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3
시간의 무덤지기, 벨레너 (3)
베라의 설득에 벨레너가 나선다고?
숨겨 둔 말재주 실력을 발휘하려고 하는 건가?
‘애초에 벨레너가 말재주가 좋은 편이라는 말은 들은 기억이 없는데.’
한편, 벨레너가 나서자 베라의 고운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설령 시간의 무덤지기라 하더라도 저를 쉽게 설득할 순 없을 거예요.”
엔드라도 쩔쩔 매는 철벽녀다.
벨레너가 아무리 뛰어난 화술 능력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베라를 설득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벨레너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였다.
“설득? 뭐 하러 그런 귀찮은 과정을 하지?”
“그게 무슨…….”
“가장 빠르고 쉬운 방법이 있지.”
갑자기 벨레너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나조차도 눈으로 쫓기 쉽지 않은 움직임이었다.
루크보다도 훨씬 빠른 거 같은데, 뭐지?
심히 당황스럽다.
나보다 베라가 더 당황하고 있었다.
설마 벨레너가 자신을 향해 이렇게 빠른 속도로 다가올 줄은 몰랐나 보다.
하긴 나도 몰랐으니까.
뒤늦게 정령들에게 공격 명령을 내리는 베라였지만…….
딱!
벨레너가 손가락을 튀기자, 상급 정령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소멸시킨 건가?
아니다.
‘시간을 되돌린 건가!’
이제야 알겠다.
벨레너가 빠르게 움직이는 것도, 상급 정령들이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도.
전부 타임 컨트롤이라는 능력에 의해 가능한 것이다.
벨레너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타임 그레이브에 오래 머무르게 된 덕분에 타임 컨트롤(Time Control)이라는 능력을 얻게 되었다고.
말 그대로 시간을 조절하는 능력이다.
자기 자신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게끔 조절했다.
그리고 베라의 주변은 상급 정령들이 소환되기 이전의 시간으로 되돌렸다.
이 두 번의 타임 컨트롤로 방금의 기적을 일으킨 것이다.
하지만 무적처럼 보이는 타임 컨트롤에는 심각한 약점이 존재한다.
‘시간의 무덤에서만 효력이 있다고 했지.’
즉, 타임 그레이브를 벗어나면 타임 컨트롤 능력을 사용할 수 없다는 소리다.
그러나 반대로 말하면…….
‘적어도 타임 그레이브 내에선 벨레너를 이길 수 있는 적수가 없다는 뜻이야!’
그는 이곳에서만큼은 최강이다.
무기를 꺼내 들려고 하던 베라였으나, 이미 그녀는 벨레너의 타임 컨트롤의 영향하에 있었다.
벨레너는 손을 뻗어 베라의 머리 위로 올렸다.
“……!”
갑자기 모든 행동이 정지한 베라.
멍하니 벨레너를 바라보기만 하더니, 이내 힘을 잃은 듯 몸이 축 늘어졌다.
“휴우.”
짧은 한숨을 쉰 벨레너는 우리를 돌아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끝났다.”
“어떻게 하신 겁니까?”
나는 벨레너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벨레너는 별거 아니라며 어깨를 으쓱였다.
“시간을 되돌렸다. 타임 그레이브로 들어오기 전의 시간으로 돌렸으니, 누구더라? 아무튼 저 하이 엘프 아가씨와 만난 기억이 머릿속에서 사라졌을 거다.”
“그런 일도 가능합니까?”
“가능하니까 한 거지.”
대단하다.
이제는 용병왕이 아니라 진짜로 시간의 무덤지기라 불러야 하는구나.
시간을 자유자재로 다를 줄 아는 사람을 본 건 처음이다.
그러나 벨레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짧은 시간을 되돌리거나 하는 일은 가능하지만, 몇 년 단위의 시간을 한꺼번에 조절하는 건 불가능하다. 너희가 타임 그레이브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어.”
“그렇군요. 그래도 덕분에 큰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벨레너에게 큰 도움을 받았다.
* * *
타임 그레이브를 나서자마자 라스는 나에게 이별을 고했다.
“베라가 깨어나기 전에 먼저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는 게 좋겠군요.”
“다음에 또 만나도록 하죠.”
“네, 그동안 몸조심하세요.”
라스는 귀한 몸이다, 주인공이니까.
아무쪼록 무사했으면 좋겠다.
