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
읽어라! (4)
이 사람이 세올라인가?
대충 맞을 거란 예상은 했다.
“블루로즈단 R팀 대장인 로인이라고 합니다.”
“블루로즈단? 그게 뭔데요? 군인이세요?”
“용병입니다.”
“용병이 여긴 어쩐 일로 왔……. 설마 돈 받아 내려고 오신 건가요? 다, 다음 주까지 갚는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채무에 시달리고 있나?
그러고 보니 마일이 나한테 전달한 세올라의 정보에 ‘금전적인 문제에 시달리고 있음’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던 거 같긴 하다.
“오히려 돈을 주려고 온 사람입니다.”
“예? 사기꾼이세요?”
“그럴 리가요.”
“그런데 왜 처음 보는 사이에 느닷없이 돈을 주겠다고 하는 거예요? 저, 장기 안 팔아요! 제 몸에 칼 대는 거, 굉장히 싫어하는 사람이기도 하고요. 왜냐하면 아프잖아요.”
점점 내가 이상한 사람 취급 받는 기분이 들었다.
더 오해하기 전에 내가 이곳을 찾아온 목적을 바로 들려주기로 했다.
“물건을 팔아 주셨으면 해서요. 제가 아는 정보에 의하면, 세올라 씨가 윈슬라 커터를 가진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걸 저한테 파실 생각은 없습니까?”
벨라시오닉의 보물 중 하나인 윈슬라 커터.
내가 노리는 게 바로 이거다.
지금 상황이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도 든다.
돈이 궁한 상황이라면, 내 제안이 달콤하게 들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적게 드리지 않겠습니다. 돈은 달라는 대로 드리도록 하죠.”
가진 게 돈밖에 없는 남자가 바로 나, 로인이다.
큰 눈을 꿈뻑거리며 멍하니 나를 쳐다보는 세올라.
왜 이런 반응을 보이나 싶었다.
거금을 준다니까 믿기지가 않아서 그런가?
아니었다.
“윈슬라 커터라니요? 제가 그런 물건을 가지고 있어요?”
“…….”
마일 데려와.
지금 당장!
* * *
“확실합니다.”
마일은 나에게 이 말을 건넸다.
“정말로 저 아가씨가 윈슬라 커터를 가지고 있다고?”
“예.”
“세올라는 금시초문이라던데? 윈슬라 커터를 가지고 있다면 왜 본인이 그걸 모르는 거야? 평범한 물건도 아니고 자그마치 벨라시오닉의 보물인데.”
“그 보물을 세올라가 가져간 게 틀림없습니다. 이 집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죠.”
이해가 잘 안 된다.
아니, 보물을 가져갔는데 왜 기억을 못 해!
우리가 한참 말을 주고받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뒤에서 세올라가 가볍게 손뼉을 쳤다.
“아! 혹시…….”
“뭔데요?”
“거기에 있을지도 몰라요. 잠시만요.”
세올라는 그렇게 말하고서 2층으로 향했다.
나와 마일은 서로를 바라보다가 이내 나란히 세올라의 뒤를 따르기로 했다.
2층은 내가 아까 봤던 곳이다.
설마 저곳에 벨라시오닉의 보물이 있다고?
‘상상이 안 가네.’
아이템 중에서도 최고가로 분류되는 벨라시오닉의 보물이 이런 곳에 보관되어 있다는 게 기가 막힐 노릇이다.
그러나 잠시 후.
더 어이가 없는 일이 벌어졌다.
2층에 위치한 방의 문 하나를 연 세올라.
“여기 어딘가에 있을지도 몰라요.”
“…….”
“…….”
나와 마일은 순간 말을 잊었다.
골동품 가게처럼 아이템들이 너저분하게 처박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일은 쓴웃음을 지었다.
“여기에 있을 겁니다.”
하아…….
절로 한숨이 튀어나오네.
* * *
여기서 윈슬라 커터를 찾아내야 한다.
고물상도 아니고, 이 여자는 정리라는 걸 모르나?
아이템을 모아놓은 건 좋은데 분류라는 걸 좀 해 두고 모았으면 좋겠다.
마일은 일이 있다면서 먼저 가려고 했다.
그러나 내가 마일을 곱게 보낼 리 없지 않은가.
“너도 와서 찾아.”
“예? 방금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너도 찾으라고. 이건 공동 책임이잖아.”
“제 역할은 어디까지나 정보를 제공하는 것뿐입니다만.”
