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
읽어라! (3)
리오나의 푸른 드레스와 상반되게 체릴은 붉은 드레스 차림으로 내 앞에 마주섰다.
“역시, 로인 씨라면 이곳에 오실 줄 알았어요.”
“어떻게 그걸…… 아닙니다. 충분히 알 수 있었겠군요.”
안 봐도 뻔하다.
그녀는 베르투의 회원이다.
‘미쉘이 알려 줬겠지.’
베르투에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왜 나에 관한 일로 사용하는지 이해가 잘 안 간다.
이것이 사랑에 과하게 빠진 여자의 무서움인가?
여자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다.
나를 향해 연신 밝은 미소를 보여 주던 체릴.
그녀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옆에 있는 녀…… 아니, 여자는 누구인가요?”
이봐, 당신, 방금 사용하면 안 될 단어를 내뱉으려던 거 같은데?
다행스럽게도 리오나는 체릴이 하려던 말을 못 들은 모양인가 보다.
“블루로즈단 B팀 대장, 리오나입니다.”
“리오나라면, 그 ‘붉은 귀신’이라 불리는 라크스 공작님의 첫째 따님이죠?”
“네, 일단은요. 그쪽은 누구시죠?”
“반가워요. 로엘 대표, 체릴이라고 해요.”
“로엘이라면 설마, 그 의류 브랜드 말씀하시는 건가요?”
“맞아요. 제 회사에요.”
“영광이에요! 사실 이 드레스도 로엘 제품이거든요.”
“보자마자 바로 알아차렸어요. 저희 제품을 이용해 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호호.”
서로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거 같은데…… 뭐라고 해야 되나. 보이지 않는 스파크가 ‘파지직, 파지직’ 하고 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체릴은 리오나에게 왜 적대감을 드러내는지 잘 안다.
보나마나 뻔하다.
‘질투겠지.’
내 근처에 리오나 같은 여인이 있으니 본능적으로 싫어할 것이다.
근데 리오나는 왜?
‘모르겠네.’
여자라는 생물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계속 오고갈 무렵, 구세주가 등장했다.
개인 용무를 마치고 돌아온 첸버가 우리를 찾아왔다.
“로인, 리오나. 슬슬 이동하…… 응? 이 분은?”
“체릴 씨라고, 로엘의 대표를 맡고 있는 분입니다.”
내가 나서서 체릴을 소개해 줬다.
체릴은 180도 달라진 환한 미소를 지으며 첸버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체릴이에요.”
“아, 네. 반갑습니다. 근데 혹시 중요한 이야기 나누고 있던 건 아닌지.”
“아니에요. 그냥 인사만 나누고 있었어요.”
“그래요? 죄송합니다, 체릴 씨. 로인하고 잠깐 볼 일이 있어서요. 먼저 자리를 떠나야 할 거 같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아, 로인 씨!”
걸음을 옮기기 전에 체릴이 내게 바짝 다가왔다.
“저희와 파트너십 계약을 체결하기로 했잖아요? 조만간 제가 로그 상단 본사로 찾아갈게요. 그때 더 깊은 이야기 나눠 봐요.”
“예, 그러죠.”
“후후, 그럼 기대할게요.”
도대체 뭘 기대한다는 건지 모르겠다.
체릴과의 아찔한(?) 시간을 보낸 뒤에 나는 첸버와 리오나가 있는 쪽으로 합류했다.
리오나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 여자, 왠지 마음에 안 들어.”
“왜?”
“나도 모르겠어.”
이쪽도 본능인가?
여자들의 세계는 무섭다.
* * *
제나드는 왜 같이 안 왔냐고 첸버에게 물었다.
대답은 간단했다.
“사람들이 많은 곳은 싫어해서. 걱정하지 마. 먼저 가 있겠다고 했으니까.”
‘어디를?’이라고 물어보기도 전에 답이 드러났다.
우리가 향한 곳은 왕궁 응접실이었다.
6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를 맞이했다.
“오! 첸버! 와 줘서 고맙네!”
“그간 잘 지내셨죠? 바아트 님.”
“잘 지냈다마다! 자네들이 와 줘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군. 하하하!”
굉장히 호쾌한 성격을 지닌 국왕 폐하였다.
상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르네.
그래도 인상이 좋아 보였다.
제나드는 우리보다 한발 먼저 앞서서 응접실에 도착한 상태였다.
