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2
후율의 유산 (2)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설마 내가 아는 그 카인인가?’
동명이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에게 편지를 보낼 만한 사람 중에서 카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단 한 명, 예언가 카인을 제외하고는.
“편지, 언제 왔어?”
“엊그제 왔어요.”
“누가 줬는데? 설마 카인 본인이 여기까지 온 거야?”
“그건 잘 모르겠어요. 출근하니까 문 앞에 이 편지가 놓여 있더라고요. 혹시 파랑새 님이 가져오셨을지도 모르죠.”
파랑새에게 한번 물어봐야겠군.
일단 편지는 받아 두기로 했다.
사무실로 바로 올라간 후에 나는 조심스럽게 편지를 뜯었다.
편지에 적힌 내용은 길지 않았다.
-벨레너의 두 번째 난제를 클리어하도록. 그러면 모든 것의 시작이 밝혀질 것이다.
……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 뭔가가 하나 더 적혀 있다.
문제는 처음 보는 문자라는 점이다.
후율의 유산에 도전하라고?
“어째서?”
나도 모르게 이런 질문이 튀어나왔다.
보아하니 내가 아는 그 카인이 보낸 게 맞는 거 같은데…….
근데 여태껏 아무런 소식이 없다가 갑자기 나에게 이런 편지 달랑 한 통 보내 놓고…….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다.
하지만 그렇다고 카인의 조언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하라는 대로 하는 수밖에.”
카인은 델리피나에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들을 예언한 자다.
그가 이렇게 말했으니 분명 무슨 의미가 담겨 있을 게 분명하다.
괜히 시간 낭비나 시키려고 허투루 이런 편지를 보내진 않았을 테니까.
‘근데 뒤에 이어지는 이 글자들은 도대체 어떻게 해석을 해야 되나……?’
어려운 숙제를 해결하고 왔더니 또 하나의 숙제가 나를 찾아왔다.
게다가 숙제 난이도가 보통이 아니다.
‘머리 아프네, 진짜!’
* * *
마침 파랑새가 R팀 본부를 방문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나는 바로 사무실을 나와 파랑새를 찾았다.
“잠깐 물어볼 게 있는데요.”
“응? 나한테?”
“네, 혹시 파랑새 씨가 저한테 이 편지를 배달해 주신 겁니까?”
나는 카인에게 받은 편지봉투를 보여 줬다.
편지봉투를 유심히 바라보던 파랑새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내가 배달한 편지가 아니야.”
하루에도 수십 통의 편지를 배달하는 파랑새지만, 그는 본인이 어떤 편지를 보냈는지 확실하게 기억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편지는 어떻게 이곳으로 배달된 걸까?
‘역시 카인이 직접 이곳까지 온 걸까?’
타이밍이 상당히 구렸다.
만약 내가 식인 호수 의뢰를 맡지 않았더라면, 아니 하다못해 중간에 헤르트 퇴치 일을 맡지만 않았더라면 카인과 마주칠 수도 있었다는 소리가 아닌가?
하나 두 가지 다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될 일들이었다.
이제 와서 후회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아쉬움에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파랑새는 이런 내 태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왜 그래, 로인 대장? 내가 뭐, 말실수라도 했나?”
“아니요, 이 편지 때문에 그런 겁니다.”
“러브레터인가?”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네요.”
아니지,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건 그것 나름대로 문제가 있어 보인다.
나는 파랑새에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이 편지가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있을까요?”
“글쎄……. 우체국 도장도 안 찍혀 있고, 주소도 없는 걸 보면 이 편지를 쓴 자가 여기까지 직접 가져왔다는 것 말고는 모르겠는데.”
파랑새가 오기 전에 나는 나울을 돌아다니면서 카인을 직접 본 자가 있는지 찾아 헤맸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설령 봤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카인인지 아닌지 모를 것이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이미 놓쳐 버린 기회에 더 이상 연연하지 말자.
아직 내가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으니까.
“그럼 혹시 이건 아십니까?”
나는 파랑새에게 편지에 적혀 있던 문구를 그대로 따라 적은 종이를 건넸다.
편지를 통째로 보여 줄 생각은 없었다.
