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엑스트라-159화 (159/240)

# 159

안티 히어로 (3)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음유시인들이 거의 다 모이는 공연이라 그런지 아침부터 사람들로 북적였다.

우리는 세이라에게 받은 VVIP 티켓 덕분에 기다리는 줄에 서서 기다리지 않고 프리패스로 들어갈 수 있었다.

좌석도 굉장히 많았다.

보이는 거라고는 사람, 그리고 의자뿐.

‘엄청나네.’

이전에 봤던 세이라의 단독 공연보다 훨씬 더 큰 규모를 자랑했다.

출연진, 그리고 음악 세트 리스트가 적힌 팸플릿을 받아 살펴봤다.

‘세이라를 제외하고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네.’

드레인이 옆에 있었다면, 문화생활 좀 알아 두라면서 또 잔소리를 해 댔겠지.

나도 그러고 싶다.

하지만 델리피나 전기의 결말을 알고 있다면, 누구라도 마음 편히 문화생활 따위를 즐기면서 생활할 여유는 없을 것이다.

쉬어도 쉬는 게 아닐 테니 말이다.

반드와 나는 나란히 앞쪽 자리를 잡았다.

음유시인의 공연이 이어지는 찰나에 반드가 이렇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대장, 우리, 이렇게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고 있어도 되는 건가?”

물론 안 되지.

알고는 있다.

하나 문제는 검은 괴물과 융합한 수수께끼의 소년이 어디로 도망쳤는지, 그리고 그 정체가 무엇인지 아는 게 하나도 없다는 거였다.

그래서 행동을 할 수가 없다.

꼬리라도 보였다면 잡아 보려 노력했을 텐데.

꼬리는커녕 작은 단서 하나 안 보이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마일도 아직은 정보 수집 중이라고 그랬고.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

“일단은 공연이나 보고 있자. 기회가 올 때까지 기다려 보자고.”

시간이 알아서 해결해 주겠지, 뭐.

* * *

공연을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앞으로 어떻게 칠흑을 상대해 나갈지에 대한 정국을 구상해 봤다.

‘빨리 차원 이동 마법이 연구되어야 할 텐데.’

4, 5권의 내용을 알고 있다면, 계획을 구상하는 데에 훨씬 편할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안 된다는 게 문제지.

슬슬 세이라의 차례가 다가오는 모양인지, 공연장의 비어 있던 의자들이 하나둘씩 채워지기 시작했다.

세이라는 인기 스타다.

그래서인지 공연 순번도 거의 막바지에 배치되어 있었다.

“사람들 많네.”

나는 이 사람, 저 사람을 훑었다.

우리처럼 VVIP 좌석에 앉은 사람들은 딱 봐도 돈이 많아 보이는 자들뿐이었다.

하기야 이곳은 돈이 있어야 들어올 수 있는 곳이니까.

좌석에 더불어 스탠딩 구역도 존재했다.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었다.

생선 손질을 하다가 나온 가게 주인, 관객들에게 먹거리를 팔기 위해 돌아다니는 상인, 얼굴을 가리기 위해 일부러 후드를 눌러쓴 소년…….

‘……잠깐!’

내가 잘못 본 건 아니겠지?

저 소년, 어디서 많이 본 거 같은데?

얼굴은 못 봤지만, 키를 비롯해 외형 모습은 상당히 낯이 익었다.

나는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소년의 인물 정보 창을 살폈다.

-케프리

-인물등급 : 단역

-종합능력 : SS

-칠흑의 조각에 잠식되어 잠식 3단계에 접어들게 된 남성. 그러나 자아를 유지하고 있으며, 오히려 칠흑의 조각과 공생 관계가 되어 버렸다.

공생 관계라니, 듣도 보도 못했다.

‘데르킨 백작 같은 경우인가? 아니, 그쪽은 데르킨 백작이 칠흑의 조각를 오히려 집어삼킨 케이스고. 케프리의 경우는 처음 보는데?’

칠흑에게 잠식되면 칠흑의 조각에게 잠식당하거나, 아니면 칠흑의 조각을 집어삼켜 그 힘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든가 둘 중 하나였다.

그래서 케프리라는 인물의 상황이 굉장히 특이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놓치고 싶지 않다.

어떻게든 붙잡아서 어떻게 저런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지 밝혀내고 싶다.

‘그것도 그건데…… 왜 음유시인들의 공연에 온 거지?’

이것도 궁금했다.

설마 음유시인들을 노리고 있나?

목숨을 빼앗으려고 일부러 타이밍을 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위험하다.

‘녀석을 방치해선 안 돼!’

나는 몰래 반드를 불렀다.

“반드, 스탠딩 쪽에 서 있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앞쪽 줄에 후드 눌러 쓰고 있는 소년, 보여? 대충 15살에서 16살로 추정되는 소년인데.”

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소년이 우리가 찾는 그 소년인가? 대장이 굳이 안 말해 줘도 바로 알아볼 수 있겠어. 어둠의 기운이 소년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것이 나의 투영안(投影眼)을 통해 보이거든. 크큭.”

