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8
안티 히어로 (2)
“여기, 티켓이요.”
나는 정말로 세이라에게 공연 티켓을 받았다.
그러나 오늘 건 아니었다.
2일차 티켓이었다.
“여기서 며칠 동안 공연하는 건데?”
“3일차까지 공연해요. 제가 무대에 오르는 건 2, 3일차밖에 안 되지만요.”
“3일 내내 무대에 오르는 게 아니라?”
“참가하는 음유시인 분들이 많아서 순차적으로 번갈아 올라가고 있어요. 그래도 이틀 연속 무대에 설 수 있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에요. 사실 이번 무대가 업계에선 굉장히 큰 무대에 속하거든요.”
“흐음, 그래?”
솔직히 음악 쪽은 별 관심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편집자로 일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음원 차트 순위 톱 100위만 반복 재생으로 틀어 놓고 들었다.
그나마 가요계에 관심이 많았을 때라고 해 봤자 군대에 있을 때였다.
‘그때는 잘나가는 걸 그룹 멤버들 이름까지 다 외우고 다녔는데.’
지금은 아니다.
내가 아는 음유시인은 세이라, 한 명뿐이다.
“그러면 내일 무대 마치면 끝이겠네.”
“그렇죠. 마지막 무대 앞두고 있는 와중에 이렇게 로인 님을 만나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그리고 기쁘기도 하고요.”
“기쁘기까지야. 내가 뭐 대단한 사람도 아니고.”
“충분히 대단하신 분이에요! 적어도 저에게 있어선 생명의 은인이나 다를 바 없는 걸요?”
세이라는 다시 한번 초커를 매만졌다.
“로인 님이 주신 이 아이템 덕분에 저는 다시 태어나게 되었어요. 노래를 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졌다고 할까요?”
“그거, 사실은…….”
진짜로 억제 효과가 걸려 있는 초커라고 말을 하려 했다.
그러나 세이라가 선수를 쳤다.
“알고 있어요. 이거, 진품이죠?”
“눈치챘구나.”
“네, 아이템에 조예가 깊으신 분과 만날 기회가 있었거든요.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저는 정말로 이게 그냥 아무런 효과가 없는 소품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분께서 마력 억제 효과가 붙어 있는 고등급의 아이템이라고 말씀을 해 주시더라고요. 그때부터 알게 되었죠.”
내 거짓말이 들통 났음에도 불구하고 세이라는 나를 원망하거나 하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로인 님에게 감사할 따름이에요. 그래도 저를 위해서 그런 거짓말을 해 주신 거잖아요? 실제로 로인 님이 선의의 거짓말을 해 주신 덕분에 저는 노래를 부르는 것을 더 이상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어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이 은혜는 아마 평생 못 갚을 거 같아요.”
빙그레 웃는 세이라.
음유시인 업계에서 최고의 미녀로 소문이 난 여자라 그런지 웃는 모습이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그런데 여기까지 무슨 일로 오신 거예요? 설마 이번에도 크라켄 토벌인가요?”
“아니, 이번엔 그냥 개인적인 용무 때문에 잠시 들른 거야.”
“저는 또…… 제 무대를 보러 오신 줄 알았어요.”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이 안 간다.
진심으로 실망하는 눈빛인데?
이번에도 선의의 거짓말을 할 걸 그랬나?
아니지, 더 이상 거짓말쟁이가 되고 싶진 않다.
나는 이야기의 방향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내일 무대, 잘 볼게.”
“네. 꼭 보러 오셔야 해요.”
“알았어.”
본의 아니게 약속이 추가되었다.
* * *
나와 반드가 머무를 방을 잡았다.
클루도에서 오랫동안 머무를 생각은 없지만, 짧게 머무를 생각도 없었다.
2일 정도면 충분하겠지.
세이라가 참가하는 음유시인들의 공연이 3일차까지 연속으로 잡혀 있어서 그런지 방 잡기가 쉽지 않았다.
겨우 1인실로 두 개를 구했다.
솔직히 이것도 기적이다.
딱 두 개 남은 걸 겨우 얻었으니 말이다.
반드는 잠시 쉬겠다면서 방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결국 나는 혼자서 클루도를 돌아보기로 했다.
정보를 직접 얻어 볼 생각이었다.
