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9
시간의 무덤 (3)
루크는 나의 반응을 보더니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식으로 답했다.
“그래, 그렇게 나와야 재미있지!”
들고 있던 낫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자 매복해 있던 추종자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우리 용병단보다는 숫자가 많아 보였다.
‘중간에 검은 괴물도 섞여 있어.’
절로 혀를 찼다.
이렇게 많은 추종자 세력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전면전이라는 말에 걸맞는 전력이다.
루크는 우리를 향해 낫을 겨눴다.
“백작님에게 한 발자국도 다가가지 못하게 해라!”
우리를 향해 우르르 달려드는 추종자들.
검은 괴물이 된 레발루프도 ‘쿵쿵’ 소리를 내며 달려들었다.
참으로 어마어마한 광경이다.
이럴 줄 알고 스킬 하나를 배워 뒀다.
“저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갈라지세요! 괜히 휘말릴지도 모르니까 조심하시고요!”
용병들은 최대한 나에게 멀리 떨어졌다.
신 스킬을 사용할 때가 왔다.
-용의 숨결 스킬을 사용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스킬을 충전하여 사용하면 더 강력한 공격을 가할 수 있습니다.
알고 있는 내용이다.
원래 용의 숨결, 즉 브레스는 드래곤의 입에서 빔처럼 발사된다.
그러나 나는 현재 인간의 몸을 하고 있다.
용신단으로 드래곤의 능력을 얻긴 했지만, 인간의 몸으로 입에서 브레스를 발사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리고…… 멋도 없고.
그래서 한 가지 방법을 떠올렸다.
다리를 쫙 벌렸다.
그런 뒤에 양손을 오른쪽 옆구리에 붙였다.
“에네×기…….”
양손을 앞으로 쭉 뻗었다.
“……파!”
어릴 적에 봤던 모 애니메이션에서 나온 전설의 그 기술!
초등학생 때 애들끼리 심심할 때마다 날렸던 바로 그 모션을 사용했다.
내 손바닥에서 강력한 에너지 탄이 발사되었다.
전방으로 쭉 뻗어 나가는 마나 빔.
목표는 잠식된 몬스터, 레발루프였다.
레발루프의 몸 절반이 용의 숨결에 의해 소멸되었다.
녀석이 쓰러졌다.
그러나…….
‘죽진 않았어!’
무시무시한 재생력이다.
만약 레발루프가 에픽 등급이 아니었더라면 놈은 즉사했을 것이다.
그러나 에픽 몬스터라는 이점 탓에 레발루프는 몸이 반이 날아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숨이 붙어 있었다.
그래도 성과가 없는 건 아니었다.
일시적으로 레발루프를 무력화시켰다.
뿐만 아니라 추종자들, 그리고 검은 괴물의 숫자가 많이 줄었다.
이쯤 되니 할 만한 싸움이 되었다.
드레인은 너무 놀란 나머지 나를 멀뚱멀뚱 바라봤다.
“후, 후배! 방금 그, 그건 뭐야?”
“제가 있던 곳에서 유행했던 기술입니다.”
“유행한 것치고는 너무 위험한 기술이잖아!”
위험하진 않다.
그냥 흉내만 냈을 뿐, 실제로 빔이 나간 건 아니니까.
같은 팀조차 당황하게 만드는 용의 숨결.
그러나 이내 다시 평정심을 되찾은 용병들은 무기를 들고 사기가 떨어진 추종자들을 향해 달려 나갔다.
“돌격하라!”
“지금이 기회다! 놈들을 쓸어버려!”
전쟁은 결국 기세 싸움이다.
적의 사기가 크게 꺾였을 때를 노려야 한다.
반면 낭패를 당한 루크는 짜증 섞인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다.
“언제나 날 방해만 하는구나, 로인!”
“그래? 방해가 되었다니 기쁘네. 칭찬해 줘서 고마워!”
나는 일부러 비아냥거리는 투로 답했다.
낫을 든 루크는 오직 나만을 노리듯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저번에 만났을 때보다도 더 빨라진 것 같다.
팔목 보호대를 찬 팔을 들어 올려 놈의 낫을 막아 냈다.
까앙!
자유로운 왼손으로 루크의 옆구리를 노렸다.
그러나 루크는 낫을 버리고 뒤로 물러서며 내 공격을 회피했다.
주인을 잃은 낫.
그러나 낫은 스스로 의지를 가진 것처럼 자유롭게 움직이며 나를 공격했다.
“귀찮게 구네!”
낫을 잡아 그대로 분질렀다.
