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엑스트라-152화 (152/240)

# 152

시간의 무덤지기, 벨레너 (2)

내가 벨라시오닉의 보물들을 찾을 후 벨레너가 사는 통나무집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일행들이 벨레너와 함께 바깥으로 나온 상황이었다.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는 듯했다.

나는 마일에게 다가갔다.

“만족할 만한 대답은 많이 들었어?”

“예, 어마어마합니다. 역시 용병왕이라 불렸던 분답더군요. 제가 몰랐던…… 아니, 베르투의 모든 현자들이 알지 못했던 지식이 상당합니다. 지금 당장 집으로 돌아가서 이 기억을 곱씹고 싶을 정도군요.”

마일은 잊어버리기 전에 후딱 필기로 남겨 두고 싶어 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벨레너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첸버와 리오나도 좋은 말을 많이 들었다는 감정이 묻어나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행이네.

같은 용병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우리에게는 대선배나 다를바 없는 사람이니까.

만남 자체가 영광스러운 자리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만남이 있으면 이별도 있는 법.

언제까지나 타임 그레이브에 머물 순 없었다.

첸버는 벨레너에게 물었다.

“벨레너 님은 계속 여기에 계실 겁니까?”

“물론. 아마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 불균형하게 흘러가는 시간들과 함께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그렇군요. 아쉽습니다. 벨레너 님의 지식은 분명 후대 용병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텐데…….”

“나는 이제 과거의 사람일뿐이네. 현재는 너희들이 몫이야. 과거의 사람이 현재를 이끌어 간다는 건 말이 안 되지. 안 그런가?”

옳은 말이다.

벨레너라…….

바른 관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서 그런지 마음에 든다.

델리피나 전기에서는 여태껏 단 한 차례도 등장한 적이 없었던 벨레너.

그저 이름만 언급되었을 뿐이다.

그런데 설마 타임 그레이브 속에서 시간을 거슬러 가며 살아가고 있을 줄이야.

리오나는 벨레너에게 예를 표했다.

“나중에 또 이곳에 들러도 될까요?”

“상관없다. 하지만 너무 자주는 오지 않는 게 좋을 거다. 타임 그레이브의 영향을 자주 받으면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별로 안 좋거든. 타임 그레이브에서 평생 살 각오가 있다면 상관없지만.”

“그러고 싶진 않아요.”

리오나는 쓰디쓴 미소를 머금었다.

바깥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 많다.

특히 칠흑이라는 강력한 존재가 활개를 치고 있는데, 타임 그레이브에서의 도피 생활을 택할 순 없었다.

벨레너에게 나와 함께 칠흑의 음모를 막으러 가자는 말을 할 순 없었다.

이미 그는 과거의 사람이니까.

그리고…….

‘떠날 수 없는 이유가 있지.’

나는 라벤더 향이 나는 무덤을 떠올렸다.

벨레너가 농담으로 말했던 첫사랑의 추억이 진짜라는 사실을 아는 건 나, 그리고 뒤늦게 무덤의 존재를 확인한 라스밖에 없었다.

무덤을 찾은 건 반드지만, 반드는 벨레너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나와 라스는 벨레너의 비밀을 지켜 주기로 했다.

드디어 이별의 시간이 다가왔다.

슬슬 타임 그레이브에서 벗어나야 한다.

벨레너의 말처럼 타임 그레이브에 오랫동안 머무르면 시간의 불균형이 육체와 정신에 좋지 못한 영향을 끼친다.

첸버가 우리들에게 손짓했다.

“그럼 슬슬 가 볼까? 용병들에게 떠날 채비를 하라고 지시해 두게. 바로 떠날 테니…….”

“잠깐만요.”

도중에 반기를 든 자가 있었다.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가 남아 있지 않나요?”

베라.

그녀는 우리를…… 아니, 엘라시아를 노려봤다.

그렇군.

잠깐 잊고 있었다.

아주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 * *

엘라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베라. 난 하이 엘프 마을로 돌아갈 수 없어. 너도 지금 상황이 얼마나 심각하게 흘러가는지 잘 알고 있잖아? 데르킨 백작 봤지? 칠흑의 추종자들은 점점 힘을 키워 가고 있어. 그들을 방치해선 안 돼. 놈들의 음모를 우리가 막아야 한다고. 알겠어?”

“그건 인간계의 일일 뿐이에요. 아가씨, 저희는 하이 엘프예요. 왜 이렇게 인간계에 깊게 관여하려고 하세요? 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네요.”

