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
도플갱어의 숲 (3)
사방에서 달려드는 도플갱어들.
그 숫자만 하더라도 족히 40여 마리는 되어 보였다.
놈들은 신체 일부를 변형시켜 우리를 공격했다.
변신한 슬라임을 상대하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강하진 않았다.
우리 파티 중에서 가장 약한 드레인조차도 한꺼번에 3마리 정도는 거뜬히 상대할 정도였으니까.
“웃차!”
잠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도플갱어 한 마리가 내 뒤를 노렸다.
나는 가볍게 놈의 공격을 흘렸다.
“뒈져.”
뻐억!
놈의 안면에 펀치를 날렸다.
물 풍선을 터트리는, 그런 감촉이었다.
도플갱어들은 맷집이 매우 약했다.
가벼운 주먹질 한 방만으로도 충분히 쓰러뜨릴 수 있었다.
어느 정도 상황이 다 정리되었을 무렵 파이스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제가 아는 도플갱어보다 훨씬 약한 거 같네요. 저번에 교단에서 대대적으로 도플갱어들을 퇴치하러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훨씬 강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드레인에 이어 2대 설명충이 되어 버린 페나트가 친절하게 이유를 들려줬다.
“Z209의 분신이라서 그래요. 자가 번식을 통해 낳은 도플갱어는 일반 도플갱어에 비해 훨씬 약하거든요.”
“근데 모험가들이 이런 녀석들한테 죽임을 당했다는 겁니까? 벨레너의 13난제에 도전할 정도면 한가락 하는 실력자들일 텐데.”
“도플갱어의 가장 무서운 점은 공격력, 방어력이 높다는 게 아니라 ‘방심을 유도한다.’니까요. 동료라고 믿게끔 그들을 속인 후에 뒤에서 몰래 칼침을 놓는 게 도플갱어의 방식입니다. 제아무리 뛰어난 실력을 지닌 용병이라 하더라도 그런 방식이라면 당할 수밖에 없죠.”
충분히 이해한다.
판타지 소설에서 자주 보이는 장면이 있지 않은가?
강한 주인공이 믿었던 동료에게 배신을 당해 죽고 회귀하는 그런 연출들 말이다.
믿었던 자에게 뒤통수를 맞는 게 가장 무서운 법이다.
단검에 묻은 도플갱어의 채액을 닦은 반드가 페나트에게 질문을 던졌다.
“모체를 쓰러뜨리면 이놈들은 알아서 죽는다고 하지 않았나?”
“네, 맞아요.”
“그러면 만악의 근원이 되는 어둠의 뿌리를 뽑는다면, 이 숲의 영원한 안식이 찾아온다는 뜻이군. 과연…….”
이해한 거 맞냐?
하지만 여기서 Z209를 어떻게 찾아야 할지를 잘 모르겠다.
칼바의 용암 동굴 때처럼 내가 이곳의 공략 방법을 아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벨레너의 13난제를 클리어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게 아니다.
검은 괴물, 알파를 붙잡기 위해 온 거다.
고개를 연신 끄덕이던 반드가 갑자기 동작을 멈췄다.
에나가 반드의 행동에 관심을 보였다.
“왜 그래요?”
“근처에서 어둠의 기운이 느껴져.”
“아, 그러세요?”
에나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반드의 말을 무시했다.
그의 중2병 설정은 우리 용병단 내에서도 이미 유명해졌다. 그렇다 보니 가끔은 이렇게 그냥 반드의 말을 흘려 버리는 때가 있었다.
하나 이번에는 아니었다.
“짐승의 소리가 들리는군. 이 소리, 이 감각…… 틀림없다, 어둠에 먹힌 자의 것이야.”
반드가 멋대로 이동을 개시했다.
뒤늦게 말리려 했지만, 워낙 빠른 녀석이라 그런지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어쩔 수 없지.
“반드를 데려올 테니까 여기서 꼼짝 말고 있어.”
“저도 같이 가죠.”
레이샤르가 내 뒤를 따랐다.
반드의 속도를 따라잡는 일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레이샤르는 어렵지 않게 나와 비슷한 속도로 반드의 뒤를 바짝 따라잡았다.
역시 드래곤이야.
만능이네, 만능.
이동하는 와중에 레이샤르는 귀가 솔깃할 만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반드라고 했나? 저자는 감이 매우 좋군.”
“그게 무슨 뜻입니까?”