낫은 검은 연기의 형태로 되돌아가더니, 이내 루크의 손에 의해 다시 낫의 외형으로 복원되었다.
심지어 아까보다 더 크고 튼튼해진 듯했다.
나는 루크에게 물었다.
“너는 촉수 안 쓰냐? 잠식된 자들은 대게 촉수를 많이 쓰던데.”
“안 쓴다.”
“왜?
공격 자세를 취하는 루크.
그런 뒤에 짧게 말했다.
“멋없잖아?”
짜식.
겉멋만 잔뜩 들었네.
낫의 형태가 변하기 시작했다.
‘철컹!’ 하는 소리와 함께 점점 거대해지는 루크의 낫.
얀의 업다운사이징 능력을 연상케 만들었다.
저 낫은 거의 루크의 신체 일부나 다름이 없다.
움직이는 것도, 크기 조절도 자유자재로 가능할 터.
크기를 키운 낫을 수평으로 크게 휘둘렀다.
나 혼자 살겠답시고 피해 버리면, 뒤에 있는 용병들의 하반신이 잘려 나갈 것이다.
내가 택한 건 방어다.
다시 한번 팔목 보호대로 낫을 막았다.
팔을 통해 전해지는 충격이 어마어마했다.
부르르 떨릴 정도였다.
‘힘으로 나를 이렇게까지 몰아붙인 놈은 없었는데.’
역시 루크, 저놈은 보통내기가 아니다.
한동안 나와 루크의 힘겨루기가 계속될 무렵, 제나드가 대검을 크게 휘두르며 루크를 노렸다.
기습 공격은 제대로 먹혀들어 갔다.
루크의 왼쪽 팔을 잘라 내는 대에 성공한 제나드.
그러나 제나드의 공격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블루로즈단을 무시하지 마라, 괴물 녀석!”
후웅!
제나드의 대검은 루크의 허리를 잘라 냈다.
빠른 2연격.
사람 몸보다 더 큰 대검을 들고 할 수 있는 공격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정교하고 빨랐다.
단장은 역시 아무나 하는 게 아닌가 보다.
하나 루크는 이런 걸로 쓰러질 녀석이 아니다.
금세 몸을 다시 재생시키기 시작했다.
그때, 숲 안쪽에서 강한 폭음이 들려왔다.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
그리고…….
흰색의 불꽃.
‘글레드의 흔적이야! 저기에 라스가 있군!’
그 말은…… 데르킨 백작도 있다는 소리겠지.
제나드는 나를 부르며 숲 쪽을 가리켰다.
“먼저 가라. 저놈은 내가 맡을 테니까.”
“괜찮겠어요? 쉽지 않은 상대인데…….”
“저놈의 의도는 여기서 우리들의 발목을 붙잡는 거다. 그렇게 흘러가게 놔둘 순 없지.”
제나드의 말대로다.
안 그래도 힘든 싸움이다.
그렇다고 놈들의 생각대로 움직이면 더 힘든 전투가 될 것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를 뜨려고 할 때였다.
루크의 낫이 나를 노렸다.
“어딜! 아직 즐기려면 멀었어!”
루크의 광기 어린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제나드가 날린 단검이 그대로 적중한 덕분에 낫의 궤도가 틀어졌다.
“네 상대는 나다. 정신 나간 녀석아.”
루크와 처음 만나는 것일 텐데 어쩜 저렇게 정확하게 루크에 대해 잘 파악한 걸까?
이것이 바로 단장의 안목이라는 거군.
그럼 루크는 제나드에게 맡기기로 하고.
나는 R팀 용병들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대장 직속 소대원들은 내 쪽으로 모여! 지금부터 데르킨 백작의 뒤를 치러 간다!”
이 날을 위해 나는 내 부대를 따로 만들어 운영해 왔다.
여기에 한 사람을 더 추가하기로 했다.
“가르시아! 2소대는 데미안에게 맡기고 너도 와라!”
“예, 대장님!”
“그리고 선배! 저를 대신해서 R팀 통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드레인은 엄지를 추켜올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제부터 지옥으로 향하는 길이 펼쳐질 것이다.
이 지옥 길에 베라를 데려가는 게 과연 옳을까?
나는 이런 의문이 들었다.
베라를 엘라시아와 만나게 해도 괜찮은 걸까?
“베라. 만약에 말이야. 정말 만약에 말인데.”
“뭔가요? 갑자기.”
“이런 전장에서 엘라시아와 마주치면 어떻게 할 거야?”
“데려가야죠. 하이 엘프들의 마을로.”
“이런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네.”
이 굳은 신념을 보라.
