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5
시작의 기억 (1)
탁탁.
양손을 가볍게 털었다.
내 발 밑에는 신음을 흘리며 고통에 몸부림치는 할렌의 부하들이 바닥에 누워 지면과 친밀도를 높이고 있었다.
할렌의 동공은 크게 흔들렸다.
“이, 이게 대체 무슨……!”
“내가 누군지 못 들었냐?”
나는 옷소매를 걷어 올려서 팔목보호대를 보여 줬다.
“블루로즈단 R팀 대장, 로인이다. 설마 너, 내가 평범한 상인이라고만 생각하고 있던 건 아니겠지?”
“……!”
반응을 보아하니 전혀 몰랐나 보다.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중에서 내가 용병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할렌도 그중 하나였다.
나는 손을 풀었다.
뿌드득, 뿌드득!
주먹에서 소리가 새어 나올 때마다 할렌은 몸을 크게 움찔거렸다.
“좋은 말로 할 때 내 눈앞에서 사라져라.”
경고했다.
그러나 할렌은 쉽게 걸음을 떼지 못했다.
후율의 유산 때문이었다.
할렌 상단은 연이은 사업 확장 실패 탓에 적지 않은 빚을 떠안았다.
후율의 유산이 없으면 할렌은 끝이다.
그렇다고 해서 난 할렌에게 동정심을 베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처음부터 정중하게 부탁해 왔더라면 생각이라도 해 봤을 텐데.’
하나 이미 기차는 떠났다.
더 이상의 타협은 없다.
계속 소란을 일으키고 싶진 않았다.
결국 나는 드래곤 피어를 발동시켰다.
“꺼져!”
“히, 히익!”
드래곤의 살기를 비만 덩어리 할렌이 견딜 수는 없었다.
놈은 부리나케 도망쳤다.
운 좋은 줄 알아라, 짜샤.
내가 데르킨 백작 같은 답도 없는 악당이었다면, 그렇게 멀쩡히 살아서 도망칠 수도 없었을 테니까.
‘그나저나 마일 이 녀석은 왜 이렇게 안 나오는 거야?’
뒤를 돌아보려는 순간, 본능이 나에게 경고했다.
위험하다고.
쓰러져 있던 녀석 중 한 명이 단도를 들고 나에게 덤벼들었다.
정신을 잃은 척을 했던 건가?
녀석 나름대로 기습 공격을 감행했으나, 이미 눈치채 버렸다.
그런데 내가 반응하기도 전이었다.
갑자기 그림자 하나가 튀어나와 나를 공격하려던 남자의 옆구리를 그대로 발로 ‘뻥!’ 하고 차 버렸다.
남자는 힘없이 옆으로 나가떨어지더니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위험할 뻔했네요, 로인 씨.”
카이딘이 시원스러운 미소를 선보였다.
아니, 사실 위험한 건 아니었는데…….
나 혼자서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었다.
그래도 날 도와준 건 변함없으니 고맙다는 말을 해 줬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뭐 이런 걸 다. 서로 돕고 사는 거죠, 안 그렇습니까? 하하하!”
말 속에 뼈가 있다.
마치 ‘내가 한 번 도와줬으니까, 후율의 유산을 1퍼센트라도 떼 주면 안 될까?’ 하는 듯한 의도가 숨겨져 있었다.
나는 쓴웃음을 애써 삼켰다.
“알았어요. 나중에 크게 보답할게요.”
“역시 로인 씨입니다!”
-카이딘과의 친밀도가 대량 상승합니다.
카이딩…… 정말 알기 쉬운 남자다.
* * *
마일을 데리고 후율 재단으로 향했다.
일루엣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다.
재단 건물 앞에 도착한 나는 입구를 지키고 있는 경비병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후율의 유언장을 가져왔으니까 안으로 들여보내 줘.”
경비병들은 나를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봤다.
그럴 리가 없다고 말하는 듯했다.
말로 주저리주저리 떠들고 싶진 않았다.
나는 유언장을 꺼내 이들에게 보여 줬다.
경비병들은 수십 번 넘게 눈을 끔뻑였다.
“이, 이건……!”
“서, 설마 진짜 유언장입니까?”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여 줬다.
그제야 경비병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재단 간부들을 불러왔다.
간부들 사이에서 휠체어를 탄 한 노인이 우리에게 손짓했다.
“안으로 들어오시오.”
