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엑스트라-113화 (113/240)

# 113

아돈 전투 (4)

사이드를 든 채 나를 매섭게 노려보는 젊은 남자.

연령대는 나와 비슷해 보였다.

그러나 풍기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검은 혈관이 얼굴의 반을 집어삼켰다.

‘저 남자, 칠흑의 조각에 잠식당했어.’

의지가 아직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3단계 같은데…….

설마!

‘데르킨 백작이랑 같은 케이스인가?’

아직 확신하기에는 이르다.

이렇게 된 이상, 직접 붙어봐야 알 것 같다.

남자가 먼저 내게 달려들었다.

‘빨라!’

눈으로 쫓기 힘든 스피드였다.

여태껏 이런 속도를 냈던 인물은 반드가 거의 유일무이했는데…….

하나 남자는 반드보다 더 빠른 스피드를 자랑했다.

내가 남자를 신경 쓰지 않고 있었더라면, 분명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남자는 사이드를 크게 휘둘렀다.

허술해 보여도 정확히 내 목을 겨눈 공격이었다.

겨우 몸을 뒤로 빼며 공격을 피해냈다.

‘아슬아슬했어!’

만약 조금만 더 늦게 반응했더라면, 분명 내 목은 저 거대한 낫에 ‘댕겅’ 잘려 나갔을 것이다.

내가 공격을 피하자, 남자는 굉장히 의외라는 듯이 나를 바라봤다.

“오, 제법이네.”

내게 칭찬을 할 정도로 여유가 있나?

‘얕보였군!’

녀석은 내 승부욕을 자극했다.

허리춤에서 빠르게 단검을 빼 놈에게 투척했다.

매섭게 날아드는 단검.

놈의 어깨에 정확히 꽂혔다.

상대가 멈칫하는 틈을 타 남자에게 다가가 무릎을 들어 올려 복부에 적중시켰다.

남자의 허리가 크게 꺾였다.

수십 미터를 나가떨어지면서 벽에 처박혔다.

일반인이라면 이미 병원에 실려 가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나 나는 남자가 쉽게 쓰러지지 않을 걸 미리 알고 있었다.

‘역시, 내 예상대로야.’

흙먼지를 훌훌 털어 내며 다시 우뚝 일어서는 남자.

칠흑의 조각에게 잠식당했기에 저런 맷집을 보유할 수 있는 거다.

그 사이에 나는 남자의 인물 정보를 확인했다.

-루크

-인물 등급 : 조연

-종합 능력 : SS

-칠흑을 숭배하는 추종자 중 한 명. 잠식 3단계에 접어들어 있는 상태. 높은 신체 능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광기에 사로잡혀 있다.

조연이라고?

높게 쳐줘야 단역 정도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그것보다 높은 등급이 나와서 조금 당황했다.

내가 모르는 조연이 있을 줄이야!

‘3권부터 나오는 주요 악당 중 한 명인가?’

적어도 착한 놈처럼 보이진 않는다.

추종자 중에서 착한 녀석이 있을까?

흙먼지를 털어낸 루크는 갑자기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다.

“좋네, 좋아! 그래, 이런 놈이 하나씩 섞여 있어야지!”

저놈이 미쳤나?

뜬금없이 왜 웃고 난리야?

“좋은 먹잇감은 백작이 다 차지해서 불만이 가득했는데…… 잘됐어.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네.”

너는 기분이 좋을지 모르지만, 나는 최악이라고.

그보다 백작과 무슨 관계지?

전혀 모르겠다.

루크를 여기서 만나게 된 게 오히려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

‘골칫덩어리는 여기서 미리 제거하고 가는 게 좋겠지.’

위기를 기회로 생각하기로 했다.

이런 놈이 라스 일행에게 붙으면 골치 아프다.

게다가 강하기까지 하다.

라스라면 모를까, 라스와 같이 다니는 동료들에게는 분명 루크의 존재가 크나큰 위협이 될 거다.

그도 그럴 것이 내 공격을 정통으로 맞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채 다시 일어섰다.

이런 놈은 처음이다.

저런 잠식 단계를 가진 적을 상대해 본 경험이 없다.

‘그래도 한번 해 볼까.’

자세를 잡았다.

싸우겠다는 내 의지를 확인한 루크는 다시 한번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낫을 휘둘렀다.

동작이 크기 때문에 피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안으로 파고들어 루크의 머리를 강타했다.

