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
생명의 불씨, 글레드
나는 혼자서 렉스 연구소로 향했다.
용병들은 몸도 안 좋은데 어딜 그렇게 돌아다니느냐고 나를 말리려 했다.
걱정해 주는 건 좋은데 지나치면 오히려 귀찮아진다.
지금이 딱 그런 경우였다.
그리고 몸이 안 좋은 것도 아니다.
오히려 팔팔하다.
‘용신단의 능력을 확 공개할 수도 없고.’
한숨을 삼키며 바로 렉스 연구소를 향해 달렸다.
렉스 연구소에 도착하자마자 테일이 나를 반겼다.
“일찍 왔군.”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왔습니다.”
“듣자하니 아돈 전투에 참가했다며?”
“네? 그걸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혹시 레이샤르가 말해 준 건가?
레이샤르는 내가 이어크 협곡에 매복해 있는 추종자들을 없애러 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레이샤르에겐 분명 비밀로 해 달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레이샤르는 입이 가벼운 드래곤이 아니다.
비밀로 해 달라고 하면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해 주지 않는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안 걸까?
테일은 내게 해답을 들려줬다.
“라크스 공작님이 이야기해 주시던데? 너, 거기에 있었다며.”
카이딘이 말한 건가?
하긴, 생각해 보니 나는 아돈을 벗어나기 전에 카이딘에게 내 존재를 들켰다.
치료받고 가라고 했는데 나는 그 말을 무시하고 아돈을 빠져나왔다.
카이딘이라면 라크스 공작에게 충분히 말하고도 남는다.
“안 그래도 라크스 공작님이 여기에 와 계시거든.”
이건 예상하지 못했는데…….
아돈에서 바로 이쪽으로 온 건가?
라크스 공작도 라스 못지않게 칠흑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칠흑의 조각의 약점을 발견했다는 속보를 듣고서 가만히 있을 순 없었을 것이다.
“안에 계실 거야. 만나기 불편하다면 나한테 말해. 내가 따로 자리를 마련할게.”
“그런 건 아니에요. 연구소로 바로 가죠.”
라크스 공작이 불편한 건 아니다.
그냥…… 뭐랄까, 나만 보면 자꾸 리오나랑 엮으려고 해서 그게 좀 부담스러울 뿐이다.
* * *
1급 출입 자격이 없으면 들어오지 못하는 기밀 장소까지 들어오게 된 나와 테일.
원래 나는 이곳에 못 들어온다.
테일 덕분에 여기까지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도착한 곳에는 라크스 공작이 서 있었다.
“음? 자네가 여긴 어쩐 일인가?”
“제가 불렀습니다.”
테일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사이에 나는 라크스 공작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입니다, 공작님.”
“오랜만이 아닐 텐데? 듣자하니 아돈 전투에서 자네를 봤다는 자가 있던데, 사실인가?”
“예, 사실입니다.”
“왜 그곳에 있었지?”
물어볼 줄 알았다.
이럴 것을 대비해 나는 미리 시나리오를 짜 왔다.
“이어크 협곡에서 혼자 수련을 하고 있었습니다. 권왕 휴즈의 가르침 중 하나가 ‘수련을 할 때에는 혼자가 좋다.’라는 것이어서 혼자만의 장소를 찾다가 이어크 협곡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추종자들이 몰려오더군요. 제가 아돈 전투에 엮이게 된 건 그 시점부터였습니다.”
“그러면 그 많은 추종자들을 없앤 게 자네다, 이 말인가?”
“예, 그렇습니다.”
만약 다른 사람이었더라면 거짓말이라는 의심을 받았을 것이다.
그나마 나였기에 설득력이 있었다.
“하긴, 자네 정도의 실력자라면, 추종자들을 다 때려눕히고도 남았을 테지.”
라스크 공작은 내 강함을 인정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안다.
나는 계속해서 내가 짜낸 시나리오를 털어놓았다.
“이어크 협곡을 정리하고 나니 아돈 쪽에서 큰 소음이 들리더군요. 라스 일행이 추종자들과 싸움을 벌이는 모습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저도 전투에 가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사연이 있을 줄이야……. 몰랐군.”
내가 비록 작가는 아니지만, 누구보다도 판타지 소설을 많이 본 편집자 아닌가?