소문이 가장 많이 형성되는 곳, 그리고 사람들의 대화가 가장 왕성하게 이루어지는 곳.
바로 술집이다.
나는 구석에 자리를 잡고서 혼자 조용히 술잔을 기울였다.
귀에 모든 신경을 집중시켰다.
“……오늘 세이라 무대, 어땠어?”
“대박이지! 역시 세이라야. 귀가 정화되는 기분이었다니까?”
“게다가 예쁘기까지! 크으! 내일 공연도 기대되는구먼!”
틀렸다.
내가 원하는 건 검은 괴물과 소년의 이야기다.
그러나 음유시인들의 공연 덕분에 그거에 관련된 이야기만 나올 뿐이었다.
‘시기를 최악으로 잡았네.’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냥 술이나 진탕 마시다가 들어가야겠다.’
어차피 나에게는 마일이라는 이름의 보험이 있다.
내일 마일을 소환해서 얼마나 정보를 모았는지 한번 물어봐야겠다.
“여기 맥주 한 잔 추가요!”
“네, 갑니다!”
나는 추가로 맥주를 더 시켰다.
그나저나 이 집 맥주는 유독 시원하고 맛있다.
딱 내 입맛에 맞는데?
정신없이 맥주잔을 비웠다.
맥주가 도수가 낮은 술이긴 하지만 그래도 술은 술이다.
취기가 슬슬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런, 더 취하기 전에 들어가야지.’
날도 추운데 길바닥에 쓰러져 자고 싶진 않았다.
어렵사리 방도 구했는데 노숙을 하면 얼마나 억울할까?
계산을 하고 술집을 나섰다.
상당히 늦은 시간이었다.
새벽 1시 반이었으니 나 혼자 술집에서 시간을 꽤 보낸 셈이었다.
그러나 조용한 밤거리에 소란이 발생했다.
“어쭈? 요것 봐라?”
“방금 뭐라고 했냐. 사람들에게 민폐 끼치지 말고 조용히 들어가서 발 닦고 잠이나 자라고?”
“이 새끼가 돌았나!”
시비가 붙은 모양인가 보다.
어딜 가든 이런 식의 소란은 항상 발생하는구나.
판타지 세계는 원래 그런가?
잘 모르겠다.
나와 관계없는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신경이 쓰였다.
슬쩍 고개를 돌렸다.
덩치가 산만 한 남자 다섯 명이 한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둘러싸인 사람은 키가 매우 작은 모양인지, 아니면 남자들이 유독 키가 커서 그런지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도와주러 갈까?’
간만에 착한 일 한번 하러 가자는 심산으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갑자기 다섯 명의 남자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한꺼번에 뒤로 나가떨어졌다.
처음에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나 소년을 본 순간 나는 단숨에 술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너……!”
소년은 나를 보자마자 화들짝 놀랐다.
익숙한 소년이다.
칠흑의 조각과 함께 행동하던 그 소년이다!
처음에 이 술집을 찾았을 때만 하더라도 운수 더럽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 이제 취소하기로 했다.
‘설마 이런 식으로 마주칠 줄이야!’
운이 너무 좋다.
하지만 이 기회를 놓치면 말짱 꽝이지!
아무리 운이 좋다고 한들, 그 운을 내 손으로 부여잡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기다려 봐!”
소년에게 잠시 멈춰 보라고 소리쳐 봤지만, 씨알도 안 먹혔다.
소년의 등에서 짐승의 머리 하나가 길게 튀어나왔다.
“저번에 봤던 그 남자군.”
짐승의 머리는 인간의 말을 내뱉었다.
칠흑의 조각이 틀림없다.
조각의 말에도 불구하고 소년은 답하지 않았다.
대신 지시를 내렸다.
“저 사람이 못 쫓아오게 어떻게든 해 봐! 잡히면 나뿐만이 아니라 너도 끝장이라고!”
“알고 있으니까 잔소리 좀 그만해라. 앵앵거리는 거 시끄러우니까.”
칠흑의 조각과 잠식당한 숙주가 저렇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난생처음 봤다.
여러모로 희한한 콤비다.
그래서 더욱 놓치고 싶지 않다.
‘내가 모르는 칠흑의 조각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몰라!’
정보는 곧 생명이다.