그새 신기술을 터득했나 보다.

역시 중2병 파워다.

아무튼 케프리를 알아볼 수 있다고 했으니, 설명하기 한결 편해졌다.

“저 소년한테 몰래 접근해서 도망치지 못하게 붙잡아 둬. 그다음에 내가 따라붙을게.”

“함께하는 게 아닌가?”

“저 소년은 내 얼굴을 알고 있어. 내가 만약 접근한다면 바로 눈치채고 도망갈 거야.”

“그렇군.”

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반드에게는 어제 있었던 일을 미리 들려줬다.

추격전을 펼쳤으니, 소년은 분명 내 얼굴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반대로 나도 소년을 기억한다.

그래서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알아본 것이다.

‘자, 어떤 비밀을 감추고 있는지…… 한번 파헤쳐 볼까?’

긴장되는 순간이 찾아왔다.

* * *

반드는 마치 볼일이 생긴 것처럼 VVIP석을 빠져나갔다.

그사이에 마침 세이라가 무대에 올라섰다.

‘이런, 타이밍이 안 좋은데.’

혹시나 소년이 난동이라도 부리면, 자칫 세이라의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

아니지, 세이라의 목숨이 문제가 아니다.

여기 있는 모두가 다 위험하다.

케프리는 강하다.

카르탈조차 순식간에 먹어치울 정도였으니, 약하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럴 줄 알았으면 용병들을 데려올걸 그랬어.’

속으로 혀를 찼다.

그러나 되돌리기에는 이미 늦었다.

뒷일을 후회할 바에야 차라리 앞으로 어떻게 해야 좋을지 고민하고 생각하는 게 훨씬 더 도움이 된다.

암살자 출신답게 반드는 인기척을 지운 채 조용히 케프리에게 다가갔다.

나 또한 조용히 일어섰다.

모습을 감춘 채 반드가 케프리와 접선하기를 기다렸다.

청각을 최대한 증폭시켰다.

마침내 케프리의 뒤로 다가간 반드가 단검을 꺼내 소년의 등에 겨눴다.

“어둠에 잠식된 자여, 반갑다. 나는 라드리치를 봉인한 자, 반드라고 한다.”

“…….”

케프리는 뒤를 돌아보려 했다.

그러나 반드는 단검의 날을 더욱 바짝 붙였다.

“수상한 움직임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나의 검은 하늘조차 뚫어 버릴 수 있는 검이거든. 너의 어둠 정도는 손쉽게 갈라 버릴 수 있지. 후후후.”

제발 이상한 말 좀 하지 마.

그래도 의사는 확실하게 전달된 모양인지 케프리는 조심스럽게 양손을 들어 올렸다.

싸울 의지가 없음을 나타내는 제스처였다.

좋았어.

나는 인파들을 해치고 두 남자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이제야 나를 본 모양인지 케프리는 바로 알은척했다.

“어제 그 아저씨네.”

“그래, 니 말대로 나, 아저씨 맞다. 육군 병장으로 만기 제대한 아저씨. 참고로 155mm 견인곡사포 포병 출신이지.”

군대 나오면 다 아저씨라는 소리를 들으니 말이다.

군번줄이 있다면 꺼내서 보여 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뭐,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정체가 뭐냐.”

“정체?”

“너, 그리고 너와 동화된 검은 기생충에 대해 묻는 거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케프리의 어깨 쪽 후드가 펄럭였다.

후드 틈새로 기다란 검은 괴물의 머리가 튀어나왔다.

“감히 나, 드레드를 기생충이라 불렀나!”

자신을 드레드라 소개한 검은 괴물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면서 나를 집어삼킬 듯한 기세를 뿜어댔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검은 괴물 탓에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면서 우리에게 멀리 떨어졌다.

이 때문에 공연은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세이라에게는 미안하지만, 차라리 이게 나을지도 모른다.

소년이 난동 부리기 전에 사람들을 미리 도망치게 만드는 편이 인명 피해를 줄이는 데 도움이 많이 되니 말이다.

칠흑의 조각, 드레드가 나에게 달려들려고 할 때였다.

“그만해. 여기서 난동부리면 안 돼. 알잖아.”

케프리가 드레드를 저지했다.

드레드는 케프리의 결정이 못마땅한 모양인지 쏘아붙이듯 말했다.

“알다마다. 네놈이 저기 저 빨간 머리 계집애의 노래를 좋아해서 무리를 해서 여기까지 왔다가 이 사달이 났다는 것도 잘 알고.”

아하. 그래서 이 공연장에 온 거군.

그 와중에 케프리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드레드에게 경고했다.

“입 좀 다물어. 이상한 소리 그만 지껄이고.”

발끈하는 드레드와 달리 소년은 나이치고는 굉장히 침착했다.

게다가.

“아저씨, 나와 대화하고 싶어서 그런 거지?”

“정답이야.”

내 의도까지 완벽하게 파악했다.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다.

