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
글레드를 만나기 위한 자격 (2)
라스퉁을 따라 이동한 곳은 그가 머무르는 곳으로 추정되는 움막이었다.
가족들은 안 보였다.
크기라든지 안에 들어 있는 식기 도구 등을 확인해 봤을 때, 라스퉁은 이곳에서 혼자 사는 듯했다.
이런 생각을 머릿속으로 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부모님은 돌아가셨소. 나에게 형제자매도 없고. 그래서 나는 혼자 이렇게 살고 있소.”
말도 안 했는데 어떻게 알았지?
“고대의 정령들이 알려 주니까.”
“…….”
거참, 머릿속으로 함부로 생각도 못 하게 만드네.
고대의 정령인지 뭔지 때문에 내 생각이 그대로 라스퉁에게 읽히는 듯했다.
그렇다면 마일도 마찬가지 아닌가?
“마일, 넌 특히나 조심해야겠네. 머릿속에 든 게 많이 있잖아?”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지금 일부러 다른 생각을 하는 중입니다.”
“어떤 생각?”
“어제 먹었던 스프에 대해서요. 맛이 굉장히 특이하더군요. 지금까지 제가 먹어 본 적 없는 맛이었습니다. 아마 제가 죽을 때까지 그 맛을 떠올릴 수 있을 거 같더라고요.”
“그 정도로 충격이었어?”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어떤 스프인지 나중에 꼭 먹어 보고 싶어지는 걸?
……그런데 어쩌다가 갑자기 스프 이야기가 나왔는지 모르겠네.
아무튼 나와 마일은 라스퉁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라스퉁은 바로 입을 열었다.
“글레드 때문에 온 거요?”
“잘 아시네요. 이번에도 고대의 정령이 알려 줬습니까?”
“물론이오.”
편하네.
나도 고대의 정령 같은 거 하나 가지고 있다면 참 좋을 거 같은데.
라스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고대의 정령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자는 극히 한정되어 있소. 우리 여우리족에서조차도 고대의 정령과 대화를 나누는 자는 손꼽힐 정도지.”
“그렇게 대단한 존재입니까?”
“이 세계가 창조될 때부터 존재해 오던 정령들이오 그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우리는 하찮은 피조물로밖에 보이지 않을 터.”
“신이라도 됩니까?”
“신과는 다른 존재요. 그들을 직접 접하게 된다면 알게 될 것이오.”
“저는 고대의 정령보다 글레드를 보려고 여기까지 왔는데요.”
나는 내 목적을 확실히 전달했다.
그러자 라스퉁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글레드가 바로 고대의 정령이 남기는 흔적이오. 고대의 정령에게 인정받아야 글레드와 만날 자격이 주어지지.”
그렇게 귀한 물건이라고?
렉스 연구소에 있는 글레드는 우체부를 통해서 배달되어 왔는데. 크흠!
아무튼 저렇게 진지하게 말하니, 차마 태클을 걸 수는 없었다.
그냥 그러려니 해야지.
아무튼 난 글레드를 보고 싶다.
직접 이 두 눈으로!
라스퉁은 이번에도 내가 별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알아서 입을 열었다.
“마음의 준비는 되었소?”
“특별한 절차라도 있는 겁니까?”
“글레드와 만나기 위한 통과의례가 있소. 거기서 고대의 정령들에게 인정을 받아야 하오.”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해 보기로 했다.
“까짓것 해 보죠.”
“호쾌한 청년이로군.”
얼마나 어려운 시험이 될지 나는 모른다.
1, 2, 3권에선 이러한 내용이 단 한 차례도 언급되지 않았으니까.
소설 속에 나오지 않았던 칠흑의 약점.
나는 그것을 얻기 위해 다시 한번 바삐 움직이기로 했다.
* * *
“…….”
나는 내 앞에 있는 사람을 빤히 바라봤다.
한 노파였다.
노파는 나를 앉혀 두고 뭐라고 중얼중얼 주문 같은 것을 영창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대나무와 나무줄기로 만든 채찍 같은 걸 마구 휘둘렀다.
처음에는 날 때리려고 그러는 줄 알았다.
찰싹!
……때리는 거 맞네.
머리, 양어깨, 등을 번갈아 가며 찰싹찰싹 때려댔다.
‘나, 이런 취미 없는데.’
요상한 상상이 들었지만, 이내 접어 두기로 했다.
라스퉁이 내 생각을 읽어 버리면 민망하니까.
