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
악당의 생각 (2)
익숙한 상황이다.
도플갱어의 숲에서였을 것이다.
그때 나는 데르킨 백작을 몬스터로 오인하고 단검을 들이민 적이 있었다.
이번에도 바로 그 직전까지 갔다.
나는 허리로 향했던 손을 다시 거둬들였다.
데르킨 백작은 이런 내 모습을 보면서 계속 미소를 유지했다.
“자네는 경계심이 매우 심한 편이군. 아니면 혹시 이번에도 나를 몬스터라고 오인했던 건가? 안심하게. 일렉터는 몬스터가 거리를 활보하고 다닐 만큼 치안이 나쁜 도시가 아니니까.”
“…….”
알고 있어.
너무 잘 알아서 탈이지.
그리고 한 가지 더 안다.
몬스터보다 더 무시무시한 존재가 내 눈 앞에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라크스 공작의 둘째 딸을 경호하기 위해 이곳까지 온 걸로 알고 있는데.”
그런 것까지 알고 있나?
하기야, 데르킨 백작과 척지고 있는 라크스 공작의 딸이 여기에 왔으니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을 것이다.
라크스 공작 역시 데르킨 영지로 가는 레미를 걱정하여 나에게 경호를 맡긴 거였고.
나는 계속 침묵을 유지했다.
일부러 말을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거다.
데르킨 백작도 그걸 잘 알고 있었다.
“바쁘지 않다면 잠시 나와 차나 한잔할 텐가?”
느닷없는 제안이었다.
거절할까?
아니, 오히려 이건 기회일지도 모른다.
데르킨 백작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지…….
단서를 잡아 낼 수 있는 기회로 만든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데르킨 백작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 * *
데르킨 백작이 머무르는 숙소.
오면서 나는 데르킨 백작을 따르는 자들의 인물 정보 창을 살폈다.
‘추종자는 안 보이네.’
일부러 숨겨 둔 건가?
숙소도 특별한 거라곤 보이지 않았다.
“앉게.”
맞은편에 자리를 잡자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시종이 커피를 한 잔씩 내왔다.
나는 커피잔을 응시했다.
‘혹시 독이라도 탄 건 아니겠지?’라고 생각할 때였다.
“아무것도 안 탔으니까 걱정 말게.”
“…….”
이 남자도 라스퉁처럼 독심술이라도 익힌 건가?
차를 들어 한 모금을 음미했다.
데르킨 백작의 말대로 독은 들어 있지 않았다.
설령 독이 들어 있다고 하더라도 나를 쉽게 암살할 순 없다.
왜냐하면 내 몸은 드래곤의 육신이 지닌 능력치를 그대로 물려받았으니까.
드래곤이 인간이 만든 독 따위에 암살당하진 않는다.
차를 한 모금 음미한 데르킨 백작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듣자하니 라스, 그리고 라스크 공작과 친한 사이라고 하던데.”
두 사람 다 데르킨 백작의 주요 적들이다.
나를 떠보려는 건가?
나는 수첩을 꺼내 들었다.
-친하다고 말하기에는 좀 그렇습니다만……. 하지만 안 친한 것도 아니지요.
“그렇군.”
부정도, 긍정도 아닌 대답.
데르킨 백작은 매우 흥미롭다는 눈빛을 보였다.
“혹시 나에 관한 소문도 알고 있나? 내가 칠흑을 따르는 추종자들과 뒷거래를 하고 있다……. 이런 거 말일세.”
자, 이번에는 어떤 선택지를 고를까?
오래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바로 답을 들려줬다.
-예, 들었습니다.
“하긴 모를 리가 없지. 두 사람과 친분이 있다고 했으니까.”
실제로 데르킨 백작은 라스, 라크스 공작 연합과 전투를 벌인 적도 있었다.
게다가 루크는 나와 전투를 치르기까지 했다.
루크가 내 이야기를 백작에게 안 했을 리가 없다.
“난 예전부터 자네에게 아주 관심이 많았어. 물론 이상한 의미의 관심은 아닐세. 그 부분에 대해선 안심해도 좋아.”
본인이 말하고 본인이 피식 웃었다.
질 나쁜 농담이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이후에 이어지는 데르킨 백작의 발언은 거의 다이너마이트급이었다.
“자네가 내 사람이 되어 준다면 좋겠군.”
* * *
악당의 제안.
자신과 같은 편이 되어 달라는 파격적인 발언이었다.
“자네는 강해. 그뿐만 아니라 다방면으로 능력이 출중한 인재지. 나는 뛰어난 능력을 지닌 인재를 매우 좋아하네. 딱 자네 같은 사람 말이야.”
