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
시간의 무덤 (4)
그동안 하고 싶은 말들을 최대한 압축하고 압축해서 쏘아붙였다.
그럼에도 데르킨 백작은 인상 하나 찌푸리지 않았다.
“자네 뜻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데르킨 백작은 왼팔의 옷소매를 걷어붙이기 시작했다.
라스가 나에게 경고했다.
“조심하세요, 로인 씨. 녀석은 강합니다!”
“저도 잘 알고 있어요.”
데르킨 백작은 중간 보스 주제에 여기까지 올라온 자다.
《델리피나 전기》에서의 데르킨 백작을 떠올리면 안 된다.
놈은 강하다.
강해서 3권 후반부까지 살아남은 게 아니다.
살아남았기에 강하다.
데르킨 백작의 팔에 11개의 검은 보석이 박혀 있었다.
칠흑의 조각이다.
“미친……!”
나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혼자서 11개나 되는 칠흑의 조각을 가지고 있었을 줄이야!
데르킨 백작이 중간 보스임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칠흑의 조각 하나도 강한데 그걸 11개나 가지고 있으니, 누가 저 자를 보고 약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저 정도면 중간 보스급은 넘어선 거 같은데?’
좀 더 데르킨 백작을 견제했어야 했나?
내가 너무 방관한 것 같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데르킨 백작을 없앤다!
데르킨 백작이 지닌 첫 번째 칠흑의 조각이 검은 연기를 뿜어 댔다.
검은 연기는 짐승의 형태로 변했다.
첫 번째 조각, 카우(Cow).
인터넷에서 흑우, 흑우 하면서 놀리는 댓글을 가끔 보긴 했는데, 눈앞에 있는 흑우는 달랐다.
푸릉!
콧김을 뿜어 대는 첫 번째 조각이 우리를 향해 돌진해 오기 시작했다.
엘라시아가 베라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니라는 거, 이제는 잘 알겠지?”
“……어쩔 수 없네요. 단, 전투가 끝나면 어디 도망가거나 하지 마세요. 아셨죠?”
“약속할게!”
“이번에도 약속 어기면, 저 진짜 화낼 거예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약속들을 어겨 온 거냐, 엘라시아.
두 하이 엘프는 대지의 정령을 소환해 흑우의 진로를 방해했다.
그러나 카우는 머리로 솟아오른 바위벽을 들이박으면서 우리 쪽으로 매섭게 돌진했다.
포스가 장난이 아니다.
‘내가 나설 차례인가!’
힘이라면 이쪽도 힘으로 나오면 된다.
폭주 기관차처럼 달려오는 흑우의 뿔을 양손으로 부여잡았다.
몸이 뒤로 쭉 밀려났다.
‘뭐가 이렇게 세?’
이를 악물었다.
용신단 레벨이 70에 달했다.
여태껏 힘에 부친다는 느낌을 거의 받은 적이 없는데, 흑우의 돌진은 여러모로 충격 그 자체다.
때마침 원군이 도착했다.
“대장님! 저도 돕겠습니다!”
광기의 정령의 힘을 개방한 가르시아가 흑우의 왼쪽 뿔을 잡으면서 힘겨루기에 동참했다.
가르시아가 합류하니 한결 나아졌다.
하나 문제가 발생했다.
“그건 시작에 불과하다.”
데르킨 백작은 또 하나의 조각의 힘을 발동시켰다.
다섯 번째 조각, 울프(Wolf).
두 마리의 늑대가 빠른 속도로 우리를 향해 달려왔다.
‘돌아 버리겠네!’
흑우 한 마리만으로도 벅찬데. 늑대까지 상대할 겨를은 없다.
하나 이 전투는 나 혼자만 치르는 게 아니다.
동료들이 있다.
“한 마리는 내가 맡도록 하지!”
아이템 헌터, 카이딘이 나섰다.
다른 한 마리는 파이스의 몫이었다.
원래 속도 담당은 반드였지만, 반드는 지금 에나와 함께 마리를 마크해야 했기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사실 전투가 난장판이 되어 버리면 누가 어느 담당을 맡고, 포지션을 차지하고 이런 건 다 소용이 없다.
그냥 싸우는 거다, 지금처럼.
더 심한 개판을 만들기 위함인지 데르킨 백작은 3개째 칠흑의 조각을 발동시켰다.
네 번째 조각, 엔트(Ant).
지금까지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양의 검은 연기가 생성되었다.