“주려면 정확한 정보를 줘야지. 그리고 또 모르잖아. 이 방에 윈슬라 커터가 없을지도. 그러면 넌 나에게 잘못된 정보를 제공한 거야. 현자가 그래도 돼?”
“……어쩔 수 없군요.”
결국 마일은 옷소매를 걷어 올렸다.
세올라에게 양해를 구한 후에 우리는 이 고철더미 속에서 윈슬라 커터를 찾아내는 수색 작전을 펼치기로 했다.
“세올라 씨! 도중에 윈슬라 커터를 어디다 뒀는지 떠오르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네, 알았어요.”
이 아이템도 아니고, 저 아이템도 아니다.
고물을 뒤척이던 도중에 마일은 내게 물었다.
“근데 로인 님은 윈슬라 커터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십니까?”
“그러는 넌?”
“저는 생김새는 대충 알고 있습니다만.”
“나도 그래.”
사실 모른다.
그러나 나는 눈앞에 있는 아이템이 윈슬라 커터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바로 아이템창이다.
인물 정보창처럼 아이템에 관한 정보도 반투명한 홀로그램 창처럼 뜬다.
이걸 보고 윈슬라 커터인지 아닌지를 구분 지을 수 있다.
윈슬라 커터는 작은 단검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다.
단검이 아닌 물건들은 바로 탈락이다.
뒤에서 마일의 볼멘소리가 들려왔다.
“현자가 고철더미를 뒤지고 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 웃음거리가 될 겁니다.”
“안 알려지면 되지. 걱정하지 마. 나, 입이 굉장히 무거운 사람이거든.”
“세올라라는 아가씨는요?”
“저 아가씨는 애초에 네가 현자라는 것도 모르는 눈치던데?”
“하긴, 저희의 존재는 극비 중에서도 극비니까요.”
대화를 이어 나가면서 우리 둘은 윈슬라 커터를 찾기 위한 기나긴 여정을 펼쳐 가고 있었다.
수색 작전에 돌입한지 근 1시간이 지났다.
방은 꽤 크다.
게다가 이 방을 가득 채울 정도로 아이템이 많다. 이러니 수색작전이 지체될 수밖에 없었다.
‘그냥 다 파괴해 버리고 싶네.’
벨라시오닉의 보물은 내구도가 높다.
다른 아이템에 비해 외부 충격을 좀 더 잘 버티는 물건이니까 다른 물건들을 파괴하는 식으로 찾아내면 어떨까?
이런 생각을 해 봤지만 금세 접었다.
‘내 물건도 아닌데 멋대로 파괴하면 안 되잖아.’
그리고 위와 같은 방법을 사용하면, 분명 용병단들 사이에서 또 ‘로인의 인격파탄자설’이 나돌 것이다.
간신히 이미지를 쇄신하고 있는 중인데 지금까지의 고생을 고작 이런 일 때문에 물거품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조금만 더 고생하자.
휴즈 밑에서 특훈한다고 생각하면 되겠지.
그렇게 1시간이 더 추가되었다.
마일은 GG를 선언하기 일보직전이었다.
나도 슬슬 의지가 바닥을 길 즈음이었다.
“이건……!”
내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손에 들려 있는 작은 단검의 정보를 예의 주시했다.
-윈슬라 커터
-등급 : 레전드
-물리공격력 : +350
-속도 : +250
벨라시오닉이 삼켰던 보물 중 하나. 상급 바람의 정령의 힘이 깃들어 있는 단검으로, 무기를 사용할 경우 공격 속도와 이동속도를 상승시켜 준다.
공속과 이속을 올려 주는 전설의 아이템, 윈슬라 커터.
드디어 찾았다!
“마일.”
나는 조용히 마일을 불렀다.
고개를 돌리는 마일에게 윈슬라 커터를 들어 보였다.
마일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찾으셨군요!”
“어, 이거 맞지?”
“예. 제가 알고 있는 것과 동일합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로인 님.”
“너도 수고했어. 급한 일 있다고 했지? 이제 가도 돼.”
“아, 예.”
급한 일은 개뿔.
고철더미 뒤지기 싫어서 지어낸 거짓말이라는 거 빤히 보인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짜잔! 사실 거짓말이었습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마일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세올라의 집 밖을 나섰다.
윈슬라 커터를 찾아냈다고 모든 일이 끝난 건 아니다.
게임은 이제부터다.
“세올라 씨.”
“……옛!”
꾸벅꾸벅 졸던 세올라는 내 부름에 화들짝 놀라며 깼다.
