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엑스트라-120화 (120/240)

# 120

읽어라! (6)

나는 델리피나 전기를 2권까지밖에 읽지 않았었다.

그 상태로 오늘 날까지 어떻게든 이야기를 이끌어 왔다.

그러면서 이 소설 속 세계의 마지막이 배드 엔딩이 될 거라는 의심은 전혀 하지 않았다.

라스가 칠흑을 물리치고 세계의 평화를 되찾아오겠거니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보고 온 건 전혀 달랐다.

세계 전체가 칠흑에게 잠식당한다.

그것이 이곳, 델리피나 대륙의 마지막이었다.

‘카인, 그 작자, 적어도 해피 엔딩으로 썼어야지. 요즘 장르문학 시장에서 배드 엔딩으로 이야기 마무리 지으면 욕 엄청 먹는다고!’

아니지. 델리피나 전기는 카인이 작성한 소설이라기보다는 카인이 미래의 일을 보고 그걸 글로 옮겨 쓴 예언서라고 보는 편이 좋다.

카인이 본 건 암울한 미래의 내용이다.

‘라스가 칠흑에게 지다니. 생각도 못 했는데.’

내가 예상했던 모든 것들이 완전히 다 꼬여 버린 느낌이다.

내가 말도 없이 계속 생각에 잠겨 있어서 그런 걸까.

세올라는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저기…… 괜찮은 거 맞죠?”

“네, 멀쩡합니다. 아무튼 굉장하네요. 차원 이동 마법을 실제로 이렇게 구현할 수 있는 마법사가 존재하다니. 이걸 조금만 더 다듬으면 나중에는 영구적으로 차원 이동을 할 수 있는 때가 오겠죠?”

“그거야 해 봐야죠. 사실 차원 이동 마법이라는 분야가 체계적으로 정립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계속 부딪치고 실험해 보고 해야 해요.”

“알겠습니다. 투자처가 필요하다고 하셨죠? 제가…… 아니, 로그 상단이 투자자가 되어 드리겠습니다.”

나는 세올라의 연구에 적극 투자하기로 했다.

* * *

나울로 돌아온 나는 바로 라그너를 호출했다.

라그너는 단숨에 내 사무실로 뛰어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로인 님?”

“조만간 이곳으로 마법사가 한 명 올 거야. 이름은 세올라. 가하에 있던 중급 마법사이고, 참고로 연애 경험은 없대. 근데 재미있는 연구를 하고 있더군. 그래서 우리 로그 상단이 그녀의 연구에 투자하기로 했어.”

“예? 어떤 연구입니까?”

“차원 이동 마법.”

“……의미 없는 투자가 될 거 같습니다만.”

“아니, 가능성은 충분해. 왜냐하면 내가 직접 실험 대상이 되어 봤거든.”

“예?”

라그너는 화들짝 놀랐다.

그에게 있어서 나는 매우 귀하신 몸이다.

그러니 놀라는 건 당연했다.

“로인 님! 제가 수차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위험한 일을 자처하시면 안 된다고요.”

“막대한 결과를 얻으려면 가끔은 모험수도 두고 그래야 하는 거야. 너도 사업하는 사람이니까 잘 알잖아?”

“그야 그렇지만……!”

“아무튼 투자는 결정되었으니 그렇게 알아 둬. 그리고 나중에 마법사 길드랑 주기적으로 미팅을 가지면서 차원 이동 마법에 관심을 보이는 마법사가 있으면 로그 상단으로 스카웃을 해. 세올로의 연구 조직이 어느 정도 커졌다 싶으면 재단 만들고 투자 규모도 아낌없이 늘려.”

“로인 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로인 님께서 차원 이동 마법에 관심을 이렇게나 많이 가지고 계실 줄은 몰랐군요.”

모르는 게 당연하다.

내가 다른 차원에서 넘어왔다는 사실을 아는 건 델리피나 대륙에 딱 두 명만 존재한다.

휴즈, 그리고 카인.

두 사람 다 세간에 모습을 드러낼 만한 자들이 아니었기에 나의 감춰 둔 진실은 세상사에 들어날 일이 거의 없었다.

차원 이동 마법 연구는 아낌없이 지원해야 한다.

내가 있던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서라도 이건 반드시 필요하다.

‘마침 난 돈을 가지고 있지.’

설마 이럴 때가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역시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 * *

라그너를 다시 돌려보낸 뒤에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3권을 읽으면서 나는 3가지를 중점적으로 살폈다.

