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
망할 주인공 보정! (2)
페르칸 기사 양성소로 진입할 때, 나는 첸버에게 그와 제나드가 기사 출신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뭔가 감춰진 사정이 있어 보였다.
하나 직접 묻진 않았다.
프라이버시이기도 한 데다가 그때에는 페르칸 기사 양성소 문제부터 해결하느라 바빴기 때문이었다.
기왕 기회가 오게 되었으니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첸버는 나를 작은 바로 안내했다.
“앉게.”
“이런 가게가 있을 줄은 몰랐네요.”
“파이스 그 친구가 나에게 분위기 좋은 바를 찾았다면서 추천하더군.”
하여간 그 녀석은…….
술집에 대해서라면 모르는 게 없는 놈이다.
그래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파이스에게 감사하기로 했다.
늦은 시간 동안 문을 여는 곳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마침 첸버가 미리 추천 받은 가게를 알고 있었으니 다행이지,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한참 동안 가게를 찾아 헤맸을지도 모른다.
첸버는 바텐더에게 말했다.
“아까 마시던 걸로.”
“예.”
조용히 2차를 가지려다가 도중에 소란을 듣고 잠시 가게로 나왔다고 했었다.
그 소란의 주범이 바로 나였던 거고.
잔을 채운 뒤, 첸버는 입을 열었다.
“단장은 유독 어린아이들에게 약하지. 혹시 알고 있었나?”
“아니요.”
처음 듣는 말이었다.
“아이를 좋아하는 것과…… 그리고 기사를 관둔 것. 이 두 가지가 밀접한 연관이 있지. 물론 나도 관련되어 있고.”
당분간 첸버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로 했다.
첸버는 순식간에 술 한 잔을 비웠다.
아까 살짝 마셨는데 도수가 꽤 되는 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첸버는 방금 리필 받은 두 잔째도 연거푸 들이켰다.
술을 원래 좋아하는 건지, 아니면…….
술 없이 말하기 힘든 이야기인 건지 모르겠다.
정답은 바로 나왔다.
“나와 단장은 양성소를 나와 같은 기사단에 입단했지. 페르텀이라고. 나름 이름 있는 기사단이었네.”
지금도 유명한 곳이다.
엘리트 중에서도 초엘리트만 들어갈 수 있는 기사단으로 알고 있다.
그런 곳에서 일했다니.
갑자기 첸버가 달라 보인다.
“남들은 다 부러워하더군. 그런 대단한 기사단에 입단했다고. 모두가 부러움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지. 물론 단장도 마찬가지였을 거야. 그때 당시만 해도 페르텀은 선망의 대상이었거든.”
과거의 영광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페르텀은 기사 지망생들이 입단을 원하는 조직이다.
“벨라시오닉이라는 존재가 등장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소국끼리 전쟁이 자주 발발했어. 우리 기사단은 어느 전쟁에 참가했지. 근처 평야에 피난민들이 몰려 있더군. 하지만 그 피난민들은…… 하필이면 우리와 적대적인 관계에 놓여 있는 국가의 주민들이었어.”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그럼에도 나는 일부러 말을 하지 않았다.
첸버의 말을 가로채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동시에…….
내 예상이 빗나가기를 바랐다.
하나.
“갑자기 기사단 단장이 우리에게 이런 명령을 내리더군. 이자들을 모조리 죽이라고.”
“그건 일방적인 학살 아닙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 물론 나뿐만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대부분의 기사들은 명령을 거절했어. 긍지 있는 기사가 민간인을 해칠 수는 없다고. 그랬더니 기사단장은 그 자리에서 자신의 명령을 거역한 자들의 목을 베더군.”
“…….”
무슨 생각으로 학살 명령을 내렸는지 잘 모르겠다.
“나와 제나드…… 아니, 단장도 명령불복종으로 죽을 위기에 처했지. 그래도 우리는 필사적으로 도망쳐서 살아남을 수 있었어.”
그때의 기억…… 아니, 악몽이 떠오른 모양인지 첸버는 다시 술을 마셨다.
“그곳에 아이들도 많이 있었어. 기사들이 아이들의 목숨을 빼앗는 장면을 보면서 제나드 단장은 외쳤지. 미쳤냐고. 이게 기사가 할 짓이냐고. 나는 양성소 시절 때부터 단장과 줄곧 함께해 왔지만, 단장이 그렇게 목소리를 높인 적은 처음 봤어. 그리고 동시에 깨달았지. ‘아, 이 사람이라면 내 등을 맡길 수 있겠구나’ 하고 말이야.”
