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엑스트라-144화 (144/240)

# 144

후율의 유산 (4)

하루가 지났다.

마일은 오늘도 도서관에 출근 도장을 찍은 내 앞에 두꺼운 서류 다발을 내려놓았다.

“로인 님께서 부탁하신 자료들입니다.”

“빨리 끝났네?”

“예, 조사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후율이라는 사람에 대해 알아보고 싶어져서 파고들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작업 속도가 붙은 거 같습니다.”

“좋은 현상이야.”

나는 마일에게 엄지를 추켜올려 줬다.

양이 굉장히 많다.

하기야, 한때 델리피나의 모든 경제를 쥐락펴락했던 유명 인사니까.

조금만 파도 방대한 자료가 나올 것이다.

출생부터 시작해서 후율의 취향(?)까지 나와 있었다.

‘금발의 거유 취향이라……. 후율도 남자는 남자구나.’

하나 나는 이런 걸 알고 싶은 게 아니다.

후율의 유언장이 보관되어 있는 장소.

그리고 이 장소를 가리키는 힌트를 찾아야 한다.

후율은 결혼을 하지 않았다.

슬하에 자식도 없다.

홀로 살다가 생을 마감한 것이다.

그러나 후율의 인생에 많은 영향을 미친 사람이 몇몇 보였다.

첫 번째 후보, 후율이 사랑했던 유일한 여자, 미네리.

“이 미네리라는 여자에 대한 정보는 없어?”

“로인 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고 미리 구해 뒀습니다.”

역시, 괜히 현자라 불리는 게 아니다.

미네리에 대한 자료를 살폈다.

미네리는 후율과 소꿉친구로 자라 온 여성이다.

특별히 엄청난 미인은 아니었다.

어디서든 흔하게 볼 수 있는 평범한 여성이지만, 이 여성은 세계 제일의 갑부인 후율의 마음을 빼앗은 여인이다.

마일은 미네리라는 여성에 대해 보충 설명을 했다.

“후율이 사랑한 여인으로 나오지만, 사실 두 사람은 사귄 적이 없습니다. 후율의 일방적인 짝사랑이었지요.”

“흠, 그래?”

“미네리에게 고백은 총 5차례 했지만, 모두 거절당했습니다.”

“대단한 여자네. 갑부의 청혼을 거절하다니.”

게다가 보통 부자가 아니다.

델리피나 대륙 최고의 부자, 후율의 청혼을 거절한 것으로 보아선 미네리도 평범한 여자는 아닌 것 같다.

“미네리 말고 다른 여인은?”

“없습니다. 후율은 죽을 때까지 미네리만을 바라본 남자입니다.”

“로맨틱하네.”

미네리가 왜 후율의 청혼을 거절했는지는 잘 모른다.

그렇다고 미네리도 결혼을 한 건 아니었다.

서로 솔로로 살다가 여생을 마감했다.

‘남녀 문제란 참…… 알다가도 모르겠어.’

혹시 일루엣과 미네리의 접점이 있을까 싶어서 찾아봤다.

그러나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사랑 파트는 이걸로 패스하자.’

다른 인간관계를 찾아보기로 했다.

두 번째 후보가 등장했다.

라시오라는 이름의 남자다.

“이자는?”

“후율의 둘도 없는 친구라고 합니다. 라시오에 대한 정보는 1,928페이지를 보시면 나옵니다.”

페이지 넘기는 것도 일이다.

어디 보자…… 라시오, 라시오라…….

“나이가 안 나와 있네?”

“예, 아무리 조사해도 정확한 연령을 알 수 없었습니다. 대신, 라시오에 관련된 증언들을 토대로 살펴볼 때에는 대충 후율과 비슷한 나이로 추정됩니다.”

“특이하네.”

베르투조차 나이를 알아내지 못하다니.

출생 신고가 제대로 안 되어 있는 사람이라도 되나?

……뭐, 그럴 수 있지.

충분히 이해한다.

델리피나 세계가 내가 살던 곳처럼 체계적인 시스템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후율과 라시오에 관련된 일화들을 쭉 살폈다.

후율이 사업에 어려움을 겪을 때 라시오가 적극적으로 도와준 적이 많았다.

그뿐만 아니라 후율의 목숨까지 구해 준 적도 있었다.

‘라시오 이 사람, 모험가인가 보네.’

검과 마법을 동시에, 그것도 능숙하게 다룰 줄 안다고 나오는 걸 보아하니 꽤나 실력자인 듯했다.