첫 번째, 벨라시오닉의 보물의 위치였다.

‘이건 대충 기억하고 있어.’

머릿속에 다 기억을 해 뒀으니 일단 안심이다.

그리고 두 번째, 카인의 존재 여부.

3권에도 대예언가 카인의 이름은 한두 줄만 언급되고, 직접 등장하진 않았다.

‘등장하긴 하나?’

솔직히 잘 모르겠다. 이건 4, 5권을 봐야 알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 이것이 핵심이다.

생명의 불씨, 글레드에 관한 정보다.

그러나 놀랍게도 3권에서조차 글레드에 관한 언급은 일체 없었다.

‘왜지?’

의문이 들었다.

3권 정도 되면 글레드에 대한 언급이 나와야 하는 거 아닌가?

그래야 4, 5권부터 본격적으로 칠흑과의 싸움이 전개될 텐데?

불현듯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설마 배드 엔딩이 나온 이유가 글레드를 발견하지 못해서인가?’

3권까지 언급이 없을 정도면, 소설 속에서는 글레드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래서 칠흑을 쓰러뜨리지 못했고, 세계가 멸망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있는 이 소설 속 이야기는 델리피나 전기와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글레드가 발견됐다.

그리고 이것이 칠흑의 약점이라는 사실까지 알아냈다.

만약 내가 알파를 다시 데려오지 못했더라면, 델리피나 전기와 같은 이야기 흐름이 전개되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미래를 바꾼 거야!’

하나 글레드의 발견이 곧 해피 엔딩으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아직 내가 모르는 뭔가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건…….

‘4, 5권의 내용을 알아야 하는데!’

왜 하필이면 제한시간이 1시간뿐이냐고.

3시간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의 책 읽는 속도면 3시간 안에 델리피나 전기를 완결까지 다 독파할 수 있었을 텐데.

‘괜찮아. 다음에 또 기회가 있겠지.’

초조해하지 말자.

기회는 한 번만 오는 게 아니다.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기회는 여러 번 올 수 있다.

일단 머릿속을 정리하기로 했다.

소설 속 내용은 서면으로 남겨 두지 않았다.

일부러 그랬다.

왜냐하면 내가 알고 있는 소설 속 내용이 혹여나 다른 사람에게 발견되기라도 한다면, 그 정보가 유출되어 데르킨 백작이나 루크, 혹은 추종자들의 손에 넘어가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그래서 나는 불안 요소가 될 만한 걸 애초에 만들지 않기로 했다.

걱정은 없다.

나는 기억력이 좋으니까.

생각에 잠겨 있을 무렵 라비가 내 사무실을 찾았다.

“대장님, 손님이 찾아오셨는데요.”

“누군데. 라그너? 아니면 첸버?”

“대장님이 깜짝 놀랄 만한 손님이에요. 일단 내려와 보세요.”

사람 궁금하게 만드네.

라비를 따라 1층으로 내려갔다.

갑자기 덩치 큰 고양이 1마리가 내 품에 강제로 안겼다.

많이 보던 고양이다.

“카틀리나잖아?”

그렇다면 설마……!

“로인 씨! 저 왔어요.”

오 마이 갓!

체릴, 기어코 여기까지 왔구나.

* * *

체릴의 방문은 내게 있어서 갑작스러웠다.

그러나 체릴은 당당했다.

“오늘 방문할 거라고 편지 보내 드렸잖아요. 안 보셨나요?”

“그……랬나요?”

“역시 안 봤군요.”

체릴은 볼을 살짝 부풀리며 퉁명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차원 이동 쇼크 때문에 체릴이 보내온 밀린 편지를 살펴볼 여유가 없었다.

이건 내가 잘못했네.

반성하도록 하자.

“죄송합니다. 이제 막 나울로 돌아온지라. 편지 내용을 살피지 못했네요.”

“지금까지 어디 있다 오셨는데요?”

“가하입니다.”

“가하요? 왕위 즉위식은 진작 끝났잖아요?”

“볼일이 있어서요. 그보다 파트너십 계약 체결 때문에 오신 거죠?”

“네, 맞아요.”

“그렇다면 장소를 옮기죠. 근처에 로그 상단의 본사가 있습니다. 라그너와 같이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죠.”

“그러는 게 좋겠어요.”

용병 본부보다 상단 본부에서 사업 이야기를 나누는 게 더 어울릴 거다.

