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1
후율의 유산 (1)
글레드의 불꽃에 의해 칠흑의 조각은 완전히 소멸되었다.
정신을 잃은 채 쓰러지는 헤르트.
거대한 늑대의 형상을 한 헤르트는 온몸이 상처투성이었다.
“베라, 치료할 수 있겠어?”
“응급조치는 할 수 있지만 심한 상처는 저도 힘들어요. 기력이 많이 쇠약해진 상태라서 무리하게 치료 마법을 사용할 수도 없고요. 정교한 힐링 스킬을 구사할 수 있는 전문가가 필요해요.”
마침 우리 용병단에는 전문 힐러가 있다.
“가르시아, 가서 파이스를 불러 와. 파이스가 올 때까지 베라 네가 일단 치료하고 있어.”
“알았어요.”
“곧장 다녀오겠습니다, 대장님!”
가르시아는 빠른 속도로 마을을 향해 달려갔다.
헤르트를 구한 건 기적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헤르트를 그냥 죽일 생각이었다.
헤르트를 구한답시고 우리 용병들이 위험에 처하는 꼴을 볼 수는 없으니까.
하나 도중에 라스라는 ‘사기 캐릭터’가 등장했다.
주인공 보정은 무섭다.
이지 선다형 문제에서 망설임 없이 정답을 고른 데다가…….
‘글레드까지 가지고 있을 줄이야…….’
라스가 가지고 있는 벨라시오닉의 보물, 임페르노 하트는 불에 연관된 모든 능력을 다룰 수 있게 해 주는 보물이다.
그렇다고 한들 라스가 글레드의 힘까지 손에 얻을 줄은 몰랐다.
고대의 숲에서 글레드를 얻기 위해 치렀던 나의 희생의 과정(?)이 떠올랐다.
‘별 희한한 걸 다 마시고 그랬는데.’
고대의 정령한테 농락도 당했고, 며칠 동안 기절도 했었지.
나는 고생해서 겨우 얻은 능력인데…….
쳇.
그래도 한편으로는 안심이다.
‘라스가 글레드의 힘을 가지고 있다면 칠흑의 세력과 맞서 싸우는 게 한결 수월해지겠지.’
《델리피나 전기》가 배드엔딩으로 끝난다는 사실을 안 순간부터 나는 초조함 속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러나 이제는 한숨 놓아도 될 것 같다.
글레드의 힘을 얻은 남자가 두 명이나 되니까.
한편, 라스는 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까 보니까 글레드에 대해 아는 눈치를 보이셨던 거 같은데…….”
글레드에 대해 아는 인물은 그렇게 많지 않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지 아닌지조차도 밝혀지지 않았으니까.
라스는 내게 대답을 바라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라스에게 나 또한 글레드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직접 보여 주려 했다.
그러나 타이밍이 안 좋았다.
“대장님! 파이스를 데려왔습니다.”
너무 빠르잖아?
가르시아의 외침 덕분에 나와 라스의 대화는 잠시 중단되었다.
뭐, 나중에 말해 줘도 충분하겠지.
* * *
S팀과 R팀 용병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의 협업을 통해 헤르트를 마을로 데려오는데 성공했다.
마을 사람들은 살아 돌아온 헤르트를 바라보면서 눈물을 훔쳤다.
특이한 광경이었다.
헤르트에 의해 마을이 반파되고 많은 주민들에 목숨을 잃었는데, 오히려 마을 사람들은 헤르트를 위해 눈물을 흘렸다.
‘괜히 수호신이라 불리는 게 아니구나.’
이 마을과 헤르트의 관계에 대해 나는 많이 알지 못한다.
알 생각도 없지만.
잠시 쉬고 있는 나를 첸버가 호출했다.
“잠깐 단장이랑 셋이서 이야기 좀 할까?”
또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거지?
궁금하기도 해서 나는 군말 없이 첸버의 뒤를 따랐다.
제나드는 나를 부른 이유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자를 이들에게 조금 나눠 주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나쁘지 않은 생각이다.
어차피 돌아갈 때까지 사용할 식량은 충분히 있다.
여분의 식량을 모아 이 마을 사람들에게 주면 될 것이다.
그걸로 당분간 마을 사람들은 끼니를 때울 수 있을 터.
‘그나저나 제나드 이 양반은 마을 애들이랑 어지간히 정이 많이 들었나 보네.’
