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0
망할 주인공 보정! (3)
의뢰를 받아들인 것까진 좋다.
나도 사실은 이들을 못 본 척하기가 좀 그랬으니까.
그래도 한마디 상의도 없이 본인이 혼자서 덥석 결정을 내린 건 좀 그렇다.
첸버도 이에 대해서 제나드에게 쓴소리를 했다.
“단장, 이런 중요한 일을 독단으로 결정하면 어떻게 합니까?”
“하지만 애들을 못 본 척할 수는 없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과정이 좀 그랬지만, 그래도 결과적으로는 문제없다.
이미 결정을 내렸으니 앞으로의 일에 더 집중하는 편이 좋다.
내가 먼저 의견을 내놓았다.
“많은 용병들을 작전에 투입시킬 수는 없으니, 별동대를 만들어서 검은 괴물을 사살하도록 하죠. 추종자들도 있을지 모르니 실력자들로 꾸리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헤르트라고 했나?
마침 우리 팀에는 실력자가 많다.
검은 괴물 레이드 사냥에 데려가도 충분한 인력들이 항시 대기 중이다.
“나머지 용병들은 마을에 머물면서 주민들을 보호하도록 하면 될 거 같네요. 그리고 저희가 가지고 있는 물자도 조금씩 나눠 주도록 하죠. 마을 사람들의 말을 들어 보니까, 며칠 째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했더라고 하더라고요. 어른들은 둘째치더라도 애들은 굶길 수 없으니까요.”
제나드와 첸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해야 할 일이 정해졌으니…….
이제 움직일 차례다.
* * *
나는 R팀에서 가르시아, 반드, 그리고 베라.
이렇게 셋만 데리고 가기로 했다.
S팀에서는 제나드와 두 명의 용병이 별동대에 참가했다.
총 7명이다.
‘이 정도 전력이면 헤르트인지 뭔지 하는 영물을 죽일 순 있겠지.’
나 하나만으로도 충분할 거 같긴 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출정 준비를 모두 마친 우리는 바로 이동했다.
아니, 이동하려 했다.
그전에 우리에게 자초지종을 모두 설명해 줬던 남자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그, 그러고 보니 제가 중요한 부탁을 잊었습니다!”
“부탁이라는 게 뭡니까?”
“헤르트를 가급적이면 살려 주시기 바랍니다.”
“예?”
뭐 이런 황당한 부탁이 다 있나 싶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마을이 거의 반파된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놈을 죽이지 않고선 쉽게 제압할 수 없다.
그런데 살려 달라니…….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힘들겠군요.”
“그렇다면…… 하다못해 노력 정도라도 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헤르트는 저희 마을에 없어서는 안 될 귀한 존재입니다. 헤르트가 없었더라면 여기 마을 사람들은 이미 다 죽었을 겁니다. 그러니 부탁드리겠습니다!”
구구절절 사연이 참 많은 곳이다.
결국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분명히 말해 뒀다.
“장담은 못합니다.”
미리 보험에 들어 두기로 했다.
* * *
헤르트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뒷산으로 향했다.
우리 별동대와 함께 젊은 마을 사람도 함께 동행하고 있었다.
이름은 타피아.
그는 우리에게 자세를 낮추라는 수신호를 보냈다.
손으로 산 아래쪽을 가리켰다.
그곳에 헤르트가 사냥한 멧돼지를 잡아먹고 있었다.
타피아는 우리에게 헤르트에 대한 정보를 들려줬다.
“헤르트는 시각과 청각, 그리고 후각이 아주 발달되어 있습니다. 저희가 아무리 인기척을 지우고 접근하다고 한들, 적어도 20미터 바깥에서 저희의 존재를 눈치챌 겁니다. 멀리서부터 접근하는 건 결코 쉽지 않을 겁니다.”
저 이야기만 들어도 어려워 보인다.
하나 우리에겐 방법이 있다.
“베라, 바람의 정령을 불러 줄래?”
“어떻게 하시게요?”
“우리의 기척이 저쪽에 늦게 도달하게끔 최대한 늦춰 줘. 그리고 우리에겐 이속 버프를 걸어 주고.”
나의 작전은 이거다.
놈이 우리를 알아차리기 전에 우리가 먼저 접근한다.
이름하야 ‘손은 눈보다 빠르다.’ 작전이다.
내 의도를 짧게 압축해 별동대 인원들에게 전달했다.
S팀의 제나드는 내 계획에 찬성했다.
“무모해 보이지만, 그래도 재미있는 작전이군. 어울려 주도록 하지.”
