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8
시간의 무덤 (2)
타임 그레이브로 향하기 전에 우리 R팀은 B팀, 그리고 S팀과 합류했다.
그야말로 대규모 행진이다.
식인 호수의 경우에는 B팀 없이 R팀과 S팀만 따로 출정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블루로즈단의 전원 출정.
진귀한 장면이었다.
첸버도 놀라움을 드러냈다.
“부단장을 오랫동안 맡아 왔지만, 블루로즈단 전원이 한 의뢰에 투입되는 건 처음 보는군.”
제나드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여태껏 이런 일이 없었다고 한다.
레이샤르 덕분이군.
아니, 엄밀히 말하면 데르킨 백작 덕분이라고 말해야 하나?
나는 이동 중에 마일에게 손짓했다.
“데르킨 백작 일행은 어디쯤 지나고 있어?”
“이미 타임 그레이브 입구에 도착한 상태입니다.”
“벌써?”
이런, 내 예상보다 훨씬 빠르다.
“라스 일행은?”
“데르킨 백작 세력과 대치하고 있습니다. 전면전은 피하는 쪽으로 포지션을 계속 잡고 있다고 하더군요.”
레이샤르가 라스에게 말을 전해 뒀을 것이다.
블루로즈단이 도우러 갈 예정이니, 괜히 무리하게 전면전을 벌이지 말고 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만 끌라고.
데르킨 백작이 추종자와 연합 라인을 구축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물증이 없기에 데르킨 백작을 함부로 하질 못하고 있는 것이다.
데르킨 백작은 머리가 매우 뛰어난 남자다.
자신의 꼬리를 함부로 드러내지 않는다.
만약 꼬리를 드러내면, 그 순간 자신이 사냥당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데르킨 백작의 민낯을 만천하에 공개하겠어!’
원래 데르킨 백작은 3권 중반에 라스에게 죽임을 당했어야 했다.
왜냐하면 중간 보스에 불과하니까.
그러나 최근 보여 주는 데르킨 백작의 행보는 중간 보스 그 이상의 포스를 보여 주고 있었다.
더 이상 중간 보스라 말할 단계가 아니었다.
어쩌면…….
‘칠흑과 더불어 최악의 적으로 군림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래서 나는 그 싹을 일찌감치 잘라 낼 생각이다.
데르킨 백작이 더 이상 성장하게 놔둬선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정말로 큰일이 될 테니까.
* * *
2일이라는 시간을 소요한 끝에 우리는 타임 그레이브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중에 파이스가 주변 꽃을 가리켰다.
“어라? 꽃들이 뭔가 이상한데요?”
이상하게 느껴지는 게 당연했다.
넓게 펼쳐져 있는 꽃밭.
그러나 우리 쪽에 있는 꽃들은 전부 다 시들어 있었다.
반면 어느 지점을 경계로 아직도 생기가 가득한 모습을 보이는 꽃들이 있었다.
같은 종류의 꽃이다.
심지어 바로 옆에 붙어 있는 꽃밭인데 서로 이렇게 상반된 모습을 보이다니…….
기이한 현상이었다.
수다쟁이 드레인이 자신의 지식을 뽐냈다.
“여기가 타임 그레이브의 경계선이라 그래.”
“어떤 의미입니까?”
“타임 그레이브는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곳이잖아? 같은 시기에 핀 꽃이라 하더라도 서로 다른 시간을 달리고 있지. 그러니까 차이가 날 수밖에 없어. 즉, 이 꽃밭은 타임 그레이브의 경계선이 어디까지인지를 나타내는 거지.”
“오호, 듣고 보니 그럴싸하네요.”
“그럴싸한 게 아니라 그런 거야.”
오랜만에 드레인의 설명충 기질이 돋보였다.
그의 말대로다.
타임 그레이브의 영역이 어디서부터인지, 어느 곳부터 타임 그레이브가 시작되는지 육안으로 확인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구분 짓기 쉽도록 이렇게 꽃을 심어 두기로 한 것이다.
꽃이 활짝 핀 곳부터 타임 그레이브에 들어서게 된다.
경계선에 마주 선 나는 심호흡을 크게 들이쉬었다.
시간이 다르게 흘러가는 곳.
시간의 무덤, 타임 그레이브.
이곳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나는 데르킨 백작과 전투를 벌이게 될 것이다.
선두 그룹부터 천천히 시간의 무덤으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이유 모를 위화감이 느껴졌다.
처음에는 물속에 들어온 그런 기분이 들었다.
답답하고 심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여기가 시간의 무덤이라는 곳이구나.’