검은 연기 사이로 속속들이 등장하는 거대 개미들.
스태프를 휘두르던 파이스는 짧게 읊조렸다.
“오 마이…… 갓……!”
내 심정을 아주 잘 대변해 줬다.
“가르시아! 잠깐 혼자서 이 말랑카우 상대 좀 해줘!”
“예? 말랑카우가 뭡니까?”
“이 소 녀석!”
“아, 알겠습니…… 닷!”
소와 인간의 힘겨루기에서 벗어난 나는 개미 군단의 머리 위를 밟으며 폴짝폴짝 뛰어갔다.
이대로 계속 대치가 장기화되면 우리가 불리하다.
소환사의 약점은 뭐다?
소환사 자신이다!
퍼엉!
공중으로 크게 뛰어오른 나는 데르킨 백작의 머리를 터트릴 심산으로 주먹을 내질렀다.
그러나 데르킨 백작은 사이드 스탭을 밟으면서 나의 공격을 그대로 흘려 버렸다.
그리고 검을 빼 들어 내게 휘둘렀다.
동작 하나하나에 군더더기가 없었다.
마치…….
‘라크스 공작을 보는 듯해!’
하나 그 라크스 공작과 거의 호각으로 싸웠던 사람이 바로 나다.
팔목 보호대를 들어 올렸다.
깡!
그대로 검을 쳐 낸 뒤에 데르킨 백작과의 거리를 좁혔다.
아무리 데르킨 백작이 강하다 해도 이건 못 당할 거다!
-생명의 불씨, 글레드를 소환합니다.
화이트 플레임이 내 손에서 점화되었다.
용신단 레벨이 오르다 보니 글레드의 소환 시간도 많이 늘었다.
5분가량 될 거다.
‘그 정도면 데르킨 백작을 쓰러뜨리기에 충분한 시간이지!’
글레드가 있으니 두려울 것이 없다.
한편 내 손에 맺힌 글레드를 본 데르킨 백작은 믿기 힘들다는 눈빛을 했다.
“골칫덩이가 두 명일 줄은 몰랐군.”
라스가 글레드를 가지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겠지.
하지만 내가 글레드를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을 거다!
난 곧장 데르킨 백작의 심장을 노렸다.
검은 심장을 뽑아낸다!
그전에 데르킨 백작의 또 다른 조각이 빛났다.
두 번째 조각, 크로우(Crow)였다.
-까아악!
갑자기 튀어나온 까마귀 떼가 나의 시야를 방해했다.
까마귀들을 무시하고 데르킨 백작이 있을 법한 곳으로 손을 뻗었지만, 이미 녀석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망할 까마귀 녀석들!”
데르킨 백작을 없앨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아직 싸움이 끝난 건 아니다.
기회는 또다시 찾아온다.
나를 노리고 달려들던 까마귀 떼들은 002…… 아니, 릴리안의 마법에 의해 순식간에 불타 버렸다.
그동안 라스는 데르킨 백작의 뒤를 노렸다.
라스 또한 글레드를 가지고 있다.
칠흑의 조각에게 글레드는 쥐약이다.
데르킨 백작은 처음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귀찮은 것들!”
남은 까마귀들이 라스에게 달려들었다.
라스는 글레드 말고 다른 불을 소환해 까마귀들을 소멸시켰다.
시야가 트였을 때, 라스는 글레드의 불을 던졌다.
칠흑의 조각이 박혀 있는 데르킨 백작의 왼팔을 노렸으나, 그전에 오른팔로 글레드의 불을 막았다.
오른팔을 시작으로 전신으로 옮겨 붙기 전에 데르킨 백작은 스스로 팔을 절단했다.
외팔이 된 데르킨 백작.
그러나 여타 다른 검은 괴물들이 그렇듯, 데르킨 백작 역시 팔을 재생시키기 시작했다.
데르킨 백작은 글레드를 상대하는 법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듯했다.
‘하긴, 라스랑 지겹도록 붙어 봤을 테니까.’
모르는 게 더 이상하겠지.
하지만…….
‘나랑은 처음 붙어 보는 거잖아!’
마침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용의 숨결 스킬을 사용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스킬을 충전하여 사용하면 더 강력한 공격을 가할 수 있습니다.
용의 숨결에 글레드를 결합하면 어떻게 될까?
시도해 보기로 했다.
“이거나 먹고 꺼져!”