보통은 둘 다 빼어나게 구사하는 게 쉽지 않은데…….

두 사람의 관계를 쭉 살펴보다가 도중에 이상한 부분을 포착했다.

마지막 부분이었다.

“‘돌연 라시오가 사라졌다…….’라고 나오는데?”

“그 말 그대로입니다.”

“사라졌다니? 죽은 거야?”

“그것도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생사 불명이라…….

알면 알수록 희한한 사람이다.

다시 페이지를 앞으로 넘겼다.

라시오는 아이템 헌터로 활동했던 모양인지, 후율에게 가끔 값어치 있는 물건들을 선물하곤 했다.

그중에는 벨라시오닉의 보물로 추정되는 것들도 몇 개 섞여 있었다.

‘실력이 굉장한 아이템 헌터야. 카이딘이 보면 혀를 내두르겠네.’

카이딘도 아이템 헌터계에서 한가락하는 사람인데 라시오의 업적에 비하면 명함도 못 내밀 듯싶었다.

아이템 명단을 쭉 살펴보던 나는 어느 한 물품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본 거 같은데?”

“어느 거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 책장 말이야.”

책장 그림을 가리켰다.

“로인 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저도 본 기억이 납니다.”

나와 마일의 시선은 A구역으로 향했다.

틀림없다.

우리가 이곳에 온 첫 날 들렸던 A구역, 그곳에 이것과 똑같이 생긴 책장이 있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

A구역 291번 책장.

이거다!

“찾았어.”

“역시 로인 님이십니다. 빠르시군요.”

이것이 후율이 라시오에게 선물로 받은 책장이다.

후율은 라시오가 준 책장의 디자인이 자신의 취향에 맞지 않는다며 책장이 필요한 곳이 있다면 기부를 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때마침 확장을 꾀하던 일루엣 대도서관에 다수의 큰 책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후율은 선물 받은 책장을 무상으로 기증하게 되었다.

그 책장이 바로 이것이다.

“여기에 있는 책들 중에 어느 한 책에 유언장이 끼어 있을지도 몰라.”

“그럴 수도 있겠군요. 근데 로인 님, A구역에 있는 책들은 저희가 일루엣에 온 첫날에 다 찾아보지 않았습니까?”

“그때 책장에 안 꽂혀 있던 책들이 몇 개 있었잖아. 그것만 쏙 빼서 확인해 보면 되겠지.”

“과연 그렇군요.”

그 책들은 대여 중이어서 우리가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것들이다.

갑자기 의욕이 샘솟기 시작했다.

“자, 다시 찾아볼까!”

* * *

대여된 책들만 골라서 빼 왔는데도 수십 권이 넘어갔다.

반나절을 투자해 책들을 쭉 살펴봤지만…….

“없네?”

이상하다…….

왜 없지?

분명 이 책장이 힌트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아무런 의미가 없는 힌트였던 걸까?

아니, 그럴 리 없다.

후율과 일루엣 대도서관의 가장 큰 접점은 바로 이 책장이다.

책장 말고 다른 건 없을 것이다.

마일도 나와 같은 의견을 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이해가 잘 안 되는군요.”

“나도 마찬가지야.”

뭐가 잘못된 걸까?

천천히 생각해 보자.

‘내가 놓친 게 있을 거야. 생각하자, 생각…….’

불현듯 한 가지 가설이 떠올랐다.

‘책장 자체에 숨겨져 있는 건 아닐까?’

나는 책장의 옆면을 확인했다.

다른 책장에 비해서 유독 뒤쪽 면이 두껍다.

좀 더 자세히 확인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사서들의 눈치가 보인다.

어쩔 수 없지.

“마일, 부탁 하나만 하자.”

“갑자기 엄청 불안해지는군요.”

“감이 좋네.”

나는 마일에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선물했다.

“사서들 주의 좀 끌어 줘. 2분…… 아니, 1분이면 돼.”

“제가 어떻게 저 많은 사서들의 관심을 끕니까?”

“미친 척이라도 해. 그러면 자연스레 너한테 시선이 몰리겠지.”

“…….”

마일은 늘 자신이 신사이며 젠틀맨이라는 티를 낸다.

하나 지금은 그러한 콘셉트를 버려야 할 때다.

“이번에 잘만 되면 너에게 고급 정보를 팍팍 줄게. 어때?”

“하아…… 로인 님은 정말 저한테 매번 이런 시련을 주시네요. 알겠습니다. 2분 정도 끌어 보겠습니다. 대신, 그 이상은 안 됩니다.”