말로만 듣다가 직접 내가 체험을 해 보니 느껴지는 게 전혀 달랐다.
답답함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익숙해졌다.
그러나 영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에나는 인상을 잔뜩 찡그렸다.
“여긴 저랑 매우 안 맞는 곳이네요.”
너무 더워서가 아니다.
말로 형용하기 힘든 이질감 때문이다.
타임 그레이브의 영역은 굉장히 넓었다.
끝과 끝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다.
조금 걸어가니 눈앞에 숲이 하나 보이기 시작했다.
고대의 숲에 필적할 정도로 거대한 숲이었다.
여기서 또다시 드레인의 설명이 이어졌다.
“시간의 무덤은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고 있기 때문에 고대 동식물을 많이 볼 수 있어. 물론…….”
쿵, 쿵, 쿵!
매섭게 울리는 발자국 소리.
“……고대의 몬스터도 볼 수 있지.”
드레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숲에서 덩치 큰 몬스터가 튀어나왔다.
등에 다수의 가시 뿔이 달린 공룡 몬스터.
마일이 몬스터의 정보를 알려 줬다.
“레발루프라는 몬스터입니다. 다들 조심하세요. 특히 등에 박힌 가시에 조금이라도 찔렸다간, 맹독으로 인해 그 자리에서 즉사할 수 있습니다.”
커다란 덩치에 날카로운 이빨, 위협적인 꼬리, 그리고 맹독 속성까지.
그야말로 최악의 몬스터가 따로 없다.
심지어 레발루프는 한 마리가 아니었다.
다섯 마리가 차례로 등장했다.
마일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한 마리조차 보기 힘든 몬스터를 다섯 마리나 보다니, 운이 좋군요!”
“이럴 땐 운이 나쁘다고 말해야 하는 거야, 멍청아.”
나도 모르게 마일의 말에 딴죽을 걸고 말았다.
호기심을 충족시킬 수만 있다면 목숨이라도 갖다 바칠 남자가 바로 마일이다.
하지만 난…… 아니, 우리 용병들은 이 자리에서 죽고 싶지 않다.
첸버가 크게 외쳤다.
“S팀이 두 마리를 맡을 테니 나머지 3마리는 R팀, B팀이 알아서 잘 분배하도록!”
고개를 끄덕인 리오나는 나에게 물었다.
“어떻게 할래?”
나는 머릿속으로 이미 포지션을 정해 뒀다.
“B팀이 한 마리, R팀이 한 마리. 이렇게 맡자.”
“한 마리가 비는데?”
나는 말에서 내렸다.
뿌드득, 뿌드득!
뻐근했던 몸을 푼 뒤에 리오나에게 이렇게 말해 줬다.
“남은 한 마리는 내가 맡을게.”
* * *
이미 고대의 숲에서 나는 레발루프와 비슷한 몬스터를 상대해 본 경험이 있었다.
등에 뿔이 돋아 있고 독성 타입이라는 것만 빼곤 나머지 특성들은 대게 비슷했다.
나 혼자서도 상대할 만했다.
독만 조심하면 되니까.
레발루프가 턱을 벌린 채 나를 노렸다.
나는 빠르게 뒤로 몸을 뺐다.
내가 놈과 거리를 벌릴 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바로 꼬리 공격이 날아왔다.
‘생각이라는 걸 할 줄은 아네.’
몬스터 치고는 머리가 나쁜 편은 아닌가 보다.
나는 발로 레발루프의 꼬리를 ‘뻥!’ 하고 차 버렸다.
레발루프의 몸이 크게 회전했다.
레발루프가 무게중심을 잃었을 때를 노리기로 했다.
드래곤 클로를 발동시켰다.
아무리 녀석의 피부가 단단하다고 한들, 드래곤 클로의 날카로움을 견딜 수는 없을 것이다.
다리를 베어 내려고 했다.
그러나 갑자기 레발루프가 서 있던 지면이 우쭉 솟았다.
어스 월.
마법이 발동되었다.
‘설마……?’
불현듯 이런 추측이 들었다.
“에픽 몬스터인가?”
다른 레발루프도 설마 에픽 몬스터는 아니겠지?
그건 또 아니었다.
보아하니 내가 맡기로 한 저 녀석만 에픽 몬스터인 듯했다.
“뽑기 운 한번 지지리도 없네.”
다섯 마리 중 딱 한 마리만 있던 에픽 몬스터를 고르다니, 오늘 일진이 별로 안 좋을 것 같다.
그래도 어쩌겠나?
내 입으로 내가 맡겠다고 했는데 이제 와서 힘드니까 못 맡겠다는 말을 할 수는 없다.