이 정도 이야기는 어렵지 않게 꾸며낼 수 있다.
마침 잘 먹혀 들어간 것 같다.
“그래도 말도 없이 사라지는 건 너무하군. 그 자리에 있었다면, 하다못해 나를 보러 오기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섭섭하군.”
“죄송합니다, 공작님. 나울에 급한 일이 생겨서 그 일을 처리하느라 본의 아니게 서두르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뭐, 자네를 탓하려는 건 아니고. 그냥 내가 좀 섭섭해서 주저리주저리 떠든 것뿐이니까 너무 담아두지 말게.”
“알겠습니다.”
우리는 이런 작은 것에 신경을 쓸 시간이 없다.
눈앞에 더 큰 일이 벌어지고 있다.
검은 연기에 감싸인 칠흑의 조각, 그리고 맞은편에 못 보던 게 있었다.
“저건 뭡니까?”
나는 손으로 반대편 실험관에 담겨 있는 것을 가리켰다.
불꽃이었다.
다만 평범한 불꽃은 아니었다.
일반적인 불은 붉은 색이지 않은가?
하나 실험관 안에 보관되어 있는 불은 흰색이었다.
테일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화이트 플레임, 흰색 불꽃, 영혼의 불 등. 불리는 별칭이 상당히 많지. 하지만 우리 마법사들 사이에서는 이렇게 부르고 있어.”
흰 불꽃의 정체, 그것은 앞으로 중요한 떡밥이 될 요소일 거라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생명의 불씨, 글레드.”
* * *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글레드’라는 불씨를 처음 접했다.
1, 2권에는 나오지 않았다.
아니,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짧게 한 줄이라도 묘사되어 있다면 바로는 아니지만 기억을 더듬어서라도 상기를 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내 기억에 전혀 없다.
글레드라는 단어조차 생소했다.
‘혹시 3권 이후부터는 계속 등장하는 건가?’
그럴 가능성이 크다.
테일은 글레드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것이 칠흑의 조각과 숙주를 떼어 놓은 원인이야.”
흘려들을 수 없는 중요한 내용이다.
“일단 한번 보여 줄게.”
테일은 연구원에게 신호를 보냈다.
연구원은 실험관을 조정하여 두 실험관을 연결시켰다.
칠흑의 조각에서 풍겨 나오는 검은 연기는 다른 실험관 쪽에도 손을 뻗혔다.
그러나.
“……!”
이후에 벌어진 상황에 나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생명의 불씨, 글레드가 있는 실험관으로 뻗어오던 검은 연기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칠흑의 조각은 글레드가 있음을 눈치챈 모양인지 어떻게든 글레드와 멀어지기 위해 스스로 움직였다.
테일은 내게 소감을 물었다.
“어때?”
“굉장하군요.”
이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이것만 있으면 정말로 숙주와 칠흑의 조각을 떼어 놓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알파를 연구원한테서 떼어 놓을 때에도 글레드를 사용했어. 그래서 칠흑의 조각만 이렇게 실험관 안에 넣어 놓을 수 있게 된 거지.”
“저 칠흑의 조각이 그때 그 알파입니까?”
“맞아.”
보면 볼수록 신기했다.
칠흑에게 약점이라는 게 존재하긴 하는구나.
그러면 이미 게임 끝 아닌가?
“저것만 있으면 검은 괴물들을 무기력하게 만들 수 있다는 뜻이군요. 더 나아가서 칠흑도 쓰러뜨릴 수 있겠어요.”
“그렇지. 보통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큰 문제가 있어.”
“어떤 문제입니까?”
“그건…….”
테일이 설명을 이어 가려고 할 때.
라크스 공작이 테일의 말을 가로챘다.
“글레드를 어디서, 어떻게 구해야 하는지 아무도 모른다네.”
“예? 그게 무슨 뜻입니까?”
“말 그대로일세. 글레드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왜 나타나는지 밝혀진 게 아무것도 없어. 이 세계에 존재하는 것인지 아닌지도 모르지. 그렇지 않은가?”
라크스 공작은 테일을 보며 물었다.
테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습니다. 학계에서조차도 글레드는 미지의 존재로 알려져 있죠.”