재미있다는 말 듣기 위해서 떠올린 작전이 아닌데 말이지.
베라는 우리에게 버프를 걸어 줬다.
이후에 바람의 정령을 이용해서 소리를 일시적으로 차단했다.
‘좋아.’
슬슬 가 볼까?
나는 낭떠러지 끝에 섰다.
헤르트는 바로 밑에 있다.
내 옆에는 타피아와 S팀 두 명의 용병을 제외하고 나머지 별동대원들이 일렬로 나란히 섰다.
“그럼…… 갑니다!”
나는 이들에게 신호를 줬다.
동시에 우리는 낭떠러지에서 뛰어내렸다.
순식간에 낭떠러지 밑으로 추락했다.
안전장치 없이 뛰는 번지점프가 이런 기분일까?
낙하 에너지의 도움을 받으며 우리는 눈 깜짝할 사이에 밑으로 ‘쿵!’ 하고 떨어졌다.
헤르트는 그제야 우리의 접근을 알아차렸다.
용병들은 헤르트를 보자마자 침을 꿀꺽 삼켰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커!’
게다가 한 성깔 할 것처럼 생겼다.
네 발 달린 거대한 짐승.
형상은 개의 모습과 흡사했다.
하나 큰 차이가 있었다.
“머리가 두 개 달려 있네?”
케로베르스 비슷한 종류인가?
절벽 위에서 S팀 용병 둘과 대기 중인 타피아가 우리에게 소리쳤다.
“헤르트는 원래 머리가 하나입니다! 칠흑의 조각에게 잠식당하고 나서 머리가 새로 하나 더 생긴 겁니다! 진짜 머리와 가짜 머리로 구분되어 있으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하나는 진짜 헤르트 머리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칠흑의 조각이다.
나는 마을을 떠나기 전에 헤르트는 가급적이면 살려 보겠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물론 장담은 못한다곤 했다.
하나 최선은 다해 봐야 하지 않겠나.
우선은 진짜 머리를 찾는 게 중요하다.
괜히 가짜 머리 놔두고 진짜 머리를 베어 버리면, 헤르트는 그 자리에서 죽는다.
그리고 칠흑의 조각은 죽은 헤르트의 육체를 집어삼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가짜 머리를 베어 내야 한다.
‘둘 중에 어느 놈이냐!’
굉장히 어려운 이지선다다.
둘 다 차이점은 없었다.
육안으로 구분하기에는 매우 어렵다.
모르면 뭐다?
물어보자!
“타피아! 둘 중에 어느 게 진짜 대가리입니까!”
“그, 그건…… 저도 잘 모, 모르겠습니다!”
아니, 모른다는 게 말이 되나?
수호신이라며!
오랫동안 계속 지켜봐 왔을 텐데 이까짓 것 구분 하나 못하나?
나는 도플갱어의 숲에서 동료들도 다 구분해 냈는데.
‘어쩔 수 없지. 난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했어.’
이쯤 되면 죽이는 수밖에 없다.
드래곤 클로를 발동시켰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를 하기로 했다.
‘일격에 끝내 주마!’
고통 없이 보내 주는 것이 헤르트에게도 편하겠지.
바로 행동에 임하려던 찰나였다.
“거기! 비켜!”
갑자기 절벽 위에서 두 남자가 떨어졌다.
내가 잘 아는 얼굴들이었다.
라스, 그리고 카이딘!
나도 모르게 이들에게 외쳤다.
“여긴 어쩐 일입니까!”
어라?
목소리가…… 나온다!
원래 나는 라스와 이야기를 나눌 수 없는 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목소리가 나오니 좀 당황스러웠다.
‘칭호의 효과인가!’
전체 친밀도가 가산되는 칭호를 차근차근 얻다 보니 어느 새 라스와 대화까지 가능한 수준으로 올라섰다.
게다가 나는 전부터 라스와 친밀도를 꽤 쌓아 올리고 있었다.
이 두 가지 노력 덕분에 드디어 대화 성립 기준을 충족시켰다.
‘그동안 고생한 보람이 있네.’
한편, 라스는 온몸에 잔뜩 묻어 있는 검은 피들을 가리켰다.
“추종자들이 칠흑의 조각으로 검은 괴물들을 늘리고 다닌다는 소문을 듣고 쫓아왔습니다. 근처에 있는 추종자들은 죄다 없애 버렸는데, 검은 괴물이 된 몬스터 한 마리를 놓쳐 버렸습니다. 그게 저 녀석입니다.”
몬스터라는 말에 절벽 위에 있던 타피아가 ‘몬스터가 아니라 수호신이라구요!’라고 태클을 걸었다.