그때부터 첸버는 제나드라는 남자의 인성과 인품을 본 것이다.
나라도 같은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약자를 지키기 위해 기사단장에게 칼을 겨눈 남자.
“그러면 페르텀과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신 겁니까? 혹시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상태입니까?”
지금까지 내가 봐 왔던 첸버와 제나드는 도망자 신세까진 아니었다.
첸버는 쓴웃음을 지었다.
“우리가 도망치고 난 다음, 그 자리에 있던 페르텀 부대는 모두 죽임을 당했네. 덕분에 나와 제나드는 명령불복종으로 도망친 기사가 아닌, 그 자리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생존자로 인식되고 있지.”
“예? 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이해가 가지 않는다.
민간인들을 학살하던 페르텀 기사들이 갑자기 죽다니?
“칠흑의 조각에게 잠식당한 숙주가 있었어. 그때 당시에는 그게 검은 괴물인지 몰랐지. 그런데 칠흑이라는 존재를 알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때 기사단을 학살한 존재가 검은 괴물인 거 같더군. 뭐…….”
시한폭탄이 존재하고 있을 줄이야.
페르텀 기사들이 왜 그런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는지 알 것 같다.
인과응보라는 건가?
하나 결말이 씁쓸하다는 건 변함이 없다.
“아무튼 그 일로 인해서 제나드 단장은 유독 아이들만 보면 그냥 지나칠 수가 없게 되었지. 거기에 더해서 단장은 대인기피증까지 얻게 되었고.”
“여러모로 트라우마가 되었나 보네요.”
“의외로 단장은 세심한 남자거든.”
음, 솔직히 그건 잘 모르겠다.
그래도 오랫동안 알고 지내 온 첸버가 한 말이니, 믿어도 되겠지.
* * *
동이 트기도 전인 이른 시간.
S팀과 R팀은 숙소 앞에 집합했다.
각 부대장들은 출발 준비가 모두 끝났다고 나에게 보고했다.
바로 출발 신호를 보냈다.
선두에는 S팀이, 후방에는 R팀이 배치되었다.
이동할 때에는 항상 조심해야 한다.
산적이나 몬스터에게 습격당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하나 더 추가된 게 있다면 추종자 정도일까?
추종자들이 대놓고 우릴 노릴 확률은 낮을 것이다.
왜냐하면 라스 일행이 어그로를 잔뜩 끌어 주고 있으니까.
확률이 낮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앞서가던 S팀이 잠시 휴식을 제안했다.
어차피 바쁜 일도 없다.
무리하게 행군을 할 이유가 없었기에 적당히 속도를 조절하며 가기로 했다.
휴식을 취하는 동안, 반드가 이상한 소리를 했다.
“죽음의 향기가 느껴지는군.”
또 중2병이 도진 거 같은데.
그러나 이번에는 베라까지 참석했다.
“나쁜 예감이 드네요.”
“너도 반드한테 중2병이 옮았어?”
“중2병이 뭔가요?”
베라는 도리어 물었다.
모르는 게 당연하다.
왜냐하면 내가 살던 곳에서만 사용하는 표현이었으니까.
“그냥 그런 게 있어. 근데 안 좋은 예감은 뭔데?”
반드는 둘째 치고 베라의 예감은 무시할 수 없다.
그녀는 인간보다 더 뛰어난 감각을 보유하고 있다.
근거가 있으니까 이런 말을 할 터.
하나 베라의 설명은 불투명했다.
“자세히 표현할 수는 없네요……. 반드 씨가 했던 말이 오히려 정확할 거 같아요.”
“죽음의 향기가 느껴진다고?”
“네.”
허, 참……. 뭐라고 반응해야 되냐.
여하튼 위험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이다.
나는 S팀에게 다가가 바로 출발할 것을 요구했다.
최대한 이 지역을 빨리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선두에 서던 S팀이 출발하자마자 5분 만에 행군을 멈췄다.
S팀 용병이 우리에게 다가와 앞의 상황을 전달했다.
“전방에 마을이 하나 보입니다. 근데 좀 수상합니다.”
