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3
후율의 유산 (3)
도서관.
그리고 카이딘.
서로 너무 안 어울리는 조합이다.
델리피나 전기 소설을 보면 알겠지만 카이딘은 독서를 좋아하는 남자가 아니다.
그럼에도 여기에 있다는 건…….
‘……후율의 유산 때문인가?’
일루엣 대도서관에 후율의 유산을 차지할 수 있는 유언장이 숨겨져 있다.
나는 그걸 알고 일부러 일루엣 대도서관까지 왔다.
카이딘은 후율의 유산을 쫓고 있다.
나한테 아는 정보가 있으면 언제든 알려 달라는 말까지 했을 정도니 말이다.
‘힌트를 잡았나 보네.’
일 났다.
나 못지않게 카이딘 또한 동공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래도 감정을 들키지 않게 하기 위해 일부러 표정 관리에 들어갔다.
“설마 했는데 ‘역시나’였네요. 로인 씨는 여기 어쩐 일로 오신 겁니까?”
“자료 조사 때문에요.”
“흐음, 그래요?”
카이딘은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이것만 봐도 카이딘이 왜 일루엣 대도서관을 찾았는지 알 수 있었다.
나를 견제하는 거다.
카이딘은 마일을 가리켰다.
“옆에 계신 분은 굉장히 독특한 패션 센스를 지녔네요. 일행인가요?”
아마도 마일이 쓴 가면 때문인 것 같았다.
마일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카이딘에게 인사를 건넸다.
“마일이라고 합니다. 로인 님의 두뇌라 할 수 있지요.”
“오른팔도, 오른다리도 아니고 두뇌라니……. 희한하네요.”
“제가 머리 굴리는 걸 굉장히 좋아하거든요.”
“부럽네요. 저도 친구랑 같이 왔다면 참 좋을 텐데.”
이번에는 내가 카이딘의 말에 반응했다.
“혼자 오신 겁니까?”
“아니요, 엘라시아와 함께 왔습니다. 기억하시죠? 약간 시끄럽고 푼수 기질이 있는 하이 엘프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주 만나진 않았지만 소설을 통해 엘라시아가 의외로 허당기가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라스 씨는요?”
“흥미 없다고 하며 안 왔어요. 지금은 릴리안이랑 같이 다니고 있습니다. 조만간 합류할 거지만요.”
릴리안은 ‘코드 002’의 새로운 이름이다.
언제까지 실험체 시절 때 불린 이름을 달고 살 거냐면서 라스가 지어 준 애칭이다.
코드 002, 아니 릴리안도 라스가 붙여 준 이름을 굉장히 마음에 들어 했던 걸로 기억한다.
‘뭐, 히로인이니까.’
라스를 싫어하진 않겠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엘라시아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어머, 로인 씨잖아요?”
“안녕하세요, 엘라시아 씨?”
주인공인 라스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준치까지 친밀도를 올려놓으니, 자연스럽게 라스 일행들과도 대화를 나누는 게 가능해졌다.
편하다, 편해.
엘라시아는 마일을 가리켰다.
“이분은 누구세요? 굉장한 패션 센스를 가지신 거 같은데.”
“마일이라고 합니다.”
오늘로서 두 번째 패션 지적을 받는 마일이었다.
그러니까 가면 좀 떼고 다니지.
하여튼 그놈의 고집은…….
카이딘이 엘라시아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뭔가를 속닥이더니 둘은 급하게 나에게 작별 인사를 보냈다.
“그럼 나중에 또 봐요.”
“기회가 있으면 같이 식사라도 하죠.”
“네, 알겠습니다. 조심해서 가세요.”
그렇게 둘을 떠나보냈다.
마일은 카이딘과 엘라시아를 바라보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들도 후율의 유산을 노리고 이곳을 찾은 거 같군요.”
“너도 그래 보여?”
“예, 티가 많이 납니다.”
엘라시아는 둘째 치고 카이딘은 돈에 관련된 거라면 너무 노골적으로 감정을 드러낸다.
벨레너의 두 번째 난제는 막대한 유산을 거머쥘 수 있다.
하지만 난 돈이 목적이 아니다.
‘카인이 나에게 이 소설에 대한 힌트를 주려고 하는 게 틀림없어.’
그것을 위해서라도,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가 먼저 저들보다 한발 빠르게 유언장을 찾아내야 한다.