“땡큐!”

결국 호기심이 창피함을 이겼다.

마일은 A구역 한 가운데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더니 갑자기 소리를 질러 대기 시작했다.

“내 귀에 도청 마법이 걸려 있다!”

조용하던 도서관이 갑자기 마일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뭐야, 저 사람?”

“정신 나간 거 아니야?”

“도청 마법? 뜬금없이 무슨 소리래?”

“몰라. 머리가 이상한 사람인가 봐. 멀리 떨어져 있어야겠어.”

마일은 욕을 먹으면서도 고래고래 소리를 치며 난동을 부렸다.

이런 걸 지켜 주지 못해 미안해…… 줄여서 ‘지못미’라고 하던가?

미안하다, 마일.

사서들이 마일을 제압하기 위해 총출동하기 시작했다.

마일은 사서들을 피해 요리조리 도망치기 시작했다.

‘잘한다, 잘해!’

마일의 희생에 잠시 애도를 표해 주도록 하자.

마일이 시선을 끌어 준 덕분에 나를 관심 있게 지켜보는 사람들은 없어졌다.

좋아, 이때다!

나는 자세를 숙인 후에 책장 밑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흐으읍!”

책장을 들어 올려 앞으로 살짝 이동시켰다.

사람 혼자서 이 무겁고 거대한 책장을 옮긴다는 건 마법이 아니고선 불가능하다.

그러나 내겐 용신단의 능력이 있다.

불끈 샘솟는 용의 기운으로 책장을 이동시킨 나는 벽에서 떨어진 책장의 뒷면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사람의 손을 잘 안 타는 쪽이라 그런지 먼지가 자욱하게 묻어 있었다.

먼지를 뒤집어써 가면서 빠르게 뒷면을 살핀 결과…….

‘있다!’

내 예상대로였다.

손을 밀어 넣을 수 있는 버튼 같은 게 보였다.

버튼을 누르자 손바닥만 한 크기의 작은 면이 열렸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건 편지봉투 하나였다.

내용을 확인했다.

후율이 적은 것으로 추정되는 유언장.

그리고 후율이 직접 작성했음을 나타내는 도장이 찍혀 있었다.

드디어…… 찾았다!

나는 다시 책장을 원위치로 돌려놓은 후에 유언장을 챙기고 바로 움직였다.

마일에게 눈짓을 해 빠져나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고개를 끄덕인 마일.

일단 나 먼저 도서관을 나왔다.

“어휴, 먼지 봐라!”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 내고 털어 내도 계속 나왔다.

청소 좀 제대로 하지…….

나중에 민원이라도 넣어야겠다.

“그나저나 이 녀석, 왜 이렇게 안 나오는 거야?”

그냥 마일을 두고 가 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려던 찰나였다.

갑자기 다수의 남자들이 내 주변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한가운데에서 아는 얼굴이 튀어나왔다.

할렌이었다.

“거기 너.”

할렌은 오른손을 내밀었다.

“내놔.”

“뭘?”

“모르는 척하지 마라. 방금 네가 유언장 챙긴 거 다 봤다.”

눈썰미도 좋으셔라.

내가 유언장 찾는 건 언제 봤대?

뚱뚱하게 생긴 것치곤 눈치 하나는 빠르다.

하지만 나에게 시비를 걸어 온 건 크나큰 실수다.

이 실수를 아직까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인지 할렌은 내게 거듭 강요했다.

“좋은 말로 할 때 내놓는 게 좋을 거야. 내가 고용한 사람들은 악명 높기로 유명한 자들이거든.”

딱 봐도 그렇게 보인다.

인상 하나는 정말 더럽다.

어떻게 이런 자들만 쏙 골라서 고용했는지 신기할 정도다.

남자들은 언제든 무기를 꺼내 들 준비를 마쳤다.

무섭네, 무서워.

“어이, 대답 안 하냐?”

남자 중 한 명이 내게 할렌의 물음에 답하라며 압박을 가했다.

나는 대답 대신 제스처를 하나 취했다.

가운데 손가락을 올렸다.

“이거나 드셔.”

“이, 이 녀석이……! 애들아, 덮쳐!”

“네!”

할렌의 지시에 따라 남자들이 나에게 우르르 덤벼들었다.

그동안 책만 보느라 좀이 쑤셨는데 마침 잘됐다.

“다 덤벼, 짜식들아!”

오랜만에 주먹질 좀 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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