S팀, B팀과도 작별의 인사를 나눴다.
나와 R팀은 나울을 향해 복귀 행군을 재촉했다.
그 사이에 베라가 눈을 떴다.
“여긴 대체……?”
“일어났어?”
나는 짐마차 위에 누워 있는 베라에게 다가갔다.
“타임 그레이브는 아직 멀었나요?”
시간의 무덤 안으로 들어가기 전으로 시간을 조작했다고 했으니, 우리가 데르킨 백작과 싸운 일도 당연히 기억 못 하고 있었다.
나는 임시로 소설을 쓰기로 했다.
“이미 들렀다가 오는 길이야.”
“예? 전 기억이 없는데요?”
“시간의 무덤에 들어가자마자 네가 갑자기 정신을 잃고 픽 쓰러지더라고. 거기 있는 시간의 무덤지기에게 말을 들어보니까, 간혹 시간의 흐름이 갑자기 변하는 것에 내성이 없는 존재는 기절하곤 한데.”
“기절……? 그럼 추종자들과의 전투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우리의 승리로 끝났어.”
“그런가요? 다행이군요.”
정말로 엘라시아에 관련된 일을 기억 못 하는 것 같다.
한숨 돌렸다.
혹시 몰라 용병들에게 단단히 일러 뒀다.
엘라시아에 관해선 입도 뻥끗하지 말라고.
수다쟁이 드레인이 좀 걱정되긴 하지만 그래도 함구할 건 함구하는 남자니까, 일단 믿어 보기로 했다.
* * *
나는 일단 용병들을 데리고 R팀 본부로 향했다.
용병들을 모아 두고 ‘고생했다.’, ‘수고했다.’ 같은 형식적인 짧은 말들을 했다.
그런 후 이들이 가장 좋아할 만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번 주 안으로 보상금이 나올 거다. 두둑하게 넣어 둘 테니까 그거 가지고 당분간은 쉬고 있어.”
돈과 휴식을 동시에 준다.
용병들은 환호했다.
벌써부터 약속을 잡기 시작하는 이들도 있었다.
용병들이 기뻐하니 나도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나도 당분간은 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를 구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것도 좋지만, 쉴 때는 쉬어 줘야 한다.
계속 달렸다간 언젠가는 분명 내 스스로가 지쳐 쓰러지게 될 것이다.
파이스가 목소리를 높이며 외쳤다.
“오늘 한잔하러 갈 사람! 여기 붙어라!”
유흥 문화하면 파이스를 따라잡을 이가 없다.
평소라면 파이스에게 잔소리 폭탄을 날렸을 나였지만, 오늘은 봐주기로 했다.
왜냐하면 시간의 무덤에서 고생을 많이 했으니까.
하나 라비가 파이스의 계획을 가로막았다.
“파이스 씨, 오늘 술자리는 포기해야 할 거 같은데요.”
“응? 왜요?”
“파이스 씨 앞으로 급한 편지가 와 있어요.”
“네?”
평소라면 나에게 왔을 편지가 오늘은 파이스에게 향했다.
나도 궁금해졌다.
편지를 살펴보던 파이스의 얼굴이 점점 굳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편지를 다시 봉투에 넣고서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하하, 라비 양의 말이 맞네요. 오늘 밤새도록 달리는 건 포기해야겠어요.”
“무슨 일인데?”
나는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파이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라피엘 교단에서 저를 찾네요. 별일은 아닐 겁니다. 전 어차피 파문당했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나는 파이스가 왜 라피엘 교단에서 파문당했는지 이유를 모른다.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개인적인 일이라서 쉽게 물어볼 수 없었다.
파이스는 곧바로 떠날 준비를 갖췄다.
상당히 급한 일인 거 같은데…….
“나도 같이 가도 될까?”
“대장님도요? 상관은 없습니다만…… 안 쉬어도 돼요?”
“난 일하는 게 곧 쉬는 거거든. 그리고 라피엘 교단이 어떤 곳인지 보고 싶기도 했고.”
사실 내 목적은 파이스다.
파이스는 우리에게 중요한 인력이다.
R팀에서 유일하다고 해도 무방한 힐러이기에 파이스를 잃는 건 타격이 심하다.
‘어쩌면 라피엘 교단에서 파이스를 다시 데려오려고 일부러 저런 편지를 보낸 것일지도 모르지.’
