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
읽어라! (2)
뜬금없이 왕위 즉위식에 참석해 달라고 요청이 들어와서 뭔가 평범한 건 아닐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설마 단장까지 직접 참여할 줄은 몰랐다.
‘뭔가 사연이 있나?’
내심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묻기에는 좀 그렇다.
나중에 첸버에게 따로 물어보든가 해야지.
첸버라면 분명 알고 있을 거다.
그리고 특별히 문제될 게 아니라면 나에게 말해 줄 가능성도 있다.
왜냐하면 친밀도가 최대치니까.
‘역시, 등장인물들과 친밀도를 높여 두면 이런 부분은 편하다니까.’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첸버는 우리들에게 말했다.
“마차를 준비시켜 뒀으니 나중에 타고 가도록 하지.”
“마차요? 그냥 말 타고 가는 게 아닙니까?”
나도 모르게 질문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
그냥 개개인이 말을 타고 이동하는 것이 당연시되다 보니 마차는 생각도 못했다.
“그래도 귀족들이 모이는 자리인데 격식은 갖춰야지.”
흠, 설득력이 있네.
하긴, 아무리 소국이라 해도 왕위 즉위식인데 자리에 맞게 격식은 갖춰야 하지 않겠나.
S팀에는 단장 제나드와 첸버. 이렇게 둘만 참가하기로 했다.
이로써 왕위 즉위식에 참가하는 건 총 네 명이다.
마차는 둘째 치고.
“의상은 어떻게 합니까?”
“턱시도 챙겨 오지 않았나?”
“네, 일단은요.”
“그럼 그거 입으면 되네.”
“지금 갈아입습니까?”
“아무래도 그러는 게 좋겠지? 곧 출발해야 하니까.”
왕위 즉위식은 오후 4시로 예정되어 있다.
두리아에서 가하 왕궁까지 이동하는데 2시간 정도 소요된다고 한다.
지금 시간이 오전 9시니까…… 빨리 출발하긴 하네.
그래도 미리 가서 얼굴을 익혀 두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나와 리오나는 숙소로 들어가 의상을 갈아입고 나왔다.
나는 검은색과 흰색이 적절하게 배합되어 있는 턱시도를, 리오나는 자주색의 드레스를 차려 입었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해 보인다.
내가 지적하기도 전에 리오나는 혼잣말을 흘렸다.
“레미에게 빌려온 드레스라 그런지 꽉 끼네.”
어느 부분이 꽉 끼는지 굳이 말 안 해도 알 것 같다.
바스트 부분이었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는 게 좋겠다.
크흠!
첸버와 제나드도 양복으로 갈아입었다.
우리 넷은 나란히 마차에 올랐다.
제나드는 정장 차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검은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다.
첸버는 그런 제나드에게 일침을 가했다.
“단장, 즉위식에서는 마스크 벗어야 합니다.”
“……알고 있어요.”
퉁명스럽게 답하는 제나드.
예전에 첸버에게 잠깐 들은 바에 의하면, 제나드는 대인기피증을 최소화하기 위해 일부러 마스크를 끼고 다닌다고 했다.
마스크와 대인기피증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본인이 저것으로 심적 안정을 취할 수 있다면 그만이겠지.
마차는 빠른 속도로 달려갔다.
2시간 동안 할 일 없이 마차를 타고 있으니 좀이 쑤셔 죽을 맛이다.
이럴 때 필요한 건 뭐?
‘대화지.’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요.”
“뭔가?”
“저는 그냥 뭣도 모르고 왕위 즉위식 참가하라고 해서 오긴 했는데. 저희가 왜 거기에 참가해야 하는지 이유 좀 알 수 있나요? 분위기를 보아하니 저만 모르는 거 같아서요.”
리오나는 딱히 의구심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간의 사정을 알고 있다는 낌새였다.
“아, 미안하군. 미리 말을 해 줬어야 했는데 내가 정신이 없어서 그만 깜빡했나 봐.”
먼저 나에게 사과의 말을 건네는 첸버였다.
“초기 블루로즈단은 볼품이 없는 용병단이었지. 인지도뿐만 아니라 우수한 용병들도, 돈도, 가진 것도 아무것도 없었어.”
누구에게나 다 어려운 시기는 있는 법이다.