* * *
유언장이 숨겨져 있을 만한 흔한 패턴이 있다.
도서관 책 중 어느 한 곳에 책갈피처럼 끼여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일단 나는 마일과 함께 닥치는 대로 책을 뽑아서 살펴보기로 했다.
책을 찾아 읽을 필요는 없다.
그냥 페이지만 후르륵 넘기면 된다.
문제는 이렇게 책을 대충 봤는데도 불구하고 A구역의 5분의 1조차 클리어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꼬박 하루를 투자했는데도 진행 속도가 너무 더디다.
‘이러다가 한 달 이상을 이곳에서 보낼지도 모르겠네.’
그러면 곤란하다.
안 그래도 3권 이야기는 내가 아는 소설 속 이야기보다 급박하게 전개되어 가고 있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이 아직 많이 남았다.
그런데 여기서 책이나 보면서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다.
‘어쩐다……?’
머리를 써야 할 타이밍이 왔다.
가장 좋은 방법은 카인을 이곳으로 데려오는 건데…….
‘그건 아무래도 힘들겠지.’
만약 카인이 나를 만날 생각이 있었다면, 편지를 들고 직접 나를 찾아왔을 것이다.
하나 카인은 그러지 않았다.
‘나와의 만남을 일부러 피하는 거 같아.’
이런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힌트라도 좀 많이 주든가!
3권 내용에선 벨레너의 두 번째 난제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
결국 내가 알아서 찾아내야 한다.
녹초가 된 내 옆자리에 마일이 한숨을 쉬면서 의자에 걸터앉았다.
“성과가 없군요. 로인 님 쪽은 어떻습니까?”
“찾았다면 내가 이런 모습으로 있지 않겠지.”
“하긴, 그렇겠지요.”
첫 날의 성과는 ‘없음’이다.
내일을 기대해 보는 수밖에 없다.
자리에서 일어나 숙소로 향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도서관은 저녁 9시면 문을 닫는다.
우리는 8시 50분까지 버티다가 겨우 나왔다.
‘카이딘은 먼저 갔나 보네.’
하긴. 카이딘은 가만히 앉아서 계속 책만 들여다볼 성격이 아니다.
오히려 몬스터와 싸우거나 던전에 도전하는, 몸 쓰는 쪽이 체질에 맞다.
생전 안 보던 책을 보려니 좀이 쑤실 것이다.
도서관을 나오려던 찰나였다.
갑자기 소란이 발생했다.
“곧 도서관 문을 닫아야 합니다. 이제 그만 나가시기 바랍니다.”
“나가라고? 감히 내가 누군지 알고 그런 소리를 하는 게냐!”
버럭 소리치는 한 남성.
살이 뒤룩뒤룩 찐 남자가 사서에게 언성을 높였다.
저 남자, 어디서 본 거 같은데…….
기억을 떠올리려던 찰나에 마일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할렌이군요. 꽤 유명한 상인입니다.”
“아, 그랬지.”
한때 라그너와 함께 영업 문제 때문에 다른 상단을 여러 차례 방문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본 기억이 난다.
그나저나 저 남자, 볼 때마다 살이 찌네.
건강에는 전혀 신경을 안 쓰는 건가?
할렌은 살이 잔뜩 낀 성대로 용케도 큰 목소리를 냈다.
“연장해! 오늘 하루, 아니 내가 후율의 유언장을 찾을 때까지 이 도서관, 문 닫는 일 없게 해!”
이런 망할!
경쟁자 그룹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자세히 보니 할렌이 고용한 다수의 사람들이 책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얼추 잡아 봐도 백 명가량 되어 보인다.
우리와 비교도 안 되는 인력이다.
만약 일루엣 대도서관에 출입증 발급 제도가 없었더라면, 할렌은 수천 명을 대동했을지도 모른다.
그나마 출입증 발급 제도 덕분에 백여 명가량밖에 데려오지 못한 거겠지.
‘저것도 많긴 하지만.’
그나저나 도대체 어떻게 이곳에 후율의 유언장이 있다는 걸 알았대?
카이딘이 안 것도 그렇고, 소문 다 난 거 아니야?
‘큰일이야. 더 많은 사람들이 몰리기 전에 우리가 먼저 찾아야 하는데…….’
일이 점점 복잡하게 되어 간다.