뻐어어어억!

둔탁한 감촉이 느껴졌다.

머리를 제대로 맞췄다!

루크의 머리가 반대로 크게 꺾였다.

하나 놈의 손과 발은 마치 따로 노는 듯이 움직였다.

낫을 거둬들여 다시 나에게 휘둘렀다.

설마 저 자세에서 반격을 가할 줄은 몰랐다.

“큭!”

옆구리를 크게 베였다.

용신단의 능력 때문에 방어력과 저항력이 크게 올라간 나인데도 불구하고 이런 상처를 입혔다.

루크는 적어도 내 능력치보다 떨어지진 않은 듯했다.

옷이 내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

출혈이 심하진 않다.

움직일 만하다.

그러나 이런 상처를 입은 건 실로 오랜만이다.

‘라바인 전투 때였을까? 그날 이후인 거 같은데.’

너무 용신단의 힘을 맹신했나?

휴즈한테 배운 싸움의 기술을 다시 상기시켰다.

한편 루크는 목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우드득! 우드득!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만 들어도 아파 보였다.

그러나 루크는 오히려 고통을 기쁨으로…… 아니, 쾌락으로 승화시켰다.

“이 감각! 이 통각! 실로 오랜만이야!”

오랜만이라서 참 좋겠네.

그렇게 좋다면 또다시 느끼게 해 주지!

바닥에 놓여 있던 건물 잔해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 잔해를 힘껏 놈을 향해 던졌다.

묵직하게 허공을 가르며 날아드는 건물 잔해.

루크는 낫으로 건물 잔해를 두 동강 내 버렸다.

루크가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를 노렸다.

다시 한번 놈의 머리를 노렸다.

발 차기로 루크의 안면을 날려 버렸다.

휴즈에게 배운 전법.

이름하야 ‘나는 머리만 노린다!’ 전법이라 할 수 있다.

놀랍게도 이것 또한 실제로 가르침을 받은 기술이다.

루크의 얼굴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이가 후드득 떨어져 내리고 코뼈가 부러졌다.

얼굴이 함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루크는 여전히 웃었다.

‘미친놈이 따로 없네.’

맷집으로 따지면 역대급이다.

어쩌면 맞는 걸 좋아하는 놈일지도 모른다.

이런 부류를 사디스트(Sadist)라고 하나?

줄여서 S라고 표현하자.

‘정신 바짝 차려야겠어.’

잘못하다가 내가 당할지도 모른다.

여태껏 만난 상대 중 가장 강하다. 그건 확실하다.

침을 꿀꺽 삼켰다.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진정해라, 나야. 떨지 말라고.

사이드를 들어 내게 겨누는 루크.

“어때. 즐거워?”

목소리가 안 나오는 게 천추의 한이다. 말만 할 수 있었더라면 놈의 말에 바로 반박했을 텐데.

루크는 의아함을 드러냈다.

“말을 못하나?”

“…….”

“그러면 내가 고쳐 주도록 하지. 성대를 잘라서 새로운 성대로 갈아 끼우면 말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오랜만에 재미있는 상대를 만났는데 말 한마디 못 섞으면 섭섭하잖아. 안 그래?”

아무렇지도 않게 잔혹한 말을 내뱉는다.

생긴 대로 노네.

드래곤 클로를 발동시킬 준비를 마쳤다.

여차하면 여기서 결판을 낼 거다.

그러나 상황이 갑자기 급변했다.

“……쳇.”

갑자기 루크가 사이드를 내려놓았다.

처음에는 뭐지 싶었다.

하나 잠시 후.

데르킨 백작을 따라 후퇴하는 병사들과 추종자들을 보고 어떤 상황인지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퇴각 신호를 내린 모양인가 보다.

추종자가 루크에게 외쳤다.

“루크 님! 퇴각하셔야 합니다. 데르킨 백작님께서 명하셨습니다!”

“알고 있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답하는 루크.

놈은 나를 끝까지 응시했다.

이후에 나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나중에 또 보자고. 재미있는 친구.”

누가 네놈 친구냐?

서로 친구하기로 한 것도 아니고, 순전히 제멋대로네.

* * *

치열했던 아돈 전투가 끝났다.

나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원래 전투에 직접 개입할 생각은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 루크라는 놈과 마주치게 되어서 강제로 전투를 펼치게 되었다.

그래도 덕분에 정보 하나를 얻게 되었다.