지금은 엘리트 용병 조직이라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블루로즈단이지만, 초기에는 이런 어려운 시절이 있었나 보다.
나는 처음 듣는 거지만.
“초기 시절 때 우리를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고 도와준 사람이 있네. 그분이 바로 바아트. 지금 우리가 향하는 가하의 현 국왕이네.”
“국왕 폐하로부터 지원을 받다니, 어마어마한 인맥이네요.”
“나보다 단장과 더 친할 거야. 그렇죠? 단장.”
“…….”
제나드는 대답 대신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대화 자체에 별고 큰 관심을 쏟지 않고 있었다.
마치 친밀도가 부족해서 말을 못하는 나를 보는 것 같다.
나도 한때는 저랬지.
아, 지금의 나는 제나드와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내가 공적을 많이 세운 탓에 제나드가 나에게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되어서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친밀도까지 자동으로 올라갔다.
하나 말을 할 수 있다 해도 제나드로부터 대답을 듣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첸버의 말에도 저렇게 무신경하게 반응하는데, 내가 말을 걸면 어떤 반응이 나올지 뻔했다.
첸버는 계속 대화를 이어 나갔다.
“아무튼 이런 이유로 본의 아니게 가하와 연을 맺게 되었지.”
“단장은 어쩌다가 가하 국왕과 알게 된 겁니까?”
나는 일부러 두 번째 질문을 던졌다.
대화가 끊어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였다.
그렇게 되면 또다시 어색한 침묵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
그럴 바에야 의미 없는 대화라도 계속 나누는 게 훨씬 좋겠지.
첸버는 제나드를 바라봤다.
“말해 줘도 되겠죠?”
“상관없어요. 국가 기밀도 아니고.”
시큰둥한 반응이다.
재미없는 사람이네.
뭐, 단장이 반드시 재미있어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허락을 받은 첸버는 지난날을 회상하기 시작했다.
“가하의 현재 왕, 그러니까 오늘 왕위를 물려주는 바아트 국왕을 없애려고 반대 세력에서 암살자를 보낸 적이 있었거든. 그때 바아트 국왕을 구해 준 게 우리 블루로즈단이었어.”
“바아트 국왕은 블루로즈단에게 엄청난 빚을 진 셈이네요.”
그 정도면 블루로즈단을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게 인연이 되어 지금까지 계속 교류하고 있는 거고. 오늘처럼 보디가드 의뢰가 아니라 참관을 목적으로 초대를 받기도 하지. 원래 단장하고 나, 둘만 가려고 했는데. 그래도 B팀, R팀 대장도 같이 데려가 인사라도 시켜 주는 게 좋다고 생각해서 데려가는 거야. 소국이긴 하지만 그래도 한 나라의 국왕이니까 알아 두면 좋겠거니 하는 의도도 있고.”
역시 첸버, 생각이 깊은 남자다.
가하의 국왕과 친분을 다져두면 용병 일은 둘째 치고 상단을 운영하고 있는 내게 많은 도움이 될 거다. 무역이라는 측면이 있으니 말이다.
그밖에 첸버는 블루로즈단 초기 때의 썰을 풀면서 내 귀를 지루하지 않게 만들어 주었다.
여기서 깨달은 점이 하나 있었다.
‘첸버도 드레인 못지않게 투 머치 토커 기질이 있군.’
그래도 드레인에 비하면 양호한 편이다.
* * *
마차에 몸을 실은 지 1시간 50분이 흘렀다.
도착 예정 시간보다 10분 일찍 도착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가하의 새 왕을 보기 위해 궁전 안을 가득 채웠다.
궁전은 그렇게 크진 않았다.
소국이라서 그렇다기보다는 바아트 국왕의 평소 생활 습관 때문이었다.
그는 한 나라의 국왕임에도 불구하고 검소함에 몸에 베여 있는 남자라고 했다.
쓸데없는 경비는 낭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전부 다 국민의 세금이니까.
‘이 나라는 훌륭한 국왕을 뒀네.’
우리나라도 이렇게 뛰어난 지도자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심 이런 생각이 들었다.
바아트의 뒤를 이어 왕위에 등극하게 된 6대 국왕, 마하무도 아버지인 바아트와 닮았다고 한다.
왕궁을 대충 둘러보며 혹시 아는 얼굴이 있나 찾아봤다.