칠흑에 대해 얼마나 많이 알아 두느냐에 따라 이 세계가 베드엔딩이 될지, 해피엔딩이 될지 갈라질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잡아야 한다!
‘하필 이럴 때 반드가 없다니!’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더니만.
반드의 힘이 정작 필요할 때 부재중이다.
소년의 몸에서 기다란 촉수 하나가 튀어나왔다.
근처에 있는 물건들을 마구잡이로 나에게 던졌다.
이미 한 번 당한 전술이다.
‘두 번은 안 당해!’
나는 일찌감치 드래곤 클로를 발동시켰다.
내던진 물건들을 죄다 베어 버렸다.
공공 기물 파손죄가 하나 추가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공공 기물보다 저 특이한 공생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칠흑의 조각과 소년 콤비를 잡는 게 더 중요하다.
‘속도를 더 내 볼까!’
두 다리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퍼어엉!
로켓 마냥 앞으로 빠르게 치고 나갔다.
갑자기 상승한 나의 속도에 소년은 적지 않게 당황했다.
“저 아저씨, 바로 뒤까지 따라붙었어!”
“아저씨 아니다, 이 녀석아!”
나도 모르게 소리를 쳤다.
소설 초반에는 오히려 너무 나이가 젊어 보인다고 한 소리 들었는데 이제는 시간이 지나니까 아저씨 소리까지 듣게 되었다.
하기야 저 녀석 기준에서 보면 아저씨가 맞긴 하지.
그래도 아저씨 소리 듣는 거, 난 별로 안 좋아한다.
칠흑의 조각은 소년에게 요구했다.
“나에게 맡겨라. 네놈의 속도론 저 녀석을 따돌릴 수 없다.”
“쳇, 알았어!”
검은 연기가 소년을 집어삼켰다.
검은 연기와 동화된 소년은 사람 형태를 온전히 유지한 검은 괴물이 되었다.
소년에서 단숨에 2미터 신장의 거구로 성장해 버린 것이다.
검은 괴물은 속도에 박차를 가했다.
내가 따라가기 버거울 정도였다.
‘신체 능력이 보통이 아니네!’
적어도 루크급은 되는 것 같다.
용언 마법을 사용하고 싶어도 범위 내에 들어오질 않아서 사용을 못하겠다.
드래곤 피어는? 그것도 마찬가지다.
이미테이션 마법도 지금 이 상황에선 무의미하다.
‘용의 숨결이라도 사용할까?’
그랬다가 저들을 소멸시키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이런 상황은 난생 처음이다.
결국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흔적을 놓치고 말았다.
“빌어먹을.”
입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술만 안 마셨어도 따라잡았는데…….”
하여튼 이놈의 술이 늘 문제야.
* * *
다음 날 아침, 이른 시간에 바로 눈을 떴다.
어제 소년과 칠흑의 조각 콤비를 놓치긴 했지만, 그래도 전혀 소득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적어도 클루도 주변에 그들이 머물고 있다는 건 눈으로 확인했으니까.’
이것만으로도 크나큰 수확이라 할 수 있었다.
마일의 소문을 확실한 정보로 만든 것만으로도 어디인가.
이제 이 일대를 샅샅이 찾아보면 될 것 같다.
하지만 그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대장, 슬슬 콘서트 갈 시간인데.”
반드가 내 방 문을 노크했다.
그렇다.
세이라의 초청을 무시할 순 없었다.
기껏 매진된 표를, 그것도 VVIP 좌석으로 끊어서 줬는데 성의를 모른 척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일단 공연을 보면서 천천히 생각을 해 보기로 했다.
어떻게 놈들을 유인해 포획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말이다.
무식하게 막 여기저기 돌아다녀 봤자 몸만 고생한다.
생각이라는 게 필요한 시점이다.
음유시인들의 노래를 들으면서 복잡해진 머릿속을 정리하기로 했다.
나는 목소리를 높였다.
“알았어. 조금 있다가 나갈게. 기다리고 있어.”
나갈 채비를 서둘렀다.
그나저나 이렇게 이른 시간부터 공연이라니…
공연은 해가 떨어지기 직전까지 계속 된다고 들었다.
‘음유시인도 쉬운 직업은 아니구나.’
역시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