손님인 내가 이 고생을 할 동안, 정작 집주인이라는 사람은 태평하게 낮잠이나 자고 있다니.
억울해서 살겠나.
“이게 윈슬라 커터라는 겁니다. 혹시 기억나십니까?”
“아! 이거, 저번에 화염 폭풍이 한번 쓸고 지나갈 때 날아온 아이템이네요. 이제야 기억이 나요. 디자인이 멋있어 보여서 그냥 주워 왔는데. 그런데 이 아이템이 그렇게 대단한 건가요?”
가만있어 보자.
세올라는 이 아이템이 벨라시오닉의 보물이라는 걸 모르는 거 같은데.
“네, 중요하죠.”
“그……래요?”
들린다, 들려.
세올라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는 소리가 들린다고.
더 머리 굴리기 전에 나는 선수를 치기로 했다.
“이거, 저에게 팔 수 있습니까?”
“……얼마에 팔라고 했죠?”
가격을 후려칠까 하는 생각도 해 봤다.
‘그냥 양심적으로 행동하자.’
돈에 허우적거리는 그녀에게 차마 헐값에 벨라시오닉의 보물을 가져오고 싶진 않았다.
“달라는 대로 주겠다고 했습니다.”
“비싸게 불러도 괜찮아요?”
“예, 물론이죠.”
나는 양심에 따라 가격을 제대로 측정했다.
벨라시오닉의 보물이 지닌 가치는 ‘부르는 게 값’이다.
그래서 나는 세올라에게 원하는 금액을 말해 보라고 했다.
“진짜죠? 터무니없는 금액을 불러도 불만 없기에요?”
“네, 말씀해 보세요.”
억 단위라도 부르려고 그러는 걸까 싶었다.
그러나 세올라가 요구한 금액은 다른 의미로 터무니가 없었다.
“5백만 제피 주세요.”
“……예?”
“왜요. 너무 비싸요? 그러면 특별히 4백만까지 깎아 줄게요.”
대한민국 돈으로 5백만 원도 되지 않는 값을 부른 셈이다.
진짜 터무니없긴 하네.
너무 싸게 불러서 어이가 없다.
“그거 가지고 돼요?”
“5백만 제피를 얕보는 거예요? 그거만 있으면 한 달 내내 고기반찬을 먹을 수 있다고요!”
세올라가 얼마나 궁핍한 삶을 살아왔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나는 피식 웃었다.
세올라를 비웃은 게 아니다.
그냥 그녀가 너무 순수해 보여서 웃음이 나온 거다.
“5억 제피 드릴게요.”
“네? 5억이요?”
“네 그 정도면 될 겁니다.”
다시 한번 큰 눈망울을 깜빡거리는 세올라.
저렇게 쳐다보는 거, 왜 이리도 귀여울까.
정말로 30대가 맞나 싶었다.
“역시 당신, 사기꾼이죠? 어떻게 저딴 물건에 5억을 준다고 해요?”
“저딴 물건이 아니라 저거, 벨라시오닉의 보물이에요.”
“그게 뭔데요?”
애초에 벨라시오닉의 보물이라는 개념 자체를 모르는 여자였군.
그래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거였다.
일일이 다 설명해 주기는 귀찮다.
“그냥 비싼 물건이라고만 알고 있으면 돼요. 아무튼 5억 제피로 퉁 치는 겁니다? 알았죠?”
돈 준다는데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나.
결국 세올라는 내 딜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 * *
윈슬라 커터를 받아든 나는 집을 나서기 전에 세올라가 있던 지하로 시선을 돌렸다.
“근데 밑에서 뭘 하고 있었던 겁니까?”
“발명을 하고 있었어요.”
“무엇을요?”
“여러가지요.”
마일에게 듣던 그대로군.
그냥 느낌 가는 거 있으면 아무거나 몰두한다고 하던데 정말인가 보다.
“요즘 푹 빠져 있는 건 뭡니까?”
“왜요, 관심 있어요? 제 연구에 투자라도 하시게요?”
“그거야 뭐…… 지금 당장은 결정 못 하죠.”
윈슬라 커터를 살 돈은 있지만, 괴짜 마법사에게 투자할 돈은 없다.
차라리 그 돈으로 다른 투자처를 알아보는 게 더 득이 되겠다.
세올라는 당당하게 어깨를 펴 보였다.
“이번에는 야심작이에요. 들어 보세요.”
크게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보나마나 별거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잠시 후 내가 잘못 생각했음을 깨닫게 되었다.
“차원 이동 연구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