노파의 채찍질(?)이 끝난 이후, 젊은 남자와 여자가 작은 바가지를 들고 왔다.
“이게 뭡니까?”
나는 라스퉁에게 물었다.
안에 담겨 있는 건 각각 붉은색, 흰색 액체였다.
양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굉장히 수상해 보였다.
라스퉁은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위해 친절히 설명을 들려줬다.
“하나는 소의 피, 그리고 다른 하나는 타리카 나무에서 받아 온 수액이오.”
“이걸 마시라고요?”
“조합해서 마실 거요. 잠시 기다리면 되오.”
빈 바가지가 등장했다.
그곳에 소의 피와 타리카 수액을 섞었다.
이후에 소금과 이상한 가루를 탔다.
“저 가루는…….”
“코와지의 뿔을 갈아 만든 가루요. 코와지는 본 적 있소?”
“예전에 잠깐 봤긴 했죠.”
코와지는 내가 있던 세계로 치자면 코뿔소와 비슷하게 생긴 초식 동물의 이름이었다.
여하튼 코와지 뿔의 가루까지. 이렇게 4개가 첨가되었다.
나는 바가지를 들었다.
아니, 들려고 했다.
노파가 갑자기 나무줄기 채찍으로 내 손을 쳤다.
뭐지? 마시는 거 아니었나?
나는 라스퉁에게 항의의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라스퉁은 작게 웃으면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아직 하나가 더 남았소.”
“하나는 뭔데요?”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비위 상할 거 같은데, 아직 멀었다니…….
돌아 버리겠네.
라스퉁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왜 저런 미소를 짓나 싶더니…….
“사람의 타액이오.”
“네에?”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타액이라고? 그게 뭔데?
머릿속이 혼란스러운 나를 대신해 마일이 자신의 추측을 들려줬다.
“침입니까?”
“맞소.”
이런 썅!
남의 침이 섞인 액체를 마시라고? 저것만으로도 충분히 구역질이 나올 거 같은데!
당황하는 나에게 마일이 용기를 불어넣어 줬다.
“이것도 다 통과의례니까 참으시지요, 로인 님.”
“……남의 일이라고 막 내뱉네. 너도 마시게 해 줄까?”
“저는 글레드에 별로 관심 없습니다. 후후.”
웃는 것도 기분 나쁘네.
처음에는 나를 감시하려고 따라온 줄 알았건만.
나 약 올리려고 따라온 거 같잖아.
나는 노파를 가리키면서 라스퉁에게 물었다.
“혹시 이분 침을 타는 건 아니죠?”
“그런 취향이었소?”
“전혀요. 그럼 제가 마음대로 골라도 되나요?”
다행이도 라스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마일이 갑자기 기겁을 했다.
“저는 싫습니다, 로인 님.”
“누가 네 침 따위를 마신대? 호들갑 떨지 말고 입 다물고 그냥 얌전히 있어라. 주먹 나가기 전에.”
기왕 이렇게 된 거, 아까 바가지를 들고 왔던 아가씨에게 부탁하기로 했다.
어차피 누군가의 타액을 마셔야 한다면, 미인을 택하는 게 좋지 않겠나?
“저 아가씨 게 좋겠네요.”
“오호, 자네, 그런 취향이로군.”
“로인 님의 취향, 잘 알겠습니다. 새로운 정보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것들이 진짜!
취향 문제가 아니잖아.
최선책이 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차선책을 택한 거라고.
라크리어를 못하는 나 대신 라스퉁이 여성에게 다가가 설명을 했다.
여성은 잠시 나를 경멸 어린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렇게 쳐다보는 거,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상하게 오해하지 마시길.
저, 그런 페티시는 없으니까요.
* * *
통과의례에 사용되는 혼합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러나 다 마시는 건 아니었다.
나머지는 내 전신에 덕지덕지 바르는 것이었다.
다시 옷을 입은 후에 나는 라스퉁에게 물었다.
“이제 끝났습니까?”
“아니, 이 길을 쭉 따라 숲 바깥으로 나가면 동굴이 하나 있을 거요. 그곳을 통과하면 되오. 고대의 정령들이 잠시 쉬었다가 가는 장소이기도 한 곳이니, 언행에 특히 주의하길 바라오. 괜히 정령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면 안 되니까.”
고개를 끄덕여 준 뒤에 나는 곧장 걸음을 옮겼다.
여기서부터는 나 혼자만의 시간이다.
아니지.
‘혼자는 아니겠구나.’