응접실에는 우리를 포함해 바아트밖에 없었다.
보통은 외부에서 온 손님을 맞이할 때, 불상사가 벌어질 것을 대비해 근처에 친위대를 대기시켜 두 거나 할 텐데.
하나 응접실에는 그런 자들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블루로즈단이 바아트에게 많은 신뢰를 얻고 있다는 뜻이겠지.’
하기야, 목숨을 구해 준 생명의 은인들인데 신뢰를 안 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서로의 근황을 묻는 소재가 토크의 주를 이뤘다.
여기서도 제나드는 말을 길게 하지 않았다.
나와 리오나는 주로 이야기를 듣는 역할을 맡았다.
목소리 자체는 나온다.
바아트의 인물 등급은 엑스트라였다.
그러나 나는 딱히 바아트와 큰 접점이 없었기에 말을 하는 쪽보다 듣는 쪽이 더 편했다.
한 10분 정도 이야기를 주고받았을 때였을까?
응접실의 문이 열렸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폐하.”
마하무인가?
이 남자 역시 엑스트라 등급이었다.
‘가하는 델리피나 전기에서 큰 활약을 보여 주지 못하는 나라인가 보네.’
그렇지 않고선 현 국왕과 차기 국왕의 등급이 엑스트라일 리 없을 터.
가하 쪽에는 비중을 크게 두지 않아도 괜찮을 듯했다.
마하무와 잠시 이야기를 나눠 봤는데, 사람 됨됨이는 괜찮아 보인다.
역시 들은 그대로 좋은 국왕이 될 것 같다.
도중에 병사가 와 바아트에게 귓속말을 전했다.
“슬슬 시간인가 보군.”
왕위 즉위식을 가리키는 거였다.
“조금 있다가 보도록 하지.”
“예, 바아트 님.”
우리는 응접실을 나왔다.
불꽃 참관을 하기 위해 장소를 이동했다.
도중에 제나드는 마스크를 다시 착용했다.
“꼭 가야 하나?”
“예, 반드시 가야 합니다. 단장, 여기 오기 전에 저와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이번에는 꼭 참석하기로.”
“……알았어요.”
결국 제나드는 마지못해 우리와 함께 행사장으로 향했다.
대인기피증이라……. 많이 불편하겠군.
* * *
즉위식이 열리는 동안, 제나드와 첸버는 사방을 끊임없이 경계했다.
나는 그들이 왜 이렇게 신경을 날카롭게 세우고 있는지 안다.
반대 세력이 또다시 암살자를 보내진 않았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그 탓에 나도 절로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우리 로그 상단과 좋은 연을 이어 갈지도 모르는 중요한 인물들이다.
쉽게 암살당하게 둘 수는 없었다.
게다가 요즘은 추종자들이 사방에서 날뛰고 있어서 그런지 더욱 신경을 써야 했다.
‘이럴 때 내가 3, 4, 5권 줄거리를 알고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이곳에 암살 사건이 벌어지는지, 안 벌어지는지 미리 알 수 있지 않겠나.
‘다시 델리피나 전기를 접할 수 있는 방법이 어디 없을까?’
소설 속 내용을 모르니 답답하기 그지없다.
아돈 전투 이후부터 나의 이 불만은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나중에 방법을 강구해 봐야겠다.
우리의 걱정과 달리, 왕위 즉위식은 아무런 사건 사고 없이 무사히 끝났다.
뒤풀이 현장은 나와 리오나, 첸버만 참가했다.
제나드는 더 이상 사람들이 많은 장소에 있기 싫다며 빠르게 이곳을 이탈했다.
웨일과 체릴도 즉위식이 끝난 이후에 바로 가하를 떠났다.
바쁜 사람들이니 어쩔 수 없겠지.
나도 적당히 마시다가 첸버, 리오나와 같이 떠날 생각이었다.
그러나 계획에 변동이 생겼다.
흰색 가면을 쓴 남자가 내게 접근해 왔다.
“안녕하세요, 로인 님.”
“마일이잖아? 네가 여긴 무슨 일이야?”
마일이 갑자기 왕위 즉위식 현장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잠시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습니까?”
이야기는 현자의 방에서 나누기로 했다.
어지간히 급한 소식인가 보다.
“문제라도 생겼어?”