* * *
다음 날, 눈을 뜨자마자 나는 마일을 데리고 곧장 도서관으로 향했다.
개장은 9시부터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이 사람들은 할렌이 고용한 자들이다.
줄 중간에 카이딘이 혼자 멀뚱하게 서 있었다.
“카이딘 씨, 좋은 아침입니다.”
“……좋지 않습니다. 이 많은 사람들을 보세요.”
할렌이 고용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카이딘.
그의 입에서 연달아 무거운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나만 아는 고급 정보인 줄 알았는데, 언제 소문이 이렇게 퍼진 건지…….”
“역시 카이딘 씨도 후율의 유언장을 노리고 오신 거군요.”
“이런, 들켰네요.”
카이딘이 난색을 표했다.
뭐 어때?
어제 이미 다 들통 났는데.
“로인 씨도 후율의 유산을 노리고 있죠?”
“네.”
나는 숨김없이 답했다.
어차피 카이딘도 내가 이곳을 찾은 목적에 대해 알고 있을 것이다.
구질구질하게 끝까지 숨기려고 하는 것보다 그냥 속 시원히 밝히는 게 좋다.
카이딘은 시원스런 미소를 선보였다.
“그렇군요. 그럼 누가 먼저 찾는지 내기합시다. 이기는 사람이 술 사기. 어때요?”
“보통은 반대 아닙니까? 내기에서 지는 사람이 술을 사야 하는 거 아닌가요?”
“에이, 후율의 유산을 거머쥐게 되었는데, 설마 술 한잔 못 살까요? 그리고 안 그래도 내기에서 졌는데, 술까지 사면 기분 나쁘지 않습니까? 축하주라고 생각해요. 어때요?”
사고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비싼 걸로 사는 겁니다. 알았죠?”
“네, 그리 알고 있겠습니다.”
카이딘은 머리가 좋은 남자다.
아마 그도 스스로 알고 있을 것이다.
후율의 유언장을 자신이 찾을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는 사실을.
그래서 그는 기왕 이렇게 된 거 비싼 술이나 공짜로 얻어먹자는 심산으로 나에게 이런 내기를 제안한 것이다.
어찌 되었든 카이딘이 손해 보는 건 하나도 없다.
‘영리하네. 라스는 든든한 동료를 뒀어.’
하지만 지나치게 돈을 밝힌다는 게 단점이다.
뭐…… 사실 나도 할 말은 없지.
돈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 * *
2일째에도 소득은 전혀 없었다.
3일째도 마찬가지다.
할렌 패거리들도 우리와 같은 상황이었다.
도서관을 이 잡듯이 뒤지고 있었지만, 책들이 워낙 많아서 단기간 내에 모든 책을 살펴보는 건 불가능하다.
‘이대로 가면 할렌한테 유언장을 빼앗기게 될 거야!’
다른 방법을 떠올리기로 했다.
나는 후율이라는 사람에 대해 잘 모른다.
그냥 이름하고 재산이 많은 갑부였다는 것 정도뿐이다.
“마일.”
나는 책을 훑어보고 있는 마일을 불렀다.
독서를 멈춘 마일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유언장, 찾으셨습니까?”
“아니, 너한테 따로 부탁할 게 있어서.”
“무엇입니까?”
“후율에 대해 조사해 줘. 사소한 것까지 다. 언제까지 가능해?”
“글쎄요. 일단 조사해 봐야 알 거 같습니다만…… 그래도 넉넉하게 잡아서 3일 이내면 가능할 겁니다.”
“내일까지 해 줘. 할 수 있지?”
“로인 님은 저를 너무 험하게 굴리시는 게 문제입니다.”
“그만한 보상을 해 주고 있잖아. 안 그래?”
“그건 부정할 수 없군요.”
나만큼 고급 정보를 주는 베르투 회원도 없다.
그 부분에 대해선 마일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최대한 해 보겠습니다.”
“잘 부탁해.”
마일을 떠나보낸 후에 나는 생각에 잠겼다.
아무런 생각 없이 막 책들을 뒤지면서 찾아 헤매 봤자 물량공세로 밀어붙이는 할렌 패거리를 이길 수 없다.
일을 효율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
그의 발자취를 쫓다보면 분명 힌트가 나올 것이다.
‘원래 사람이란 자신의 흔적을 남기길 좋아하는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