나와 마일은 노인의 말에 따라 재단 건물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평범한 건물이다.
후율의 유산을 보관하고 있다고 해서 뭔가 범상치 않은 건물이리라 예상했는데…….
하나 겉으로 모든 걸 판단할 수는 없다.
노인은 거대한 문 앞에 나를 세웠다.
“만약 그 유언장이 맞는다면, 이 문이 열릴 것이오.”
“어떻게 하면 됩니까?”
“그 자리에 서서 유언장이 문 쪽으로 향하도록 똑바로 펼치시오. 그러면 되오.”
어렵지 않은 방법이었다.
유언장을 조심스럽게 펼쳤다.
그러자 문에서 빛이 하나 새어 나왔다.
유언장에 찍혀 있는 도장을 스캔하더니…….
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오오……!”
여기저기서 놀라움 섞인 감탄이 튀어나왔다.
문 안 쪽은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들어가 봐야 하는 건가?
나는 노인을 바라봤다.
“들어가시오. 당신은 후율 님의 유산을 물려받을 자격이 있는 자, 오로지 그대만이 저곳으로 들어갈 수 있소.”
마일은 입맛을 다셨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 저는 못 들어가는군요.”
“그러게. 아쉽겠네.”
“어쩔 수 없지요. 그래도 로인 님이 계시니까요. 로인 님이라면 제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리라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 믿음을 배신할 생각은 없다.
마일은 나와 같이 고생을 많이 해 온 전우니까.
열린 문 틈 사이로 조심스럽게 한 걸음을 내딛었다.
안으로 완전히 들어왔다 싶을 때.
구우우우우……!
문이 움직이더니 다시 닫혔다.
동시에 어두웠던 실내가 환해졌다.
천장 위에 달린 수많은 라이트 볼.
그 밑에는 눈으로 가늠하기조차 힘들 만큼 수많은 금화가 보관되어 있었다.
금화뿐만이 아니었다.
각종 아이템들도 진열되어 있었다.
‘어마어마하네!’
세계 제일의 갑부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았다.
하나 내가 원한 건 이게 아니다.
카인이 나보고 벨레너의 두 번째 난제를 풀라고 했던 진짜 의미.
나는 그것이 궁금했다.
금은보화가 넘쳐나는 방에 유독 내 시선을 사로잡는 게 있었다.
두 권의 책이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하나는 후율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작성한 자신의 일기장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후율의 일기장에 비해 굉장히 얇은 책…… 아니, 서류였다.
그것을 본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설마 이건……?”
갑자기 검은 글씨에서 밝은 빛이 새어 나왔다.
빛은 하나의 형상을 갖췄다.
드래곤.
나는 이 드래곤의 이름을 안다.
“벨라시오닉……!”
후율이 남긴 유산 중 하나, 그것은 벨라시오닉의 기억이었다.
* * *
이제야 카인이 왜 나에게 벨레너의 두 번째 난제를 클리어하라고 이야기했는지 알게 되었다.
후율은 벨라시오닉의 기억을 자신의 유산으로 남겨 뒀다.
벨라시오닉의 모습을 한 작은 드래곤은 나를 올려다봤다.
“그대가 후율이 인정한 후계자인가?”
“유언장을 찾았으니, 아마 후계자가 아닐까요?”
“익숙한 기운이 느껴지는군. 과연…… 용신단을 복용한 건가?”
미니 벨라시오닉은 웃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사람 얼굴이 아니라서 정확히 어떤 표정을 짓는지는 잘 몰랐다.
“재미있는 자가 찾아왔군.”
나를 ‘재미있는 자’라 지칭했다.
의외다.
지금 이건 벨라시오닉의 기억을 유형으로 재구현한 것에 불과하다.
과거의 데이터를 뿐이니 현재를 인지하고 거기에 반응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벨라시오닉의 기억은 나를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벨라시오닉의 기억은 다시 한번 웃었다.
“내가 어떻게 지금의 너를 인지하고 있는지 궁금한가 보군.”
“고대의 정령입니까? 어떻게 제 머릿속 생각을 그대로 읽을 수 있죠?”
“표정만 봐도 안다.”
벨라시오닉의 기억은 ‘엇흠!’ 하면서 작은 어깨를 으쓱였다.
원래 이런 성격인가?
델리피나 전기에는 벨라시오닉이 어떤 드래곤인지 나온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나는 벨라시오닉의 기억이지만 동시에 벨라시오닉의 혼의 일부이기도 하다.”