‘데르킨 백작 말고 칠흑의 조각의 힘을 사용하는 자가 또 있어.’

이걸 알아낸 것만으로도 크나큰 수확이었다.

‘슬슬 빠져나갈까?’

라스 일행과 라크스 공작 일행의 생존을 확인했으니, 이제 더 이상 아돈에 볼 일은 없다.

몰래 사라지려고 하던 찰나였다.

“거기, 누구야?”

이런.

오늘은 왜 이리 자주 들키는지 모르겠다.

평소의 나답지 않다.

고개를 슬며시 돌렸다.

내가 아는 얼굴이었다.

상대방도 나를 아는 모양인지 아는 척을 해왔다.

“어? 로인이라던 그 친구 아니야?”

“…….”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못한다.

왜냐하면 상대는 인물 등급 조연인 카이딘이었으니까.

“이곳엔 어쩐 일이야?”

“…….”

“아, 맞다. 말을 못한다고 했지?”

설정은 계속 유지되고 있었다.

“왜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다친 곳은 없어? ……가만, 다쳤네?”

아까 루크한테 베인 상처가 아직 덜 아물었다.

“전투에 휘말렸던 것 같네. 괜찮다면 치료받고 가.”

나는 손을 휘저었다.

괜찮다는 신호였다.

그러나 카이딘은 전혀 다른 뜻으로 받아들였다.

“치유사 어디 있냐고? 잠깐만, 내가 불러올게.”

아니, 그게 아니라 난 괜찮다고1

이 양반, 말이 전혀 안 통하네. 눈치가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잘됐다.

카이딘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나는 빠르게 장소를 이탈했다.

이대로 나울로 향한다.

* * *

나울로 돌아오자마자 용병들은 내 모습을 보고 기겁을 했다.

심각하게 다친 거 아니냐며 소란을 떨었다.

그러나 여기에 오면서 내 상처는 완벽하게 아물었다.

용신단의 효과 중에 치유 능력을 높여 주는 패시브 스킬이 존재한다.

덕분에 이런 상처는 금세 자가 치료할 수 있었다.

“괜찮아, 난 멀쩡하니까. 라비, 갈아입을 옷 좀 마련해 줄래?”

“네, 잠시만요.”

용병들을 진정시킨 나는 의자에 앉아 잠시 숨을 돌렸다.

여기까지 급하게 오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

드레인은 의자를 끌고 내 앞에 자리를 잡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대장?”

“추종자들하고 잠깐 전투를 벌이다가 왔습니다.”

“아돈에서? 싸울 작정이었더라면 우리도 같이 데려가도 됐잖아.”

“이미 판세는 많이 기울어져 있었어요. 그래서 일부러 선배에게 용병들을 이끌고 나울로 돌아가도록 한 겁니다. 도중에 생각보다 강한 놈이 있어서 고전을 좀 했지만요.”

이건 계산 착오였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내가 소설을 5권까지 전부 다 읽었더라면 아마 이런 결과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루크라는 등장인물을 몰랐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큰 사건은 아니지만, 자칫 잘못했더라면 내가 크게 당할 뻔했다.

‘앞으로는 조심해야겠어.’

이어크 협곡에서 거둔 대승 때문에 잠시 방심하고 말았다.

추종자 세력은 여전히 강하다.

언제 루크 같은 강자가 튀어나올지 모른다. 주의를 기울이는 편이 좋아 보인다.

새 옷을 가져온 라비가 나에게 말을 붙였다.

“대장님, 새로 보고드릴 게 있어요.”

“어떤 보고?”

“테일이라는 분한테 편지가 도착했는데……. 그냥 편지만 전해 달라고 하더라고요. 내용은 저도 몰라요, 대장님만 보라고 해서요.”

“그래? 편지는 어디 있는데?”

“여기요.”

테일이 보낸 한 통의 편지.

무엇 때문에 보낸 걸까?

지금 당장 확인하고 싶어졌다.

옷을 갈아입은 후에 나는 내 개인 사무실로 향했다.

봉투를 뜯어 내용을 확인했다.

눈에 확 들어오는 문구가 있었다.

-……칠흑의 조각의 약점을 알아냈어. 이 편지를 보는 즉시 바로 연구소로 와 줬으면 좋겠군.

“칠흑에게 약점이 있긴 하구나.”

드디어 이 사태에 관련된 실마리가 하나둘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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