“자네에겐 말하지 않았지만, 난 아까부터 이곳 주변에 내 마나를 계속 흘리고 있었어. 알파를 찾기 위해서였지. 그러던 도중에 우리가 지금 가고 있는 방향으로 이질적인 기운이 감지되더군. 안 그래도 도플갱어들을 쓰러뜨리고 난 후에 자네 일행들에게 이쪽 방향으로 한번 가 보자고 말하려 했는데 저 청년이 먼저 선수를 쳤군. 좋은 부하를 뒀어.”
좋은 부하인지 어떤지는 잘…….
그래도 실력 하나는 뛰어나다.
종합 능력이 S등급이니까 저 정도 활약은 해 줘야지.
단…….
‘움직이기 전에 미리 말이라도 해 주든가!’
아니지, 생각해 보니 말은 했다.
하지만 그걸 알아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을 뿐.
반드의 뒤를 따라가다 보니 정말로 알파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알파는 이렇게 빨리 우리에게 발각될 줄 몰랐는지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놈이 제정신을 못 차리는 틈을 노려야 한다.
‘이때 제압해야 해!’
속도를 더 붙였다.
반드를 앞질러 내가 먼저 알파에게 선빵을 가했다.
뻐어어억!
알파의 머리를 정확히 가격했다.
알파는 충격에 못 이겨 수십 미터를 굴렀다.
추진력까지 더해져서 펀치의 위력이 더 강해진 덕분이었다.
바로 자세를 잡은 알파는 우리를 향해 으르릉거렸다.
아직 잠식 3단계까진 도달하지 못한 듯했다.
‘운이 좋네.’
3단계로 접어들면 상대하는 게 골치 아파졌을지도 모르는데.
내가 정면에, 그리고 반드와 레이샤르가 각각 왼쪽과 오른쪽으로 돌아 들어가 놈을 포위했다.
레이샤르는 우리에게 경고했다.
“놈을 죽여선 안 돼. 중요한 샘플이니까.”
“알고 있습니다.”
평소처럼 검은 심장을 뽑아서 없애 버리면 안 된다.
사실 그게 가장 속 편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알파는 중요한 떡밥이 될 테니까.
한편 알파는 처음부터 우리에게 덤빌 생각이 없는 모양인지 도망칠 틈을 찾아 바삐 움직였다.
이미 나 하나만으로도 알파가 감당하기 힘들다.
거기에 레이샤르와 반드까지, 놈에게 승산은 없었다.
현명한 선택이다.
하지만…….
‘정답은 아니지.’
그나마 가장 약해 보이는 반드 쪽으로 몸을 날리는 알파.
반드는 단검 수십 자루를 빼 들었다.
“라드리치 3레벨, 개방!”
반드의 몸이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 게 아니었다.
워낙 빨리 움직여서 사라진 것처럼 보였을 뿐.
순식간에 알파의 등에 올라 탄 반드는 단검 4개를 알파의 손등과 발등에 꽂았다.
“필살! 이노센트 크러셔!”
뭐냐, 저 낯 뜨거워지는 필살기 외침은.
위에서 알파를 짓눌러 아래로 냅다 꽂아 버렸다.
손등과 발등에 꽂혀 있던 단검이 지면에 제대로 박히면서 알파의 움직임을 완전히 차단했다.
“대장! 마무리!”
반드는 내게 뭔가를 강렬히 원하는 눈빛을 보냈다.
정말로 해야 돼?해야 하냐고!
에라이, 모르겠다!
“초필살! 슈퍼 울트라 손날 치기!”
상대의 뒷목을 가격시켜 놈을 기절시키는 무시무시한 기술이다.
나 정도 되는 스텟을 지닌 사람이 손날 치기를 하면 기절이 아니라 뒷목이 날아간다.
그나마 알파라서 기절로 끝난 거다.
레이샤르가 마나 덩어리로 알파의 손과 발을 옭아맸다.
이것으로 포획 완료.
반드는 나를 바라보며 말없이 엄지를 추켜올렸다.
하나 나는 쥐구멍이 있다면 그쪽으로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창피해 죽을 뻔했네.’
다음에는 절대로 안 할 거다.
* * *
알파를 포획했으니, 이제 이 녀석을 데리고 나가기만 하면 된다.
알파는 인간 형태로 돌아와 있었다.
젊은 연구원을 들쳐 맨 뒤에 용병단이 기다리는 곳으로 향했다.