“어떻게 수상하다는 거야?”
“정찰병의 말에 따르면, 몬스터에게 습격당한 흔적이 군데군데 보인다고 합니다.”
반드의 말이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죽음의 향기가 바로 앞에서 풍겨 오고 있었다.
S팀과 R팀은 일단 마을로 향하기로 했다.
우리의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르니 말이다.
마을 입구에 접어든 순간, 드레인이 짧게 소감을 표했다.
“엉망진창이네.”
마을을 지키던 입구 문과 벽은 다 뜯겨져 나갔다.
사람 시체와 혈흔, 그리고 부서진 마을 집들.
거대한 몬스터에게 습격당한 듯한 모습이었다.
나는 목소리를 높였다.
“누구 없습니까!”
무반응이다.
설마 다 죽었나?
혹시 몰라서 마나 탐지 스킬을 사용했다.
마나를 얇게 퍼트렸다.
‘사람이 있긴 한데…….’
생존자로 추정되는 자들이 단체로 몰려 있다.
나는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안에서 단단히 걸어 잠근 듯했다.
“안에 계십니까? 블루로즈단 R팀 대장, 로인이라고 합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문 좀 열어 주실 수 있습니까?”
끼릭.
조금씩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실례합…….”
말을 걸기도 전이었다.
안에서 수많은 창들이 튀어나왔다.
안에 있던 자들이 기습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런 공격에 당할 리 없지 않은가?
오른 발을 들어 올리면서 무릎으로 창 하나를 부러뜨렸다.
왼손으로 창 두 개를 낚아챘다.
오른손은 그냥 크게 휘둘러 창 끝을 잘라 내 버렸다.
“손님맞이가 상당히 거친 거 아닙니까?”
나는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외쳤다.
그들은 평범한 민간인이었다.
무기를 다루는 법도 전혀 몰랐다.
창을 찌르는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이들은 잔뜩 겁을 먹었다.
“사, 살려 주세요, 제발……!”
30여 명의 사람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내게 용서를 구했다.
성별, 연령층이 굉장히 다양했다.
“여기서 뭐 하고 있던 겁니까? 마을은 왜 이 꼴이 나 있고요?”
나는 이들에게 그간의 일을 전해 듣고 싶었다.
머리가 살짝 까진 남자가 나를 올려다봤다.
“추, 추종자가 아닙니까?”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블루로즈단의 R팀 대장, 로인이라고. 못 들었습니까?”
“저희를 속이기 위해 거짓말을 한 줄 알았습니다.”
도대체 어떤 상황이기에 이들을 의심쟁이로 만들었을까?
일단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 * *
첸버와 제나드, 나, 그리고 드레인까지. 이렇게 네 남자는 마을 한쪽 구석에 숨어 있던 생존자들에게 믿기 힘든 말을 듣게 되었다.
“그들이…… 우리의 수호신을 검은 괴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검은 괴물이라는 단어는 잘 안다.
그런데 수호신이라니?
처음 듣는 말이다.
첸버가 우리를 대표해서 물었다.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무래도 저희는 외지인이다 보니 수호신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군요.”
“마을을 지키는 영물을 가리키는 겁니다. 이곳에선 ‘헤르트’라 불리죠. 평상시에는 마을 사람들을 잘 따르고, 마을을 노리는 산적이나 몬스터들로부터 이곳을 지켜 주던 역할을 하던 영물이었는데……. 갑자기 추종자들이 헤르트를 납치해 그들의 종으로 삼았습니다. 이성을 잃은 헤르트는 마을을 덮쳤고,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했습니다. 저희는 미처 도망칠 여력이 되지 못해 이곳에 숨어 지내고 있었습니다.”
사정이 매우 딱하다.
남자는 첸버의 손을 꼭 잡았다.
“부디…… 부디 저희를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제발!”
“그건 좀…….”
첸버는 선뜻 이들의 부탁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우리는 이제 막 벨레너의 4번째 난제를 클리어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피로가 쌓일 만큼 쌓였다.
이런 와중에 무지막지한 괴물까지 상대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제나드의 생각은 달랐다.
“도와주겠습니다.”
“정말입니까!”
“예, 믿으셔도 됩니다.”
제나드라면 저런 말을 할 줄 알았다.
왜냐하면 숨어 지내는 생존자들 중에서 어린아이들의 모습이 많이 보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