“아니요. 벨라시오닉의 보물에 관련된 소식이 있어서 그걸 바로 알려 드리고자 이렇게 로인 님을 직접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요즘 베르투의 타율이 좋네. 3연속으로 벨라시오닉의 보물이 어디 있는지 알아내고.
근데 카인은 왜 못 찾는지 모르겠다.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겠지, 뭐.
“어디 있는데?”
“마침 가하에 있습니다. 그래서 찾아온 겁니다.”
“가하? 이 나라에?”
“예, 가하에 거주하는 괴짜 마법사가 있습니다. 이름은 세올라. 나이는 35세. 연애 경험은 한번도 없더군요.”
“굳이 연애 경험까지 듣고 싶진 않고. 괴짜 마법사라는 게 무슨 뜻이야?”
갑자기 불안감이 몰려왔다.
항상 이놈의 마법사들이 문제다.
코드 002 사건도 그렇고, 렉스 연구소 사건도 그렇고…….
마법사들이 난리를 피우는 바람에 내가 뒷수습을 하느라 여기저기 뛰어다녔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마법사라니.
게다가 괴짜라는 수식어가 붙으니까 불안감은 더욱더 커져 갔다.
“주변 사람들에겐 괴짜라고 불리더군요. 괴상한 실험을 하고 있어서 그런 별칭이 붙은 거 같습니다.”
“무슨 실험인데 그래?”
“딱히 또렷하게 정해진 건 없는 거 같습니다. 그냥 느낌 가는 대로 아무 실험이나 막 하더군요.”
괴짜라는 말이 붙은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다.
“그래서 그 세올라라는 마법사가 벨라시오닉의 보물을 가지고 있다, 이 말이지?”
“예, 그렇습니다.”
기왕 가하에 왔으니, 벨라시오닉의 보물 하나 얻고 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나는 첸버와 리오나를 먼저 떠나보냈다.
갑자기 가하에 볼일이 생겼다는 식으로 대충 둘러댔다.
첸버는 무슨 일인지, 혹시 블루로즈단과 연관이 있는 일인 건지 나에게 물었지만 대답해 줄 수는 없었다.
마일에게 받은 주소를 따라 이동했다.
다행이도 세올라가 사는 곳은 가하의 왕궁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여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은 허름한 집 한 채.
이곳에 중급 마법사, 세올라가 산다고 한다.
……아마도.
‘얼마나 괴짜인지 모르겠네.’
일단 예의상 노크를 했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폐가 아니야?”
이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아무리 봐도 사람이 살 만한 집으로 보이진 않는다.
다시 한번 노크를 했지만, 이번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몇 차례 문을 더 두드렸다.
그러나 도중에 참사가 발생했다.
우지끈!
갑자기 나무로 만들어진 문이 부숴졌다.
“오메.”
분명 살살 두드렸는데, 왜 그러냐.
근데 문이 박살났는데도 여전히 무반응이다.
점점 의심이 커져 갔다.
‘그냥 들어가 볼까?’
혹시 몰라서 들어갈 때 ‘실례합니다.’라고 말을 미리 해 뒀다.
이로써 나는 몰래 들어간 게 아니게 된 거다.
이렇게 스스로 합리화를 시켰다.
집 주인에게는 이런 핑계가 안 통하겠지만 말이다.
“…….”
주변을 살폈다.
마치 폐가 체험을 하는 것 같다.
그래도 사람이 사는 흔적이 군데군데 보이긴 했다. 아주 희미하긴 했지만 말이다.
방문을 열었다.
아무도 없다.
거실 쪽으로 갔다.
아무도 없다.
2층으로 향했다.
아무도 없다.
“속은 거 같은데……?”
이번에도 거짓 정보 아니야?
수첩으로 마일을 호출하려고 했다.
그때 아래에서 낯선 소리가 들렸다.
콰앙! 하는 폭발음이 들린 거 같은데.
나는 다시 1층으로 내려갔다.
밑바닥에서 검은 연기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지하실로 향하는 문이 숨겨져 있었다.
문을 열자 매캐한 연기가 풍겨 나왔다.
연기 속에서 한 여인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녀는 콜록거리면서 거친 기침을 토해 냈다.
“혹시 세올라 씨 맞습니까?”
설마 하는 심정으로 물었다. 그러자 여인은 그제야 나를 발견했다.
“콜록, 맞는데요? 근데 누구세요?”
괴짜 마법사다운 첫 인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