이름하야 글레드 브레스!
화르르르르륵!
굵직한 흰색 불기둥이 데르킨 백작을 집어삼킬 듯 날아들었다.
데르킨 백작은 글레드 브레스를 피하기 위해 몸을 날렸으나…… 온전히 피하진 못했다.
하반신이 날아가 버렸다.
팔 하나와 두 다리를 잃은 데르킨 백작.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거대한 까마귀가 날아와 두 다리로 데르킨 백작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심각한 타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데르킨 백작은 고통을 전혀 느끼지 않았다.
이미 녀석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듯했다.
이제 데르킨 백작은…… 괴물이다.
이 세계를 삼키려 하는 괴물!
마침 데르킨 백작의 소환수를 제거한 카이딘이 다시 육체를 복원시키기 시작한 데르킨 백작을 보며 혀를 찼다.
“진짜 질기다, 질겨! 저 아저씨, 도대체 어떻게 해야 죽일 수 있을까?”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라스 일행과 나, 그리고 R팀 정예 용병들이 힘을 합쳤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데르킨 백작을 쓰러뜨리지 못했다.
데르킨 백작이 이렇게 강할 줄은 몰랐다.
‘중간 보스 주제에 많이 컸네.’
너무 크게 놔뒀다는 게 좀 신경이 쓰인다.
다시 몸을 복구한 데르킨 백작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여기서 열한 번째 조각을 사용하게 될 줄이야…….”
원래 원작에선 데르킨 백작이 가지고 있는 칠흑의 조각의 개수가 5개에 불과하다.
그러나 지금은 11개나 가지고 있다.
하나하나가 매우 강력하다.
문득 흑우와 힘겨루기를 하던 때가 떠올랐다.
그걸 떠올리면 손이 부르르 떨릴 지경이다.
우리 모두는 바짝 긴장했다.
그러나 중간에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까지.”
시선이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향했다.
흰 턱수염을 기른 노인이 우리와 데르킨 백작을 번갈아 응시했다.
“누구 마음대로 시간의 무덤에서 소란을 피우라고 했나?”
누구지?
처음 보는 노인이다.
인물 정보를 확인하려고 할 때였다.
마리가 화가 난 모양인지 언성을 높였다.
“노인네가 노망났나? 넌 뭔데 감히 우리 백작님 보고 뭐라고 하는 거야!”
망설임 없이 칼날 채찍을 휘둘렀다.
하나 칼날 채찍은 노인의 앞에서 멈췄다.
노인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칼날 채찍이 알아서 멈춘 것이다.
“뭐, 뭐지? 갑자기 왜 이래!”
칼날 채찍이 자신의 통제에 따르지 않아서 당황한 모양이다.
데르킨 백작의 눈이 가늘어졌다.
심상치 않은 노인임을 감지한 것이다.
“마리, 루크에게 전해라. 여기서 후퇴하겠다고.”
“네? 백작님! 저자들을 다 없앨 수 있는 기회인데, 그걸 날려 먹을 수는 없…….”
“내 말에 거역하겠다는 건가?”
“…….”
마리는 금세 입을 다물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데르킨 백작의 말은 절대적이다.
“알았어요.”
그녀는 빠르게 모습을 감췄다.
이후, 데르킨 백작의 모습도 점차 흐려지기 시작했다.
“기회가 있다면 또 보도록 하지, 생명의 불씨를 가진 자들이여.”
저 재수 없는 녀석을 또 봐야 하다니.
구역질이 올라올 정도다.
어쨌든 데르킨 백작은 이제 사라졌으니까 그렇다 치자.
저 노인은 도대체 누구지?
이제 우리의 관심사는 노인에게로 향했다.
카이딘이 먼저 나서서 물었다.
“어르신은 누구십니까?”
“…….”
노인은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말을 붙이기 전에 우리가 누군지 궁금해하는 눈빛이었다.
남에게 이름을 묻기 전에 자기소개부터 먼저 하는 게 예의지.
내가 먼저 나서기로 했다.
“블루로즈단 R팀 대장, 로인이라고 합니다.”
뒤이어 라스도 노인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떠돌이 모험가, 라스입니다.”
나와 라스는 각각 R팀 용병들, 그리고 일행에게 후딱 자기소개를 하라고 압박을 넣었다.
한 차례씩 자기소개 순번이 다 돌았다.
그제야 노인은 입을 열었다.
“시간의 무덤지기, 벨레너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