“네가 추종자들에게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이 자리에서 너를 죽이거나 할 생각은 없다. 단지 궁금해서 너를 만나고 싶을 뿐이니까.”

“무엇이 그렇게 궁금한데?”

“너와 저 검은 친구…… 이름이 뭐랬지?”

답한 쪽은 케프리가 아닌 검은 괴물이었다.

“드레드다, 인간. 한 번만 더 나에게 기생충이라는 단어로 불렀다간, 그때는 뼛조각 하나 남김없이 잘근잘근 씹어 먹어 주도록 하마.”

“그래, 알았어. 미안해. 앞으로 주의할게.”

거 참 난폭한 친구네.

이런 친구와 잘도 어울려 다니는군.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존재인데 말이다.

“좋아. 다시 대화를 이어 가도록 하지. 너, 그리고 드레드. 너희는 어떻게 공생 관계가 된 거지? 잠식 단계에 들어서면 보통은 한쪽이 먹힐 수밖에 없을 텐데.”

케프리는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몰라.”

“모른다?”

“응, 추종자들은 우리를 ‘돌연변이’라고 불렀거든. 왜 그렇게 불렀는지 알아? 그들도 우리가 왜 이렇게 된 건지 알아내지 못했기 때문이지.”

돌연변이.

이것보다 케프리, 드레드의 존재를 잘 표현하는 단어는 없을 것이다.

확실히…… 특이하다.

이런 공생 관계는 처음 본다.

《델리피나 전기》에서도 나온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물 등급이 단역이야. 그렇다면 소설에 영향을 전혀 끼치지 않는다는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어떤 역할을 맡을지도 모르겠다.

한편, 우리가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 신고를 받은 병사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드레드는 케프리에게 물었다.

“언제까지 느긋하게 수다나 떨고 있을 건가? 붙잡혀서 해부당할 때까지? 흥! 죽고 싶다면 그렇게 하든지!”

“그럴 생각은 없어. 그리고 우리가 맺은 ‘계약’이 있는데, 멋대로 죽을 순 없지.”

또 이상한 단어가 튀어나왔다.

“계약이 뭐지?”

나도 모르게 물었다.

대답을 들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원래 이런 대화 패턴이라면, 이다음에는 ‘알 필요 없다.’라는 대답이 들려올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외의 대답이 들려왔다.

“칠흑을 먹어치우는 것, 그게 우리의 목적이야.”

케프리는 그렇게 말했다.

“칠흑의 조각이면서…… 칠흑을 먹어치운다고?”

“응. 그렇지, 드레드?”

입에서 뚝뚝 타액을 흘리던 드레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각을 넘어서 이 몸이 직접 칠흑이 된다. 그것이 나, 드레드의 목적이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힘을 합치기로 했지. 그것이 바로 ‘계약’이다.”

순간 난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조각이 본체인 칠흑을 삼킬 거라고?

원대한 야망을 품고 계시는구먼.

애초에 가능한 일인가?

아니, 그것보다…….

“왜 그걸 나한테 말해 주지?”

나는 이게 궁금했다.

보통은 말 안 해 주잖아?

케프리는 어깨를 으쓱였다.

“물어봤으니까.”

“…….”

너무 순순히 알려줘서 오히려 이쪽이 진이 다 빠질 정도였다.

진짜 종잡을 수 없는 녀석들이다.

‘어쩌면 알려진다 해도 딱히 크게 문제될 건 없다고 생각해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

병사들이 다가옴을 알아차린 케프리와 드레드는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검은 연기를 온몸에 두른 케프리는 인간형 괴물이 되어 현장을 빠르게 벗어났다.

반드가 물었다.

“쫓을까?”

“아니, 놔둬. 어차피 쫓지도 못해.”

소설 속에 들어온 이후부터 느낀 거지만…….

‘상식이 안 통하는 놈들이 왜 이리 많은 거야.’

* * *

병사들은 우리에게 다가와 동행을 요구했다.

검은 괴물에 관해 묻고 싶은 게 많았나 보다.

그러나 도중에 누군가가 난입하여 병사들을 방해했다.

“실례합니다. 조사권은 제가 일임 받았으니 모두 물러나 주세요.”

파랑새가 증명서 같은 것을 병사들에게 보였다.

병사들은 ‘누구세요?’ 하는 표정으로 보다가 이내 파랑새가 들고 있는 종이를 확인하더니 마지못해 뒤로 물러섰다.

여기서 파랑새가 등장할 줄은 몰랐다.

“로인 대장은 만날 때마다 항상 화제의 중심이 되어 있네. 인기남이라서 좋겠어.”

“무슨 일로 오신 거예요?”

파랑새가 이유 없이 날 찾아올 리가 없다.

“큰일이 벌어졌어. 로인 대장의 힘이 필요해.”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말씀해 보세요.”

“우리 단원들이 ‘뒤집힌 도시’에 갇혔어. 로인 대장이 가서 단원들을 구출해 줬으면 좋겠어.”

뒤집힌 도시.

벨레너의 10번째 난제다.

어떻게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냐, 거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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