셋이서 회의를 하는 와중에도 옆에서 서성이는 아이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줬다.
볼 때마다 적응이 안 된다.
‘그래도 뭐, 나쁜 건 아니니까.’
애들을 싫어하는 것보다야 낫지 않을까?
나는 흔쾌히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하죠.”
“……고마워.”
“……?”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제나드의 목소리 같았다.
“방금…… 저한테 고맙다고 했어요?”
“아니, 안 그랬는데.”
거짓말이다.
분명 들었다.
‘고맙다.’라고.
그러나 제나드는 고개를 반대 방향으로 휙 돌리면서 없었던 일처럼 유야무야 넘기려 했다.
‘츤데레’ 같은 남자네.
쑥스러워하는 제나드의 모습을 보면서 첸버는 작게 웃었다.
블루로즈단.
참 알 수 없는 조직이다.
* * *
마을 사람들에게 물자를 나눠 주는 동안 라스는 마을로 함께 온 자신의 동료, 카이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특히 카이딘의 목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분명 다음 마을까지 가면 나올 거라니까? 너를 믿어! 내가 믿는 너를 믿으라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전혀 모르겠는데.”
나도 모르겠다.
뭔가를 찾으러 가자는 거 같은데?
몰래 들어보려 했으나 도중에 라스에게 들키고 말았다.
“볼일은 다 끝났습니까?”
“네, 이제 마무리만 하면 됩니다.”
“그렇군요. 물자를 나눠 준다는 판단은 아주 좋은 것 같습니다. 저는 사실 블루로즈단에 대해 안 좋은 말도 들어서 의심하고 있었는데, 제가 잘못 생각한 것 같군요. 역시 소문보다는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게 가장 좋네요.”
용병계에서 탑 티어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블루로즈단.
그래서인지 블루로즈단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집단은 많다.
그런 이들은 일부러 우리 용병단에 대해 악의적인 소문을 퍼트리고 다닌다.
하지만 제나드나 첸버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다.
실적으로 보여 주면 되니까.
그리고 이들의 전략은 여태껏 잘 먹혀들었다.
라스는 희미하게 웃었다.
“좋은 용병단에 소속되어 있군요. 단장으로 보이는 사람은 특히 애들을 많이 좋아하고요.”
“저도 처음 알았어요.”
“몰랐습니까? 같은 조직이면서도?”
“우리 단장이…… 과거가 많은 남자거든요.”
“재미있군요.”
도중에 카이딘이 불쑥 우리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얼마 전에 들었습니다. 로인 씨, 벨레너의 난제를 3개째 클리어하셨다면서요? 이번에는 식인 호수였죠?”
“예, 하지만 저 혼자서 클리어한 건 아닙니다. 용병들이 단합해서 모두가 힘을 모아 클리어했죠.”
“그래도 그게 어디에요. 그리고 저번에는 칼바의 용암 동굴과 도플갱어의 숲도 클리어하시고……. 역시 대단하십니다!”
엄지를 추켜올리며 나에게 아낌없는 칭찬을 날리는 카이딘.
그러나 칭찬이 너무 인위적이다.
‘사탕발림이네.’
나한테 뭔가 바라는 거라도 있는 걸까?
너무 칭찬을 해 대니, 오히려 내가 다 부끄러워질 정도다.
‘목적이 있으니까 이러는 거겠지.’
나는 카이딘에게 직설적으로 물었다.
“저한테 뭔가 요구하고 싶은 게 있나 보군요.”
“하하하! 요구랄 것까진 없고요. 그냥 궁금한 게 있어서요.”
“어떤 겁니까?”
“벨레너의 2번째 난제에 대해서입니다. 혹시 아시나요?”
알다마다.
벨레너의 13난제 중 2번째 난제는 여타 다른 난제에 비해서 상당히 특이한 난제라 불린다.
보통 ‘벨레너의 난제’라고 하면, 던전을 클리어해야 한다든지, 혹은 잡기 어려운 몬스터를 상대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2번째 난제는 다른 난제들과 궤를 달리 하고 있다.
“‘후율의 유산’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겁니까?”
“역시! 잘 아시는군요.”
카이딘의 기대치가 높아졌다.
후율의 유산.
과거 후율이라는 세계 제일의 갑부가 존재했다.