그리고 까짓것 쓰러뜨리면 그만이잖아?
“이렇게 된 이상 네 마나 심장이나 가져가마!”
마나 심장도 삼키면 꽤 많은 경험치를 준다.
에픽 레발루프의 마나 심장을 노리기로 했다.
레발루프의 의지에 따라 돌덩이들이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대다수는 피했지만 그러지 못할 경우에는 주먹으로 돌덩이를 부숴 버렸다.
나는 액티브 스킬, 드래곤 피어를 발동시켰다.
순간 레발루프의 행동이 일시적으로 멈췄다.
공포 상태 이상을 걸진 못했지만, 경직시키는 건 가능했다.
“Asmbr(꿇어라)!”
드래곤 피어에 이은 용언 마법.
드래곤류 스킬 2콤보를 날렸다.
아무리 에픽 몬스터라 해도 드래곤의 능력을 담당할 수는 없다.
쿠웅!
레발루프의 큰 덩치가 땅바닥에 쳐박혔다.
드래곤 클로를 이용해 레발루프의 머리를 잘라 냈다.
툭!
놈의 머리가 땅바닥을 뒹굴었다.
‘예전의 내가 아니라고.’
입 꼬리가 절로 위로 상승했다.
한 놈 처리했고!
나는 우리 팀을 지원하기 위해 움직이려 했다.
그 순간 ‘쿠우웅!’ 소리와 함께 두 마리째 레발루프가 쓰러졌다.
내가 이끄는 R팀이 S, B팀보다 먼저 레발루프를 해치운 것이다.
역시 내 부하들답다.
R팀을 시작으로 S팀, B팀도 차례차례로 레발루프를 제거했다.
내가 미처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도 전에 상황은 이미 종료되었다.
괜히 엘리트 용병 조직이라 불리는 게 아니다.
첸버는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훔쳤다.
“준비운동 치고는 너무 과하게 몸을 푼 거 같은데?”
용병들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난 준비운동거리도 안 된 거 같은데…….
그 와중에 쓰러진 레발루프들을 내려다보던 레임스는 경계 어린 시선으로 해선 안 될 말을 내뱉었다.
“해치웠나?”
“……!”
아, 안 돼!
결코 그 말을 해선 안 된다고!
그건…… 정통 플래그란 말이다!
꼭 저런 대사를 하면 정말로 죽었을 거라 생각했던 적이 먼지를 훌훌 털어 버리고 다시 살아나곤 한다.
만화나 애니메이션, 소설에선 거의 정석적인 패턴이다.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이 느낌이 채 사라지기도 전이었다.
“저거 뭐야!”
용병 한 명이 내가 쓰러뜨린 레발루프의 시체를 가리켰다.
시체 주변에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왜 안 좋은 예감은 항상 맞아떨어지는 걸까?
레발루프는 검은 연기에게 먹혀 검은 괴물로 되살아났다.
잘린 머리는 칠흑의 조각이 가짜 머리로 대체했다.
나는 레임스를 매섭게 노려봤다.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내, 내가? 나, 아무 짓도 안 했어!”
필사적으로 부정하는 레임스.
안 하긴 뭘 안 해.
레임스는 아직도 ‘해치웠나?’라는 대사가 가진 파괴력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는 듯했다.
검은 괴물로 되살아난 레발루프는 우리를 향해 입을 벌리면서 위협을 가했다.
나는 용병들에게 경고했다.
“방금 살아난 녀석, 에픽 몬스터입니다. 주의하세요. 여태껏 상대했던 검은 괴물보다 훨씬 상대하기 까다로울 겁니다.”
“에, 에픽 몬스터가 검은 괴물로……!”
꿀꺽!
여기저기서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긴장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도 그러니까.
검은 괴물이 된 레발루프의 머리 위로 한 남자가 올라탔다.
불행하게도 내가 잘 아는 얼굴이었다.
“너희가 그 소문의 파란 장미들이냐? 오호, 아는 얼굴도 보이네.”
얼굴 반쪽이 칠흑의 조각에 잠식된 남자, 루크.
그는 나를 보면서 씨익 웃었다.
“여기서부터는 출입 금지 구역이다. 그러니까 죽기 싫으면 꽁무니 빠지게 도망쳐. 이 경고가 내가 베풀 수 있는 마지막 자비다.”
자비 좋아하시네.
녀석의 성격상 곱게 놓아줄 리 없다.
도망치려고 하는 순간을 노려 공격할 심산이겠지.
내가 루크에게 들려 줄 대답은 이것뿐이다.
“너나 꺼져.”
테러리스트와…… 아니, 악역과 타협 따윈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