“일부요?”
“그래. 내가 칠흑에게 육체를 빼앗기기 직전에 후율이 나의 영혼의 일부를 이 서적에 보관해 뒀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보다 후율이 어떻게 벨라시오닉을 알고 있는지가 더 궁금했다.
“설마 후율이라는 자도 드래곤이었습니까?”
“아니, 그는 인간이었지. 하지만 나와는 둘도 없는 절친한 사이였다.”
그런 자료는 없었다.
벨라시오닉과 후율이 절친한 사이라니.
‘……가만!’
후율의 절친이라 불릴 만한 자가 있긴 했다.
라시오.
설마…….
벨‘라시오’닉!
‘이런 단순한 트릭에 넘어가다니!’
어쩐지 이름치고는 너무 눈에 익다 싶었다.
벨라시오닉의 기억은 작게 탄식을 내뱉었다.
“하나 그 친구는 이 세상에 없지. 시간이라는 건 때로 너무 야속하군. 잠시 느리게 흘러도 좋으련만. 기다림 없이 무정하게 흘러만 가는구나.”
세월을 탓하는 벨라시오닉의 기억.
그전에 탓해야 하는 상대가 하나 더 있지 않은가?
바로 ‘칠흑’ 말이다.
“칠흑에게 잠식당했을 때 영혼을 옮긴 겁니까?”
“그런 셈이지. 끔찍한 녀석이었다. 드래곤인 나의 정신조차도 좀먹을 줄이야……. 그 덕분에 델리피나 대륙에게 본의 아니게 몹쓸 짓을 해 버리고 만 거 같더군.”
라바인 전투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듯했다.
마침 잘됐다.
벨라시오닉의 기억을 통해 확인하고 싶은 게 있다.
크게 두 가지.
우선 첫 번째는 이거다.
“기왕 칠흑에 관련된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하는 말인데, 혹시 칠흑이 어떤 존재인지 압니까? 예를 들자면 어디서 왔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다가 벨라시오닉, 당신을 숙주로 삼게 되었는지.”
“음…… 잘 모르겠군. 기억이 온전치 않아서…….”
그렇다면 바로 두 번째로 넘어가자.
“혹시 카인에 대해 알고 있습니까? 칠흑이 델리피나 대륙을 집어삼킬 거라는 사실을 최초로, 그리고 가장 정확하게 예언한 자입니다. 그자에 대해 아는 게 있다면 사소한 거라도 좋으니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기억이 완전하지 않아서 뭐라 말을 해 줘야 좋을지…….”
“…….”
그럼 어쩔 수 없이 세 번째 질문.
이 질문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도대체 아는 게 뭡니까?”
어렵사리 후율의 유언장을 찾고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얻어 가는 게 아무것도 없다면 얼마나 억울할까?
물론 후율이 남긴 막대한 유산이 있지만, 돈으로 칠흑의 계획을 막을 순 없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칠흑, 그리고 카인에 관한 정보다.
하나 벨라시오닉의 기억은 별 도움이 되질 못했다.
벨라시오닉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나의 온전한 혼이 어디에 있는지는 안다. 만약 그 혼을 각성시킨다면, 생전에 간직했던 내 기억을 다시 꺼낼 수 있을 것이다.”
“그 혼이 어디 있습니까?”
벨라시오닉의 작은 손이 내 쪽을 가리켰다.
설마.
“이미 제가 가지고 있다는 웃기지도 않은 농담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요?”
“농담이 아니라 진담이다. 내 혼은 용신단에 옮겨 놓았다. 지금의 나는 내 혼의 위치를 알려 주는 길잡이 역할만 할 뿐. 나머지는 너 하기에 달렸다.”
벨라시오닉의 몸이 점점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다 되었군. 나머지는 너에게 맡기도록 하마. 그럼 이만.”
“진짜 그대로 사라지는 겁니까? 알려 주는 것 하나 없이? 농담이죠?”
하나 농담은 진담이 되어 버렸다.
이미 벨라시오닉의 기억은 사라진 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종이 위에 적혀 있던 검은 글씨들도 미니 벨라시오닉과 함께 자취를 감췄다.
하, 진짜…….
“카인이란 작자도, 벨라시오닉이란 드래곤도 뭐 이리 무책임하냐……?.”
한숨이 절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