그러나 후율은 자신이 죽기 전에 그가 평생 쌓아 올린 막대한 유산을 특정 조건을 만족시킨 자에게 물려주겠다고 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 조건은 바로 후율이 자필로 쓴 유언장을 가져올 것.
후율 재단에 유언장을 가져가면, 그가 남긴 재산을 전부 손에 거머쥘 수 있게 된다.
이것에 바로 벨레너의 2번째 난제의 정체다.
하지만 여태까지 아무도 후율의 유언장을 찾아내지 못했다.
유언장이 어디에 보관되어 있는지, 힌트나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직까지도 후율의 재산은 재단에 보관되어 있다.
‘역시 카이딘이야. 돈을 좋아사는 남자답게 후율의 유산에 관심을 가지네.’
괜히 아이템 헌터로 불리는 게 아니다.
카이딘은 나에게 조언을 구하고 싶어 했다.
“벨레너의 13난제를 자그마치 세 개나 클리어한 로인 씨라면 분명 뭔가 감이 오는 게 있을 겁니다. 어떤가요? 저와 함께 손을 잡고 후율의 유언장을 찾아보시겠습니까?”
“……언제는 나랑 같이 찾으러 다니자며.”
뒤에서 라스의 볼멘소리가 들렸다.
카이딘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니가 싫다고 했잖아.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어?”
“아니, 여전히 싫은데.”
“거 봐!”
“후율의 유산보다 우리에게 중요한 일이 있잖아. 추종자들의 뒤를 쫓는 것. 잊었어?”
“야. 추종자들이 우리한테 밥 먹여 주냐? 우리도 먹고 살아야 할 거 아니야?”
“네가 말하는 ‘먹고산다는 기준’이 대체 뭐야?”
“적어도 수만, 아니 수억 제피는 가지고 있어야지. 안 그래?”
“욕심이 정말 많군.”
카이딘은 원래 욕심이 많은 남자다.
반면 라스는 욕심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두 남자는 돈에 대해선 상극이다.
그래도 잘 어울려 다닌다.
재미있는 콤비네.
“아무튼…… 어떻습니까, 로인 씨? 혹시 괜찮은 정보 있나요? 가치 있는 정보라고 생각이 든다면, 제가 그 정보를 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2번째 난제에 대해선 저도 아는 게 없네요.”
도전할 생각도 없었기에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었다.
내가 돈 문제에 시달리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로그 상단 덕분에 돈이 넘쳐서 탈이다.
이런 상황인데 굳이 돈에 연연해야 하나 싶은 생각도 들고 말이다.
카이딘은 입맛을 다셨다.
그래도 미련이 남는 모양인지 내게 신신당부를 했다.
“혹시 들어오는 정보 있으면 꼭 저에게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꼭이요!”
“네. 기억해 두겠습니다.”
미안, 카이딘.
사실 알아도 알려 줄 일은 없을 거야.
왜냐하면…….
‘카이딘이 한눈팔게 만들 수는 없지. 너는 라스를 도와서 칠흑과 추종자들을 계속 견제해 줘야 하니까.’
* * *
오랜만에 나울로 돌아왔다.
요즘 나울을 비우는 상황이 많아져서 그런 걸까?
나울로 돌아올 때마다 전과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물론 좋은 의미에서 한 말이다.
나날이 발전해 가는 나울.
이제는 상업과 차원 이동 마법 발전의 중심지로 우뚝 거듭나게 되었다.
나울에 오면 R팀 본부와 로그 상단, 그리고 차원 이동 마법 연구소도 들러야 한다.
‘점점 관리해야 할 곳이 늘어나네.’
마구잡이로 사업을 확장하는 사업가의 기분이 이럴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현실 세계에 있을 때에는 원고와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으니까.
내가 가장 먼저 향한 곳은 R팀 본부였다.
라비가 환한 미소로 나를 반겼다.
“고생하셨어요, 대장님. 냉커피 한 잔 드릴까요?”
“타 주면 고맙지. 내가 자리 비운 사이에 별일 없었지?”
“네. 아, 맞다! 대장님께 편지가 한 통 와 있어요.”
“또 체릴한테서 온 거야?”
“아니요. 다른 분이었는데…… 잠시만요.”
보관해 둔 편지봉투를 꺼내는 라비.
“카인이라는 분한테서 온 편지네요?”
“뭐……?”
쨍!
너무 놀란 나머지 커피잔을 떨어뜨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