도중에 익숙한 얼굴들이 우리를 반겼다.
“어머, 대장!”
에나가 우리를 맞이했다.
그녀뿐만 아니라 파이스, 드레인까지.
베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베라는 어디 갔어?”
“대장 찾으러 갔어요.”
“우리를? 내가 가만히 있으라고 하지 않았어?”
“그 하이 엘프 아가씨가 우리 말을 들은 적 있었나요? 그냥 멋대로 가 버리더라고요.”
“…….”
뭔가 이상하다.
다른 용병들은 둘째 치더라도, 베라는 적어도 내 명령에는 잘 따르는 모습을 보여 왔다.
불만이 가득한 모습을 보이긴 했어도 대놓고 명령 불복종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여기가 어딘지 잊어서는 안 된다.
이곳은 도플갱어의 숲이다.
눈앞에 있는 동료들이 내 동료가 맞는지 의심하고 또 의심해 봐야 한다.
레이샤르도 같은 의견이었다.
“아까 에나 양이 우리에게 만들어 준 가락지 있잖아요. 그거 보여 주실 수 있나요?”
“설마 저를 의심하는 건가요?”
“네.”
레이샤르는 단호하게 답했다.
한번 미움을 사는 것으로 눈앞에 있는 존재가 도플갱어인지 아닌지 밝혀낼 수만 있다면, 상당히 값싼 희생이라 생각한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에나, 페나트 씨의 말대로 해. 파이스하고 선배도요.”
“…….”
이들은 노골적으로 불편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마지못해 손을 들어 올리는 그들.
풀잎으로 만든 가락지가 착용되어 있었다.
“이제 됐나요?”
“하나 더. 다들 손 내밀어 봐. 손등이 보이게.”
파이스가 만든 표식을 확인해 보려는 거였다.
그러나 파이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죄송합니다, 대장님. 그 표식은 지속 시간이 30분밖에 되지 않아요.”
거짓말이다.
파이스는 분명 나에게 24시간동안 표식이 지속된다고 했다.
좋아,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페나트 씨, 얼음 덩어리 하나만 만들어 주실 수 있습니까?”
“얼음 덩어리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레이샤르는 얼음 마법을 발휘해 손바닥 안에 들어올 만한 크기의 얼음 덩어리를 만들어 냈다.
나는 그걸 에나에게 투척했다.
“자.”
“어멋! 차갑게 왜 그러세요, 대장님!”
오케이. 이것으로 확정이다.
“도플갱어, 당첨.”
나는 망설임 없이 에나의 안면에 주먹을 휘둘렀다.
촤락!
도플갱어의 체액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내 그럴 줄 알았다.
“에나가 차가운 걸 싫어한다는 게 말이 되냐? 흉내를 낼 거면 제대로 내든가.”
정체가 발각되자마자 가짜 파이스와 드레인은 도주를 시도했다.
그러나 레이샤르의 얼음 창과 반드의 단검이 놈들의 도망을 허락하지 않았다.
표식을 여러 개 만들어 두니까 확실히 피아 식별에 많은 도움이 된다.
그나저나…….
‘용병들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쉽게 당할 자들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걱정되기 시작했다.
* * *
합류 지점까지 가는 도중에 우리는 도플갱어 무리들과 정확히 다섯 번이나 마주쳤다.
대부분 파이스의 표식에서 걸러졌다.
그리고 하나 더 있었다.
‘레이샤르의 말대로 베라는 복사를 못하나 보네.’
여태껏 만났던 도플갱어 일행들 중에서 유일하게 베라만 없었다.
하이 엘프와 드래곤 같은 고등 생물은 도플갱어가 복사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그게 정말인가 보다.
여하튼 우여곡절 끝에 겨우 합류 지점에 도착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도 계속되었다.
“나 왔어.”
라고 말을 하며 모습을 드러낸 순간,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번에도 도플갱어 무리들과 마주쳤다.
여태껏 우리는 아직 합류하지 못했던 멤버들의 도플갱어와 만났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드레인은 이렇게 말했다.
“대장이 또 추가됐네. 이번이 일곱 번째 아니야?”
“그러네요.”
“이렇게 많은 대장님은 처음 봐요.”
망할 도플갱어 녀석들은 이번엔 내 모습으로 잔뜩 둔갑해 있었다.
산 넘어 산이구먼, 정말로.