편지 내용이 뭔지는 모른다.
그래서 일단은 따라가서 파이스의 동태를 감시하기로 했다.
나 말고 다른 지원자가 더 있었다.
“나도 갈래.”
드레인이 손을 들었다.
“선배는 왜요?”
“내 아내가 라피엘 교단의 신자거든.”
“선배는 무교잖아요.”
“아내한테 자랑하려고 그러지. 어차피 며칠 동안 있을 것도 아니잖아?”
파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얼굴만 보고 오면 됩니다.”
“그렇지? 그리고 어차피 집 가는 길이니까. 가는 김에 들렀다가 가야지.”
가끔 보면 파이스도 약간 마일과 비슷한 기질이 있는 것 같다.
궁금한 게 있으면 본인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어 하는 저 기질 말이다.
그리고 보고 들은 걸 바탕으로 주저리주저리 수다를 떤다.
라피엘 교단에 들렸다가 가면 드레인의 수다력이 한층 더 상승하겠군.
* * *
나는 파이스, 그리고 드레인과 함께 라피엘 교단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굉장히 가까웠다.
가는데 반나절 남짓 걸렸다.
‘이렇게 가까이 있을 줄이야.’
종교 쪽은 거의 관심이 없어서 잘 몰랐다.
라피엘 교단은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신도들을 거느리고 있다.
영향력으로 따진다면 종교계에서 톱3 안에 들 정도일 것이다.
우리가 향하는 곳은 대주교 마르카스가 있는 도시, 로아트리였다.
도시에 거주하고 있는 주민의 90퍼센트 이상이 라피엘 신도다.
애초에 로아트리는 라피엘 신도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도시다.
그러다 보니 라피엘교는 이들의 생활의 일부가 될 수밖에 없었다.
‘델리피나 전기에선 자세히 묘사되어 나오지 않았던 종교였지.’
라피엘교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들도 그렇게까지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지 않았다.
로아트리에 들어선 순간 인상적으로 느껴진 게 있었다.
건물들의 색깔이었다.
화이트와 블루, 두 가지 색만 배합되어 칠해진 건물이 거의 대다수였다.
“여기 문화인가?”
나는 혼잣말로 물었다.
때마침 파이스가 내 혼잣말을 받아줬다.
“문화라기보다는 라피엘교의 영향이라고 보시는 게 좋을 겁니다. 라피엘교를 상징하는 색깔이 파란색과 흰색이거든요.”
“아하, 그렇군.”
띠링! 지식이 1 상승했습니다.
몰랐던 정보다.
알아 둔다 해도 얼마나 큰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기억해 두도록 하자.
우리는 큰길을 따라 쭉 걸었다.
걷다 보니 거대한 성당이 하나 나왔다.
구태여 물어보지 않아도 라피엘교의 성당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말에서 내린 뒤에 나와 드레인은 파이스의 뒤를 따라갔다.
드레인은 사방을 둘러봤다.
“굉장하네. 나중에 집에 가서 아내한테 말해 주면 엄청 부러워하겠는걸?”
“나중에 사모님 모시고 한 번 더 오세요.”
“음, 그럴까? 어차피 휴가 때 뭐 할지 아직 정한 게 없으니까……. 그래, 나쁘지 않은 계획이야. 안 그래도 아내가 하도 내가 밖에만 싸돌아다니니까 불만이 폭주하기 일보직전이었거든. 여기 가자고 하면 삐친 게 풀리겠지.”
본의 아니게 드레인의 가정 평화를 지키는 일에 앞장서게 되었다.
라피엘 교단 정문을 지키던 팔라딘들이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지금 이 시간은 출입 금지입니다. 안으로 들어가실 수 없습니…….”
“들여보내도록.”
안쪽에서 들려온 낯선 남자의 목소리.
흰색과 파랑색이 적절하게 배합된 의복을 갖춘 50대의 남성이 팔라딘들에게 지시했다.
“내 손님이다. 신원 확인할 것도 없어. 그냥 들여보내.”
“예, 대주교님.”
양쪽으로 물러서는 팔라딘들.
남자는 파이스에게 다가갔다.
“오랜만이구나, 파이스.”
“건강해 보이시니 다행입니다, 마르카스 대주교님.”
이 남자가 라피엘교의 대주교군.
체릴의 카틀리나 사건이 절로 떠올랐다.
과연 라피엘교는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