악당한테 칭찬을 받으니까 기분이 굉장히 묘했다.
기분이 더럽다든가 그런 건 아니다.
악당이라 하더라도 내 능력을 인정하고 칭찬하니, 어찌 보면 당연한 감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쁜 것도 아니다.
그냥 그러려니 했다.
“라크스 공작, 그자가 자네에게 어떤 대우를 해 주는지는 모르겠군. 하지만 난 자네의 가치를 매우 높게 평가하네. 그리고 그 가치에 따른 대우 역시 충분히 해 줄 자신이 있고.”
-그 대우가 어떤 겁니까?
“이 세계의 일부를 자네에게 주겠네.”
무시무시한 스케일이다.
무슨 주식 지분 나눠 주겠다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이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소리라는 게 더 무섭다.
“이 세계는 죄악으로 물들었네. 지금의 인류는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지. 한 사람이 목소리를 낸다 해도 이미 잘못된 길로 들어선 인류 역사를 다시 되돌릴 수는 없네. 그렇다고 다수가 나서서 행동한다? 그래도 난 같은 결과가 반복될 거라고 생각하네. 왜냐하면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는 그리 착하지 않으니까.”
성악설(性惡說)인가?
학교 다닐 때 공부한 적이 있다.
인간의 본성은 착하지 않다.
악하기 때문에 교육과 사회생활을 통해 인간의 악함을 줄여 나가는 거다.
데르킨 백작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백작님이 멋대로 판단을 내리셔도 되는 겁니까? 그것은 신이 할 일이 아닙니까?
“신이 하지 않기 때문에 나 같은 사람이 해야 하는 법이지. 만약 신이 직접 나섰더라면 나는 이런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델리피나 대륙을 관장하는 신께서는 매우 게으른 분이신 거 같더군. 인류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아직도 가만히 계시고 있으니까. 그래서 내가 직접 나서기로 했네.”
-백작님은 그럴 만한 능력이 되십니까?
“나는 ‘힘’을 가지고 있네.
그 힘의 정체를 나는 아주 잘 안다.
칠흑으로부터 부여받은 힘이다.
결코 신의 힘이 아니다.
말은 참 그럴싸하게 잘한다.
자신의 신념을 포장하는 실력은 진짜 기가 막힐 정도다.
또다시 질문을 꺼냈다.
-백작님께선 어떤 방식으로 잘못된 방향을 개선하실 생각입니까?
“이 세계를 다시 한번 제로(Zero)로 되돌릴 생각이네. ‘리셋’이라고 표현하면 편하겠지.”
즉, 세계 멸망이군.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본인 입으로 들으니 새롭게 느껴졌다.
동시에 결심이 섰다.
-죄송하지만 저는 백작님과 함께할 수 없습니다.
내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데르킨 백작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그게 자네의 결정인가?”
-예, 그렇습니다.
“그렇군. 알았네. 더 이상 말을 해 봤자 소용은 없을 거 같군. 탐이 많이 났는데……. 아쉬워.”
나는 전혀 아쉽지 않다.
누군가에게 구속받고, 명령 받고…… 그런 건 직장 생활을 할 때 충분히 경험했다.
이제는 내가 주도적으로 이 이야기를 이끌어 갈 것이다.
설령 상대가 데르킨 백작…… 아니, 칠흑이라 해도 나는 절대로 변심하지 않겠다.
* * *
예선이 끝나고 본선 무대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도 특별한 사건은 없었다.
평화라는 건 참 좋다.
이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무사히 대회가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꺄아아악!”
비명이 경기장 가득히 울려 퍼졌다.
위플 경기 16강이 펼쳐지려고 할 때 사건은 발생했다.
갑자기 난입한 검은 괴물 두 마리.
‘추종자의 습격인가?’
하나 검은 괴물만 있고 추종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을 학살할 생각이었다면 데르킨 백작은 좀 더 강한 전력들을 투입할 수도 있었을 거다.
데르킨 백작의 휘하에는 루크나 마리도 있고 다수의 추종자들도 거느리고 있다.
그런데 고작 검은 괴물 두 마리가 전부라니.
‘이해가 잘 안 가네.’
그래도 일단 문제부터 해결하고 보기로 했다.
문제가 터지자마자 대회장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가르시아가 부대를 이끌고 안으로 들이닥쳤다.
나는 가르시아에게 외쳤다.
“가르시아! 파이스하고 에나랑 같이 부대를 이끌고 오른쪽 녀석을 맡아라! 나는 왼쪽 놈을 처리할 테니까!”