그래 봤자 외지인인 우리들에게는 몬스터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라스가 이곳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불안감이 들었다.
‘설마 엘라시아도 왔나?’
그러면 곤란한데…….
지금 여기엔 베라가 있다.
두 여자를 만나게 해선 안 된다.
나는 아주 작은 목소리를 유지하며 라스한테 나머지 일행의 행방을 물었다.
“혹시 다른 동료분들은 어디 있습니까?”
라스는 산 너머를 가리켰다.
“나머지 추종자들을 쫓고 있습니다.”
다행이다.
그러면 엘라시아가 여기에 올 일은 없다는 뜻이겠군.
아니, 혹시 모른다.
엘라시아와 마주치기 전에 후딱 헤르트를 쓰러뜨려야 한다.
‘가만있어 보자?’
갑자기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다.
“라스 씨, 저 몬스터, 머리가 두 개 있잖아요. 하나는 칠흑의 조각이고, 하나는 몬스터…… 어흠! 헤르트라는 이름의 영물의 머리라는데. 둘 중에 어느 머리가 칠흑의 조각일 거 같습니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당연한 대답이었다.
하나 내가 원한 건 이게 아니었다.
“그냥 아무거나 택해도 좋습니다. 한번 골라 보세요.”
“그렇다면…… 왼쪽 머리로 고르겠습니다.”
“이유는?”
“그냥 감입니다.”
그래.
내가 원한 게 바로 이거다.
주인공의 직감!
소설에선 그 어떠한 스킬보다도 사기적인 스킬이 존재한다.
바로…….
주인공 보정이다.
소설 속 주인공은 그야말로 ‘될놈될’이다.
뭘 해도 되는 존재, 그게 바로 주인공이다.
라스의 선택지에 따라 나는 드래곤 클로를 휘둘러 왼쪽 머리를 베어 냈다.
그러자…….
-크워어어어어어어!
헤르트는 몸부림을 치며 고통에 겨운 울부짖음을 토해 냈다.
잘려나간 왼쪽 머리는 검은 연기로 변하더니, 다시 헤르트의 몸에 달라붙었다.
역시 라스의 선택은 정답이었다.
‘무섭네, 주인공 보정!’
물론 확률은 50퍼센트였다곤 하지만, 그래도 단번에 정답을 고른 라스의 직감에 닭살이 돋았다.
좋겠다, 주인공…….
나도 주인공 보정 같은 거 받으면 좋을 텐데.
하나 모든 상황이 종료된 건 아니다.
칠흑의 조각을 떼어 내야 한다.
이건 어렵지 않다.
‘글레드를 활용하면 되니까!’
나는 글레드를 꺼내 들 준비를 했다.
그러나 갑자기 헤르트가 날뛰기 시작했다.
마지막 발악인가?
헤르트는 입을 벌린 채 나를 잡아먹기 위해 달려들었다.
중간에 제나드가 대검의 널찍한 면으로 헤르트의 턱을 가격했다.
퍼억!
딱 봐도 매우 아파 보였다.
제나드가 헤르트의 발을 묶어 주는 동안, 나는 다시 한번 글레드를 꺼낼 준비를 마쳤다.
하나 나보다 먼저 선수를 친 이가 있었다.
“모두 뒤로 물러나세요.”
라스가 우리에게 손짓했다.
“여기서부터는 제가 알아서 해결하겠습니다.”
“저 몬스터……가 아니라. 헤르트를 죽이면 안 됩니다, 라스 씨!”
“알고 있습니다. 죽이진 않을 테니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이럴 때를 대비해 비장의 무기를 장착해 왔거든요.”
설마.
내 머릿속에 스치는 게 하나 있었다.
화르륵!
라스의 양손에 흰색의 불꽃이 형성되었다.
화이트 플레임!
‘글레드잖아!’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였다.
전방으로 손을 뻗자, 라스의 글레드가 헤르트를 집어삼킨 검은 연기를 모조리 태워 버렸다.
헤르트에게서 떨어져 나온 칠흑의 조각.
마무리는 카이딘이 지었다.
“꺼져라, 이 녀석아!”
째쟁!
칠흑의 조각을 소멸시킨 카이딘.
그제야 라스는 글레드를 다시 집어넣었다.
그런 뒤에 내 쪽을 바라봤다.
“어떻습니까?”
“……좋네요.”
나는 개고생을 하면서 글레드를 겨우 얻었는데 라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가지고 있다니.
망할 주인공 보정!
갑자기 억울함이 밀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