정체불명의 불꽃.
그것이 바로 글레드였다.
‘UFO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되나?’
존재할지도,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것.
‘아니지. 글레드는 지금 내 눈앞에 있으니까. 존재하는 건 확실하고…….’
대신 다른 궁금증이 생겼다.
“그럼 저건 어디서 구해 온 겁니까?”
“그러게. 나도 그게 궁금한데.”
나와 라크스 공작의 시선은 테일에게 향했다.
일부러 구하기도 어려운 걸 어떻게 구했단 말인가?
테일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익명의 기부자가 있었습니다.”
“익명이라고?”
“예, 글레드를 배달부를 통해 이쪽으로 전달해 왔더라고요. 배달부도 자신이 연구소로 가져온 게 글레드라는 걸 전혀 몰랐다고 합니다.”
“누가 보냈는지는?”
“그것도 알 수 없습니다.”
“허허. 거 참…….”
나는 왠지 그 존재가 누구인지 알 것 같다.
‘카인인가?’
카인은 숨어 다니면서 알게 모르게 이야기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만, 여하튼 글레드를 이곳으로 보낸 사람이 카인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카인이라면 칠흑의 약점을 알고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델리피나 전기의 저자 아닌가?
이미 엔딩을 알고 있다면 칠흑의 약점을 알고 있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터.
‘그러면 진작 좀 도와주지.’
성격 참 이상하다.
* * *
글레드가 칠흑의 약점이라는 게 밝혀지긴 했지만, 아직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건 아니다.
“저걸 어떻게 구하느냐……. 그게 문제겠군.”
라크스 공작의 말대로다.
테일은 어깨를 으쓱였다.
“일단 연구소에서 보관 중인 저 글레드라도 소중하게 지키고 있어야죠. 혹시 글레드가 있다면, 저에게 꼭 연락해 주세요.”
“그러도록 하지.”
라크스 공작은 바쁜 일이 있다며 먼저 자리를 떴다.
나는 라크스 공작을 배웅한 뒤에 테일에게 물었다.
“레이샤…… 아니, 페나트 씨는 어디 있습니까?”
“나 대신 마법사 길드에 가 있어. 지금쯤 엄청 고생 중일 거야.”
“왜요?”
“얼마 전에 여기 렉스 연구소에서 사건이 벌어졌잖아. 알파가 탈출한 사건 말이야. 그것 때문에 마법사 길드에 주기적으로 가서 사건 보고와 진술을 해야 하는데 내가 몸이 불편하니까……. 그래서 페나트가 대신 고생하고 있지.”
“그랬군요.”
어쩐지 페나트의 모습이 안 보인다 싶었다.
온 김에 얼굴이나 보려고 했는데…….
아쉬움을 삼키며 나는 테일과 작별 인사를 주고받았다.
도시를 떠나기 전에 나는 미리 챙겨 온 베르투의 반지와 수첩을 꺼내 들었다.
‘여기에도 있겠지?’
반지 위에 화살표가 형성되었다.
예상대로다.
베르투의 소환진을 찾아 마일을 소환했다.
“요즘 저를 많이 찾으시는군요.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십니까?”
“일단 현자의 방으로 가자. 듣는 귀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예, 알겠습니다.”
내가 마일을 찾은 건 테일의 부탁 때문이었다.
“글레드가 뭔지 알지?”
“알고 있습니다.”
역시 현자.
모르는 게 없다.
“글레드를 찾아줬으면 좋겠어.”
“매번 느끼는 거지만, 로인 님께서는 굉장히 난이도 있는 것들만 찾아 달라고 부탁하시는군요.”
“현자의 정보력이면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믿음 때문이지.”
“하하하! 이거 참, 거절할 수가 없네요.”
마일은 내 의뢰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찾아야 할 게 많네요. 대예언가 카인, 벨라시오닉의 보물, 그리고 글레드까지.”
“그만큼 나도 대가를 치르고 있잖아?”
“로인 님은 저희의 우수 고객이기도 하죠. 로인 님께서 주시는 정보는 버릴 게 없을 정도니까요. 항상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고마운 만큼 확실한 서비스, 부탁할게.”
“기대에 부응하게끔 노력하겠습니다.”
역시 세상을 움직이는 건 정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