문구를 주의 깊게 바라보던 파랑새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많이 본 언어체계인데? 이건…… 라크리 문자 아닌가?”
어쩐지, 글씨를 볼 때마다 묘하게 어디서 봤다 싶은 생각이 자꾸 들었는데 역시나였다.
고대의 숲에 들어갔을 때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이거 비슷한 문자들이 적힌 나무판자들이 많이 있었지.’
왜 이걸 이제야 떠올렸는지 모르겠다.
라크리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큰 소득이다.
“감사합니다. 많은 도움이 됐어요.”
“해석은 할 수 있어?”
“전문가에게 맡기면 됩니다.”
다행이도 내 주변에 라크리어를 마스터한 사람이 있었다.
‘간만에 마일을 호출해야겠어.’
현자는 이럴 때 써먹으라고 있는 거지.
* * *
파랑새 때와 마찬가지로 난 이번에도 마일에게 편지가 아닌 라크리어로 된 문구를 그대로 옮겨 적은 종이를 보여 줬다.
마일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내가 예상한 것과 다른 반응이 나왔다.
마일이라면 어렵지 않게 라크리어를 술술 해석해 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해석이 안 돼?”
“아니요. 해석은 됩니다.”
“뭔데?”
“일루엣 대도서관이라고 적혀 있군요.”
일루엣 대도서관은 델리피나 대륙 내에서도 손꼽히는 도서관 중 한 곳이다.
각종의 귀중한 고서들이 보관되어 있으며, 수많은 학자들이 주로 찾는 장소라 알고 있다.
카인이 왜 나보고 일루엣 대도서관으로 가라고 했는지 잘 모르겠다.
‘설마 벨레너의 2번째 난제와 연관이 있는 건가?’
카인은 나한테 분명 후율의 유산에 도전하라고 했다.
어쩌면 유언장이 일루엣에 있을지도 모른다.
혼자서 생각에 잠겼다.
그러자 마일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 왔다.
“죄송하지만, 왜 저에게 이런 해석 일을 맡기신 건지 여쭤봐도 됩니까?”
마일의 호기심이 또 발동했나 보다.
“누군가가 나에게 후율의 유산을 얻어 달라고 의뢰를 했거든. 이 문구가 같이 딸려 왔는데, 뭔지 몰라서 해석을 못 하고 있었어. 그래서 너한테 부탁한 거야.”
약간의 거짓말을 보탰다.
“후율의 유산과 관련이 있는 문구였군요. 아무튼 일루엣 대도서관이라고 했나요? 이곳에 유언장이 숨겨져 있는 건가요?”
“아직 몰라. 그리고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이 정보가 외부로 새어 나가선 안 돼. 알겠지?”
“물론이지요. 저만 믿으시기 바랍니다.”
입단속을 약속하는 마일.
대신 마일은 내게 부탁을 하나 해 왔다.
“저도 같이 가도 됩니까?”
“너도? 혹시 나보다 먼저 유언장을 찾아서 후율의 유산을 가로채려고 하는 거 아니야?”
“하하! 저는 돈보다 지식이 먼저인 사람입니다. 그런것보다는 예전부터 궁금한 게 있어서요.”
“어떤 건데?”
“후율이 살아생전 재산을 얼마나 쌓았을지…… 이게 궁금합니다. 로인 님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세계 제일의 갑부라는 사람은 과연 얼마만큼의 재산을 가지고 있었던 건지 말이죠. 저는 궁금해 미칠 지경입니다.”
호기심도 심하면 병이다.
남의 일인데도 불구하고 마일은 자신이 모른다는 점 하나 때문에 안달이 나 있었다.
마일이 함께 동행해 준다면 분명 도움이 될 거다.
이번처럼 또 라크리어 힌트가 주어질 경우에는 마일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할 테니까.
대신 나는 확실하게 못 박아 두기로 했다.
“후율의 유산을 절대로 건드리지 않을 것. 그리고 내가 하는 일에 의문을 가지지 말 것. 이 두 가지만 지켜 준다면 너를 데리고 갈게. 어때? 약속, 지킬 수 있겠어?”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겠습니다. 현자의 자격을 걸겠습니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안 데려가기도 뭣하다.