몇몇이 보였다.
그중 한 명이 대상인 웨일이었다.
“안녕하세요, 웨일 님!”
“어? 자네가 여긴 웬 일인가? 로그 상단이 가하국과 교역을 맺었나? 내 기억으로는 아닌 걸로 아는데.”
“오늘은 블루로즈단으로 참가했습니다. 단장이 바아트 국왕과 인연이 있다고 해서요.”
“아하, 그렇군.”
제나드와 첸버는 잠시 자리를 비운 상황이었다.
나는 리오나와 함께 행동하는 중이었다.
웨일은 내 옆에 나란히 선 여인을 바라봤다.
“어디 보자. 옆은…… 리오나인가? 오랜만에 보는군.”
“안녕하세요, 웨일 님.”
“예전에 봤을 때에는 작은 꼬맹이 아가씨였는데. 이제는 어엿한 숙녀가 다 되었구나. 허허, 시집보내도 되겠어.”
리오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웨일이 리오나를 아는 이유는 라크스 공작 때문이었다.
라크스 공작과 웨일은 친분이 두터운 사이다.
라스라는 등장인물이 있기 전부터 두 사람은 예전부터 자주 만남의 자리를 가져 왔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까 저번에 드레인이라고 했나? 그 친구가 자네하고 리오나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하던데. 정말인가?”
“아니요. 그 선배가 이상한 망상증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겁니다. 신경 안 쓰셔도 돼요.”
하여튼 그놈의 투 머치 토커 선배도 참…….
이상한 말을 자꾸 여기저기 퍼트리고 다니네.
웨일은 작게 웃었다.
“그나저나 리오나가 여기에 있다는 건 라크스, 그 친구도 왔다는 뜻인가?”
“아니에요. 저도 로인처럼 블루로즈단 자격으로 여기에 온 거예요.”
“하긴, 라크스는 가하와 친분이 있진 않으니까. 그리고 얼마 전에 펼친 아돈 전투로 인해서 많이 피곤할 테고. 하여튼 그 친구도 바빠. 이제는 나이를 생각해야 할 때인데……. 그래도 안심이 되겠어, 리오나 너하고 레미, 이렇게 든든한 두 딸이 있으니까.”
라크스 공작의 무력은 리오나가, 지력은 레미가.
두 딸이 있으면 라크스 공작은 무서울 게 없을 거다.
하지만 문제는 리오나의 현재 입장이었다.
“과찬이에요. 저는 아직 아버지…… 아니, 라크스 공작님을 따라가려면 멀었어요.”
아버지라는 칭호 대신에 라크스 공작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리오나.
웨일은 그런 리오나의 모습에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라크스 가문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나 보구나.”
“……예.”
“그래, 남의 가문 문제라서 내가 왈가왈부할 입장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가급적이면 고집을 꺾는 게 좋을 거야. 부모님 살아 계실 때 잘해 드려야지. 내가 이런 말을 안 해도 네가 잘 알 거라 믿으마.”
리오나는 대답 대신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이미 그녀는 어머니를 잃은 아픔을 가지고 있다.
아마 웨일은 그것까지 알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일부러 더 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가정사라는 게 다 그렇지, 뭐…….
웨일과 대화를 원하는 사람들이 속속들이 몰려왔다.
우리는 눈치껏 웨일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고 자리를 피해 주기로 했다.
나는 둘째 치고 리오나를 알아보는 귀족들은 적지 않았다.
“저 아가씨, 혹시…….”
“맞네. 라크스 공작님의 첫째 따님.”
“그 붉은 귀신?”
“어머, 예뻐라! 꼭 인형 같아!”
“저 정도면 남자들한테 인기 엄청 많겠네.”
“남자들뿐이겠어? 여자들도 좋아할 만큼 예쁜데?”
남녀노소 리오나에게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녀는 왕위 즉위식에서 가장 눈에 띄는 아름다운 한 송이의 꽃과 같았다.
그야말로 블루로즈단의 장미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즉위식 현장에는 또 한 송이의 꽃이 존재했다.
그 꽃은 나보다 리오나를 먼저 알아보는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
“로인 씨!”
나에게 먼저 아는 척을 했다.
익숙한 목소리.
그리고 지금은 별로 알아채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들렸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체릴.
그녀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