고대의 정령들이 머무르는 곳이라고 했으니까.
말은 그렇다 치더라도, 내 눈에는 고대의 정령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거라고는 거대한 나무와 풀 등.
‘그러고 보니 몬스터가 안 보이네?’
고대의 숲에 들어와서 지겹도록 얼굴을 봤던 공룡 타입의 몬스터들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이것도 고대의 정령인지 뭔지 하는 것 때문인가?
“…….”
말없이 앞으로 계속 걷기만 했다.
그러기를 대략 20분 정도.
눈앞에 동굴 하나가 등장했다.
“여기군.”
딱 봐도 알 수 있었다.
왜냐?
동굴이 이거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앞이 깜깜하다.
라이트 볼을 사용할까 하다가 이내 관두기로 했다.
‘몸가짐에 조심하라고 했으니까.’
어쩌면 고대의 정령은 빛을 싫어할지도 모르지 않은가?
눈이 어둠에 적응된 모양인지 동굴의 윤곽 같은 게 보이기 시작했다.
‘앞으로 계속 걷기만 하면 되는 건가?’
간단하네.
그나저나 출구가 있으려나 모르겠다. 일단 라스퉁의 말을 믿고 무작정 걷긴 하는데…….
‘이건 뭐지?’
앞이 가로막혀 있다.
아니, 가로막힌 게 아니었다.
자세히 보니…….
‘비탈길이네?’
경사가 꽤 되는 비탈길이었다.
45도 각도 정도로 보인다.
이 정도면 걸어서 올라가기에는 무리가 있다.
“웃차!”
나는 네 발로 비탈길을 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경사가 점점 가파졌다.
45도를 넘어서 70도…… 이제는 거의 90도에 육박했다.
‘암벽등반 수준이잖아!’
용신단이 아니었으면 벌써 굴러떨어졌을지도 모른다.
한 걸음 한 걸음. 위로 향했다.
그런데 끝이 안 보인다.
‘이 동굴이 원래 이렇게 컸나?’
밖에서 봤을 때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는데.
아무튼 계속 올라가기로 했다.
그때였다.
-야, 강시언! 네가 업무 처리를 이따위로 하니까 내가 바깥에서 욕 먹고 다니잖아!
-시언 씨, 아무리 급한 일이라도 그렇지, 오늘 저녁에 약속 있는 사람한테 일 좀 도와 달라니, 좀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건 또 뭐냐?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그러나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환청인가?’
다시 암벽을 올랐다.
-시언아, 누가 계약을 이딴 조건으로 맺어 오라고 했냐? 너, 나 대표님한테 깨지는 꼴 보고 싶어서 일부러 그러는 거 아니냐? 엉?
부장님의 목소리다.
틀림없다.
-회사 생활 오래 하고 싶으면 봐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하며 지내는 거야. 너도 알잖아? 우린 주인공이 아니라고. 그냥 엑스트라처럼 살아가면 되는 거야.
“…….”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난 부장님의 말에 동의했다.
우리는 엑스트라 인생이라고.
주인공은 따로 있으니까 엑스트라처럼 조용히 살면 그것 자체가 행복이라고.
하지만…….
“소설 속에 들어오니까 세상이 달라 보이더라고요, 부장님, 엑스트라 인생은 지겹지 않나요? 저도 한 번쯤은 주인공 해 보고 싶습니다!”
손을 뻗었다.
순간 돌부리가 뽑혔다.
밑으로 굴러 떨어질 뻔했지만, 남은 한 손으로 버텨 냈다.
이번에는 다른 속삭임이 들려왔다.
-주인공이 되기 위해 이곳에 온 건가?
-그게 네 인생의 목적이라 할 수 있나?
-네가 추구하는 건 안정적인 삶을 포기할 정도로 가치가 있는가?
“난 그딴 철학적인 말 몰라!”
이를 악물고 한 걸음을 내딛었다.
목소리를 뒤로하고 계속 오르고 또 올랐다.
작게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빛은 커져갔다.
조금씩이지만…… 나는 앞을 향해 전진하고 있다.
속삭임 또한 계속해서 들려왔다.
꾸역꾸역 위로 올라섰다.
동굴을 빠져나가기 직전.
-주인공이 되고 싶은가?
속삭임의 마지막 질문에 나는 이렇게 답했다.
“아니, 난 주인공보다 더 빛나는 존재가 될 거다.”
그 말과 함께 나는 동굴 끝에 올라서는 데에 성공했다.
그리고.
의식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