결국 나는 마일의 동행을 허락했다.
* * *
일루엣 대도서관 정문 앞에 서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와아, 엄청 크네……!”
마일은 내 곁에서 일루엣 대도서관에 대한 부연 설명을 들려줬다.
“규모로 따지면 세계에서 제일 큰 도서관일 겁니다. 여기 있는 책들을 일일이 다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년 단위의 시간이 걸린다고 하더군요.”
“그렇게나 많아?”
“예, 제가 알기론 그렇습니다.”
난리 났네, 이런 넓은 곳에서 유언장을 찾아야 하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용병들을 데리고 올 걸 그랬나?
하나 오랜 출정 임무 탓에 지칠 대로 지친 용병들을 도서관 수색 작전에 투입시킬 순 없었다.
게다가 이건 누군가에게 받은 의뢰가 아니다.
내 개인적인 용무다.
‘힌트를 주려면 좀 더 구체적으로 줄 것이지, 꼴랑 일루엣 대도서관이라는 힌트만 주면 어쩌라는 거야?”
갑자기 카인이 원망스러워졌다.
사실 유언장이 어디에 있다는 장소를 알려 준 것만으로도 엄청난 힌트긴 하다.
하지만 원래 사람의 욕심이라는 게 다 그렇지 않은가?
일어나 있으면 앉고 싶고, 앉아 있으면 눕고 싶고…….
나도 사람인지라 욕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으니 일단 도서관에 들어가고 나서 생각해 보기로 했다.
일루엣 대도서관은 출입부터가 난관이었다.
출입증이 있어야 도서관에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문제라면 이 출입증을 발급받는 게 상당히 까다롭다는 점이다.
먼저 서류 전형을 거치고, 서류가 통과되면 사서와 일 대 일 면담을 받으면서 이 사람이 출입증을 발급받아도 괜찮은 사람인지를 검증받아야 한다.
이런 과정 때문에 나는 도서관에 발 한번 들여놓지 못한 채 꼬박 이틀을 날려 먹어야 했다.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이틀을 고스란히 날려 버려 버리다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래도 다행인 건 무사히 출입증이 발급되었다는 것이다.
“이거 하나 받자고 이틀 동안 그 고생을 하다니…….”
“그래도 이틀이면 빨리 나온 편입니다. 보통 1주일은 걸리니까요.”
“네 출입증은 어디 있는데?”
“아, 저는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마일은 출입증을 꺼내 내게 보여 줬다.
이 녀석, 기만질을 하다니.
아무튼 어렵게 발급받은 출입증을 당당하게 내밀고 로비를 통과했다.
도서관은 바깥에서 봤을 때보다 훨씬 더 넓어 보였다.
보이는 거라고는 책장, 그리고 책뿐이었다.
“우와……!”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나도 나름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작가를 지망했고 나중에는 편집자로 일을 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책들이 한 장소에 모여 있는 건 난생 처음 봤다.
그야말로 대박이다.
‘스마트폰이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사진을 정신없이 찍었을 것이다.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는 말이 있다.
이 광경을 사진으로 남길 수 없다는 게 많이 아쉽다.
너무 넓어서 어디부터 돌아야 좋을지 감이 안 잡혔다.
“어디부터 수색하면 됩니까?”
나는 마일의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
“몰라.”
“예? 뭔가 계획이 있는 게 아니었습니까?”
“있을 리가 있나? 그냥 부딪쳐 보는 거지.”
“앞날이 캄캄하군요.”
마일은 쓰디쓴 미소를 보였다.
나도 같은 심정이다.
그래도 어찌하겠나, 일루엣 대도서관이라는 것 말고 다른 힌트가 없는데.
일단 가까운 곳부터 찾아보기로 했다.
A구역으로 향하는 나와 마일.
문을 통과하려고 할 때였다.
“어? 혹시 로인 씨 아니에요?”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 남자의 목소리가 우리의 발목을 잡았다.
‘이런!’
나는 남자를 보자마자 무의식적으로 혀를 찼다.
아이템 헌터, 카이딘.
설마 카이딘과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