조금은 융통성이 있어도 괜찮을 텐데, 자신의 신념을 절대로 굽히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신념이 아니라 고집일지도…….
그래도 베라를 안 데려갈 수는 없다.
R팀 용병들 중에서 베라의 능력이 가장 출중하다.
뒷일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일단 눈앞에 놓인 일부터 먼저 해결하자.
* * *
검은 연기와 흰색의 불꽃이 충돌하는 곳으로 향했다.
숲 안쪽에 위치한 공터.
그곳에서 라스 일행과 데르킨 백작이 이끄는 추종자 세력이 맞붙고 있었다.
추종자 중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페르칸 기사 양성소에서 만났던 흑막, 마리였다.
우리의 접근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것 또한 그녀였다.
“어머, 오랜만이네요. 강사님!”
“그러게 말이야. 그동안 잘 지냈지?”
“네, 백작님 덕분에 잘 지냈죠.”
“그래? 잘됐네.”
나는 씨익 웃었다.
“그간 충분히 잘 지냈으니, 이제 앞으로 잘 못 지내도록 괴롭혀 줄게.”
“저를 괴롭힐 수 있는 건 백작님뿐이에요.”
마리의 칼날 채찍이 내게로 향했다.
허리를 숙여 칼날 채찍의 공격을 가볍게 회피했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는 칼날 채찍은 나뿐만 아니라 나와 함께 온 R팀 용병들도 동시에 노렸다.
반드는 속도에 박차를 가했다.
“라드리치 5레벨, 개방!”
반드의 움직임이 배로 빨라졌다.
칼날 채찍조차 반드의 움직임을 따라잡지 못했다.
애초에 저런 스피드를 가지고 있었다면 진작 좀 활용할 것이지.
다른 쪽에선《델리피나 전기》의 주인공, 라스는 데르킨 백작과 치열한 혈투를 벌이고 있다.
라스와 함께 다니는 일행들도 눈에 보였다.
카이딘, 002, 내 덕분에 생명연장의 꿈을 이루게 된 엔드라, 그리고…….
엘라시아.
“아가씨!”
엘라시아를 보자마자 베라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이런, 벌써 들켰나?
엘라시아도 여기서 베라를 만날 줄은 몰랐던 모양인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네가 여긴 어떻게……?”
“아가씨를 찾아 저도 인간계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설마 여기에 계실 줄은…… 저와 함께 마을로 돌아가시죠. 어서!”
“지금?”
“당연하죠!”
아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지금 세계의 운명을 걸고 전투를 벌이고 있는데, 고향으로 돌아가느니 어쩌느니 하는 말을 왜 해?
엘라시아는 고개를 격렬하게 가로저었다.
“지금은 힘든 거, 너도 알잖아. 일단 나중에 이야기하자. 응?”
“또 그런 식으로 도망치려고 하시는 건가요? 이번에는 안 속을 겁니다!”
잔뜩 화가 난 모양인지 베라는 성큼성큼 엘라시아가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이런,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안 좋은 상황이다.
베라를 말리려고 할 때였다.
“하이 엘프들끼리의 말싸움이라니, 진귀한 장면이군. 하지만 내가 앞에 있을 때에는 한눈팔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데르킨 백작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방으로 뻗은 그의 손이 다른 형태로 변했다.
검은 연기가 데르킨 백작의 팔과 동화되어 짐승의 얼굴로 바뀌었다.
크르릉!
뾰족한 송곳니를 드러내며 엘라시아와 베라를 물어뜯으려 했다.
‘어림없지!’
아직 지속 시간이 남아 있는 드래곤 클로로 짐승의 목을 베어 냈다.
물론 이걸로 데르킨 백작을 무력화시켰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잘려 나간 짐승의 목은 검은 연기가 되어 데르킨 백작의 몸에 흡수되었다.
그는 나를 바라봤다.
“안타깝군. 로인, 자네라면 나를 이해할 줄 알았는데……. 이 세계에 정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왜 이해하지 못하나?”
데르킨 백작과 대화가 가능해졌으니, 그동안 하고 싶은 말을 다 토해 내기로 했다.
“필요하지. 필요해. 하지만 당신이 주장하는 그 과정이 문제야. 모든 것을 파괴하고 다시 새롭게 이 세계를 정립시킨다? 그리고 인류가 어긋나가지 않게 직접 통솔한다? 누굴 위한 방식이지? 오로지 자기만족을 위한 방식이잖아. 이기적인 인간아.”
분이 안 풀렸으니까 한마디만 더하자.
“중간 보스면 중간 보스답게 이만 사라져. 구질구질하게 계속 남아 있지 말고.”
아, 이제야 속이 시원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