며 밑으로 떨어졌다.

턱을 잘라 냈지만, 칠흑은 금세 상처를 복구했다.

재생 속도가 미친 듯이 빠르다!

‘이러면 거의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수준밖에 안 되잖아!’

아무리 공격해도 칠흑은 타격 하나 받지 않았다.

그 와중에 칠흑은 나에게 반격을 가했다.

짐승의 주둥이가 나를 물어뜯으려 했다.

하나 리오나의 검이 짐승의 머리를 잘라 냈다.

뒤이어 빈틈을 노린 레임스가 칠흑의 다리에 칼을 꽂았다.

나이스 어시스트다.

하지만 칠흑에게 치명타를 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칠흑은 오히려 흥미롭다는 우리를 바라봤다.

“재미있는 녀석들이군. 지루할 틈이 없어서 마음에 들어.”

갑자기 검은 돌풍이 몰아쳤다.

우리 세 사람을 튕겨 내 버린 검은 돌풍은 칠흑의 주변을 감쌌다.

돌풍이 사라질 무렵, 칠흑은 나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벨라시오닉의 능력을 가진 인간이라……. 어떻게 그 힘을 얻게 되었는지 궁금하군.”

녀석의 말을 받아 주려 했으나.

-칠흑과 대화를 나눌 수 없습니다.

-개연성이 부족합니다.

-친밀도를 올리거나 혹은 사리나와 커뮤니케이션을 형성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서 개연성을 충족시키세요.

오랜만에 보는 경고 문구였다.

하기야 내가 아무리 칭호 효과로 전체 친밀도를 많이 올렸다고 하더라도 처음 본 주연급 캐릭터와 대화를 나눌 수는 없을 것이다.

말을 못하는 대신 나는 어느 제스처를 취했다.

가운뎃손가락을 들어올렸다.

이름하야…….

‘F××k you다, 이 녀석아!’

그러나 칠흑은 내 손짓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지 못했다.

내가 있던 세계에서나 욕으로 통했지, 이곳은 애초에 문화가 다른 곳이다.

칠흑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건 무슨 뜻이지?”

몰라도 돼, 인마.

관심을 보였던 칠흑이었지만, 이내 그 관심을 거뒀다.

“상관없겠지. 안 그래도 벨라시오닉이 남긴 보물들을 찾고 있었는데, 더 맛있는 녀석들을 발견했으니…… 운이 좋군.”

칠흑은 다시 입을 벌렸다.

“너도 먹어치워 주마!”

누가 얌전히 먹힌다고 했나!

드래곤 클로로 녀석의 삼키기를 견제했다.

문제는 다른 용병들이었다.

칠흑에게 삼켜지지 않기 위해 용병들은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이대로 가다간, 모두가 다 먹혀 버린다.

위기의 순간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준 이가 있었다.

“모두, 뒤로 물러서라! 다칠지 모르니까!”

단장 제나드가 대검을 크게 휘두르며 칠흑의 상반신과 하반신을 잘라 냈다.

그러나 의미 없는 공격이라는 건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단지 시간을 끌었다는 것에 의의를 둘 뿐이다.

이때다!

나는 레임스를 닦달했다.

“도망칠 곳으로 가자! 안내해!”

“아, 알았어!”

레임스는 용병들과 빠르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뒤를 이어 리오나가, 마지막으로 나와 제나드가 칠흑을 방해하면서 최대한 시간을 끌었다.

지하로 향하는 문을 연 레임스.

들어가기 전에 나는 드래곤 클로를 크게 휘둘러 건물을 쓰러뜨렸다.

제나드도 나와 같은 방해 전술을 선보였다.

쓰러진 건물들이 칠흑으로부터 잠시나마 시간을 벌어줄 때 나와 제나드는 레임스가 열어 놓은 문 안쪽으로 몸을 날렸다.

덜컹!

문을 닫았다.

숨을 죽인 채 잠시 대기했다.

한동안 바깥은 잠잠했다.

그제야 우리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살았다!’

하지만 위기가 끝난 건 아니다.

이제…….

여기서 어떻게 나간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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