로그 상단 본사를 쭉 훑어보던 체릴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소문대로네요.”

“어떤 소문입니까?”

“로그 상단이 요즘 돈을 쓸어 담고 있다는 소문이요. 건물만 봐도 알 거 같아요.”

기분 좋은 소문이긴 한데 그러면 다른 상단에게 견제를 많이 받을지도 모른다.

사실 그래도 상관없다.

내가 아는 소설 속 지식과 라그너의 사업 능력이 합쳐지면 다른 상단들 눈치를 보지 않아도 로그 상단 혼자서 충분히 성장할 수 있다.

체릴이 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라그너는 또다시 부리나케 뛰어왔다.

장소를 이동하면서 라그너는 나에게 작게 속삭였다.

“로인 님, 요즘 들어서 일을 너무 갑자기 만드시는 거 아닙니까? 체릴 양이 왔다는 소리 듣고 처음에는 상인들이 농담하는 줄 알았습니다.”

“나도 농담인 줄 알았어.”

결국 내가 편지를 못 본 게 원인이었다.

이미 대략적인 이야기는 서면으로 서로 다 주고받았다.

이제 얼굴 보면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협업해 나갈 것인지에 대한 것들만 합의를 보면 된다.

미팅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체릴의 쿨한 태도 덕분이었다.

나와 라그너가 ‘이건 이렇게 하겠습니다.’ 하고 말만 꺼내도 체릴은 바로 오케이를 했다.

라그너는 체릴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놀라움을 드러내며 말했다.

“저렇게 고분고분한 체릴 양은 처음 봅니다. 마치 꿈을 꾸는 거 같네요.”

체릴이 본업에선 엄청 깐깐한 여자라는 말을 적지 않게 들었다.

그러나 라그너가 감탄을 할 정도일 줄은 몰랐다.

어쨌든 체릴 덕분에 마지막 조항까지 전부 다 합의를 보고, 계약서에 도장까지 찍어 마무리를 지었다.

본사를 빠져나온 후에 체릴은 내게 물었다.

“로인 씨, 혹시 이다음에 약속 있나요?”

“있긴 합니다만.”

“바쁜 일 아니라면 근처에서 식사라도 같이 할까요? 여기 나울에 괜찮은 음식 가게가 많이 보이더라고요.”

“아, 죄송합니다. 굉장히 바쁜 일이라서…… 저 먼저 가 봐야 할 거 같습니다.”

“로, 로인 씨!”

나를 애타게 부르는 체릴.

그녀의 목소리에 아쉬움이 가득 묻어 나왔지만, 그래도 지금의 나는 한가로이 데이트나 즐기고 있을 때가 아니다.

3권 초반부에 등장하는 중요한 사건이 있다.

추종자와 연관된 사건이다.

나는 R팀 본부로 향했다.

“라비 있어?”

“라비 선배는 퇴근했는데요.”

로비를 지키고 있던 여직원이 대신 답해 줬다.

어쩔 수 없지.

퇴근한 사람을 다시 불러오라고 할 순 없으니까.

그리고 어려운 일도 아니다.

“파랑새 좀 불러 줘. 첸버에게 급하게 전할 편지가 있다고. 오늘 새벽이라도 좋으니까 빨리 와달라고 해.”

“알았어요.”

나는 그 사이에 첸버에게 보낼 편지를 작성했다.

자정이 거의 다 되어 가는 시각에 여직원이 내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대장님, 파랑새 씨 왔어요.”

“일찍 왔네.”

역시 우수한 배달부이자 소식통, 파랑새답다.

부르면 바로 오네.

나는 미리 써 둔 편지를 들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파랑새를 만나러 갔다.

파랑새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있었다.

“대장, 이 늦은 시간에 무슨 일로 나를 부른 거야? 사람 너무 막 굴리는 거 아니야?”

“그만큼 급한 일이어서 그래요. 이거, 첸버한테 전달해 주세요.”

“내용이 뭔데? 내가 알아도 되나?”

“네, 상관없어요. ‘페르칸’이라는 기사 양성소가 있는데, 거기와 친분이 있는 사람을 저한테 연결 좀 시켜 달라는 내용이 담긴 편지에요.”

“페르칸? 유명한 곳이잖아. 근데 거긴 왜?”

왜긴?

이유야 뻔하다.

“문제아가 하나 있을 텐데, 제가 직접 참교육 좀 시켜 주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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