“맡겨 주십시오, 대장님!”
지금 가르시아 부대의 실력이라면 검은 괴물 한 마리 정도는 어렵지 않게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내 명령을 받자마자 가르시아는 광기의 정령을 깨웠다.
이제는 광기의 정령을 통제하는 방법을 어느 정도 깨달은 모양인지 정령의 힘을 자유자재로 사용했다.
가르시아가 정면에, 그리고 파이스와 에나가 후방에서 가르시아를 지원하는 포메이션으로 진영을 구축했다.
든든한 부하들을 둬서 안심이다.
잠식 2단계에 접어든 검은 괴물은 날카로운 이빨을 들이밀며 내게 달려들었다.
짐승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저 안에는 사람이 있다.
여태껏 나는 검은 심장을 도려내 파괴하는 것으로 검은 괴물들을 처리해 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방식으로 싸울까 생각 중이다.
‘시험해 보고 싶은 게 있어.’
새로 얻은 힘을 사용해 보기로 했다.
오른손에 생명의 불씨, 글레드의 힘이 깃들었다.
유지 시간이 길지 않다.
‘10초 안에 모든 걸 끝낸다!’
검은 괴물의 마구잡이 공격을 요리조리 피해 내면서 안으로 파고들었다.
놈이 무방비 상태일 때를 노려 글레드의 불길이 붙어 있는 오른 주먹을 크게 휘둘렀다.
뻐어억!
검은 괴물의 가슴에 내 주먹이 적중했다.
동시에 글래드의 불길이 놈의 몸에 옮겨 붙었다.
-끼에에에에에엑!
비명을 질러 대는 검은 괴물…… 아니, 칠흑의 조각이 내지르는 비명이었다.
숙주를 잠식하던 검은 연기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글레드에 버티지 못한 칠흑의 조각은 결국 숙주로부터 떨어지는 걸 택했다.
‘렉스 연구소에서 봤던 것이 사실이었어!’
글레드는 칠흑의 약점이다.
그걸 내가 또 한 번 증명시킨 셈이었다.
한편, 칠흑의 조각이 들러붙어 있던 숙주, 추종자는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조, 조각이…… 어, 어떻게……!”
믿지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칠흑의 조각을 집어 들었다.
놈은 나를 집어삼킬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나는 글레드의 가호를 받고 있기 때문이었다.
붉은 천으로 칠흑의 조각을 감싸 강하게 동여맸다.
일반 천이 아니다.
높은 마법 저항력을 지닌 유니크 아이템이다.
주머니 속에 칠흑의 조각을 넣은 나는 추종자에게 다가갔다.
“이번 일을 주모한 게 데르킨 백작이냐?”
“그, 그건……!”
나는 추종자를 증인으로 세울 예정이었다.
데르킨 백작이 저지른 만행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
그러나 내 계획은 이뤄질 수 없었다.
하늘에서 떨어진 거대한 낫이 추종자의 목을 뎅겅 베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많이 본 낫이다.
나는 낫이 날아온 방향을 바라봤다.
“……루크!”
놈은 기분 나쁜 미소를 내게 한 번 보이고서 다시 모습을 감췄다.
추종자가 임무에 실패할 것을 대비해 미리 대기하고 있던 건가?
다른 검은 괴물도 내 용병들에 의해 제압당했다.
사건은 마무리되었지만, 찝찝함은 계속 남았다.
* * *
데르킨 백작이 왜 고작 검은 괴물 두 마리만 투입시켰는지…… 이게 찝찝함의 정체였다.
그러나 이 찝찝함은 이틀 후에 풀렸다.
“대장님, 오늘 소식지에요.”
“땡큐.”
라비에게 고맙다고 말을 한 후에 나는 델리피나 대륙 전반의 소식을 담은 신문을 펼쳤다.
1면에 떠 있는 건 아니나 다를까, 데르킨 백작의 활약상을 담은 기사 전문이었다.
-위기 속에서 더욱 빛난 데르킨 백작의 대처!
-귀족의 모범, 데르킨 백작. 아수라장이 된 대회장 속에서 시민들을 구출해 내다!
“그랬군.”
이제야 알겠다.
왜 위플 대회를 열고, 그곳에서 사건을 일으켰는지.
“이미지 관리인가……?”
데르킨 백작은 추종자들과 뒷거래를 하고 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그런 이미지를 쇄신하기 위해 일부러 이런 쇼를 벌인 것이다.
“텔레비전에서만 보던 정치인들의 언론 플레이를 설마 여기서 접하게 될 줄이야.”
데르킨 백작, 역시 대단한 남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