“오히려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너야말로 왜 이해를 못해? 이건 인간계만의 일이 아니야. 전 세계의…… 아니, 이 차원 전체의 일이라고! 넓게 보면 우리 하이 엘프의 일이기도 해. 칠흑이 이 대륙 전체를 집어삼키려고 하는데, 가만히 보고만 있을 생각이야?”

“해결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거예요. 굳이 아가씨가 저 인간 남자들과 한패로 어울리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움직일/필요는 없잖아요. 안 그래요?”

도중에 002…… 아니, 릴리안이 작은 목소리로 ‘난 여자인데…….’라는 말을 중얼거렸다.

그러나 릴리안의 이런 의견은 깡그리 무시되었다.

지금 베라는 눈이 제대로 돌아간 상태다.

이해는 한다.

엘라시아를 다시 하이 엘프 마을로 데려가겠다는 일념 하나로 익숙하지도 않은 인간계에 발을 들였다.

그런데 힘겹게 찾은 엘라시아가 오히려 난 돌아가기 싫다는 식으로 고집을 피우고 있으니, 얼마나 화가 날까?

하지만 엘라시아는 라스 일행에게 없어선 안 될 중요한 인물이다.

엘라시아가 베라에게 끌려가는 일은 없어야 한다.

“베라, 잠깐만 나랑 이야기 좀 하자.”

나는 베라에게 말을 붙이려 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베라의 주변에 각양각색의 속성들을 지닌 정령들이 소환되었다.

정령들은 나를 향해 살기를 뿜어 댔다.

그냥 정령도 아닌 상급 정령들이었다.

다수의 상급 정령들을 동시에 소환하다니.

알고는 있었지만, 베라의 정령술이 얼마나 뛰어난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뛰어난 정령술이 오히려 방해가 되고 있었다.

베라는 눈을 흘기면서 나에게 경고했다.

“다가오지 마세요.”

목소리가 무섭다.

안 그래도 무서운 여자인데 저렇게 정색을 빨고 경고하니까 무서움의 강도가 더 심해졌다.

“아가씨, 분명 저와 약속하셨죠? 전투가 끝나면 저와 함께 하이 엘프 마을로 돌아가겠다고.”

“돌아가겠다고 이야기한 적 없어.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지.”

“그게 그거입니다.”

“아니, 전혀 달라.”

잘한다, 엘라시아!

속으로 엘라시아를 열렬하게 응원했다.

그러나 베라는 고집을 꺾을 줄 몰랐다.

“계속 그렇게 버티시겠다면…… 힘으로라도 데려가겠습니다!”

베라의 손짓에 따라 상급 정령들이 마법을 난사했다.

망할! 진짜 꽉 막힌 여자네!

내가 먼저 조치를 취하기 전에 라스가 움직였다.

엘라시아의 앞에 강력한 불의 벽이 형성되었다.

라스의 불은 정령들의 마법들조차 전부 불태워 버렸다.

“엘라시아는 내 동료다. 네 멋대로 데려가려 하지 마라.”

“당신의 동료이기 이전에 하이 엘프 마을의 차기 족장님이십니다. 전 어떻게 해서든 아가씨를 데려가야겠습니다.”

베라는 진심이다.

더 이상 베라의 행동을 두고 볼 순 없다.

결국 나도 참견하기로 했다.

“베라, 좋은 말로 할 때 정령들 다시 돌려보내. 만약 그렇지 않으면…… 나, 진짜로 화낼지도 몰라.”

“…….”

내 경고에 베라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내가 얼마나 강한지, 베라는 그동안 나와 함께 움직이면서 수도 없이 목격했을 것이다.

베라도 나와 싸운다면 분명 자신이 패배할 것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을 것이다.

아니, 설령 나를 이긴다 하더라도 라스와 주인공의 동료들이 있다.

굳이 라스까지 나서지 않아도 된다.

릴리안 선에서 충분히 정리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베라가 약하다는 소리는 절대로 아니다.

그녀는 강하다.

상급 정령을 저렇게 동시에 다수를 소환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한 재능이다.

‘엘라시아 못지않은 능력을 지닌 캐릭터였네.’

가만, 이렇게 생각해 보면 나는 라스 부럽지 않을 정도로 동료 복이 많은 거 아닌가?

물론 이상한 녀석들이 많긴 하지만.

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베라는 항전의 의사를 굽히지 않았다.

오히려 무기를 꺼내 들었다.

“끝까지 해보죠.”

의지 하나는 마음에 든다.

그러나 마음에 드는 건 마음에 드는 거고…….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베라를 제압하는 수밖에.

라스와 나는 눈빛을 교환했다.

데르킨 백작전 이후에 벌어질 두 번째 전투.

그러나 상황은 베라가 압도적으로 불리하다.

우리가 움직이기 전에 한 남자가 중재를 나섰다.

“다들 진정해. 머리도 좀 식히고. 너무 열이 올라온 거 같은데 대화를 통해 해결해 보자고. 대화를 통해서.”

라스의 동료, 엔드라가 나선 것이다.

엔드라는 우리에게 눈짓을 했다.

자기가 화술(話術)로 베라의 투항 의지를 없애 보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엔드라가 나서 준다면 나야 좋지.

말재주가 굉장히 좋은 엔드라라면, 꽉 막힌 성격의 소유자인 베라라 하더라도 어떻게든 잘 설득할 수 있을 거라 예상된다.

엔드라는 양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자, 자, 난 무기 같은 거 안 가지고 있어. 베라 양을 공격할 생각도 없고.”

“…….”

“설마 싸울 의지가 없는 상대방에게 막 공격을 퍼붓거나 하진 않겠지?”

평화를 사랑하는 종족.

그들이 바로 엘프다.

물론 예외적인 케이스가 있긴 하지만, 대게는 호전적이지 않은 편이다.

베라는 정령들을 뒤로 물렸다.

그러나 언서먼(Unsummon)은 하지 않았다.

수틀리면 언제든 다시 싸울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겨 둔 것이다.

‘엔드라를 믿어 보자!’

내가 괜히 비싼 돈과 시간을 들이면서 엔드라를 살린 게 아니다.

물론 엔드라는 내가 그의 목숨을 구해 줬다는 사실을 모를 테지만.

그래도 나는 그 은혜를 ‘베라 설득하기’로 갚아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베라 양, 이 세계는 지금 칠흑이라는 유례없는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알고 계신가요?”

“너무 잘 알고 있어서 탈이에요.”

“그럼 라스와 저희가 최전선에서 칠흑의 세력과 싸우고 있다는 것 또한 잘 아시겠군요.”

“예, 그래서 더욱 아가씨를 당신들에게 맡길 수 없는 겁니다. 자칫 아가씨의 생명이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까요.”

“엘라시아 양은 저희에게 많은 도움이 되는 존재입니다. 인류를 위해서…… 정정하죠. 델리피나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를 위해서 열심히 칠흑과 싸우고 있는 분입니다. 그런 분을 갑자기 데려가겠다고 하면 큰일이지 않습니까? 이 세계가 멸망할지도 모릅니다.”

“아가씨가 당신들에게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되는지 전 몰라요. 그리고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굳이 아가씨가 위험을 자초하면서 싸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이 엘프는 하이 엘프만의 싸움의 방식이 있어요. 인간인 당신이 그걸 알 리가 없죠.”

“…….”

어이, 엔드라.

거기서 입을 다물면 안 되잖아!

말 잘하는 캐릭터 속성을 이럴 때 내세우라고.

빨리 어떻게든 저 고집불통 하이 엘프 아가씨를 설득해 봐.

“좋습니다, 베라 양. 그럼 다른 관점으로 생각을 해보도록 하죠. 하이 엘프들은 강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계의 위기가 도래했음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나서질 않습니다. 그나마 엘라시아 양이 나와서 이 정도 활약을 해 주니 다행이죠. 엘라시아 양이 솔선수범해서 움직인다면, 다른 하이 엘프들도 엘라시아의 모습에 감동받아 ‘우리도 세계를 위기에서 구출해 내야지!’ 하는 적극성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저희 하이 엘프가 왜 그런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야 하죠?”

“세계의 위기니까요.”

“세계의 위기지, 하이 엘프의 위기는 아니잖아요? 그리고 설령 세계를 구했다고 치죠. 하지만 그 대가로 아가씨를 희생한다는 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 전 그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해요. 희생을 통해 얻은 승리가 과연 진정한 승리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건 승리가 아니에요. 희생당하지 않은 입장에서나 승리지, 희생당한 입장에선 ‘승리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패배’죠. 전 아가씨가 희생당하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아요.”

“…….”

망했네.

엔드라가 말을 못하는 건지, 아니면 베라가 말을 잘하는 건지 구분이 안 간다.

어쩐다, 그냥 힘으로 베라를 제압할까?

하지만 뒷수습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라스에게 엘라시아가 필요하듯, 나에겐 베라가 필요하다.

골치가 아프다.

곤란한 상황이 이어질 무렵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나서야 할 것 같군.”

용병왕 벨레너.

그가 갑자기 해결사를 자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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